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잠시 후. 두꺼운 팔에 붕대가 감겼다. 왜 사이러스지? 시더가 동원할 수 있는 마법사가 둘이라는 사실이 에스페란사의 신경을 긁었다.
‘나한테 쓸 채혈 키트였는데.’
시더가 위생적이고 깔끔한 채혈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채혈 키트를 처음 쓰는 게 사이러스라니. 에스페란사는 불만을 삼키며 사이러스의 팔에 감은 붕대를 더 세게 당겨 고정했다.
“엄살 부리지 말아요.”
시더는 손에 넣은 어마어마한 양의 혈액, ‘마법사의 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냉랭하게 말했다. 그는 아까보다 기분이 좀 더 나빠 보였다. 말에 가시가 서 있었다.
“얼마 뽑지도 않았잖아요? 고작 이 정도로는 기계 전체를 다 가동시킬 수도 없어요.”
기계는 반 이상 부서져 있었고, 가동이 되는 범위는 그보다 더 적었다. 그러니 실제로 사용되는 마력량은 백만 토트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시더가 레버를 당겼다. 거대한 기계의 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천천히 창고 전체로 번져 나갔다. 발밑이 울리는 진동에 머리까지 흔들렸다.
“이러다 무너지는 것 아닙니까?”
반쯤 무너진 천장은 덜덜 떨리는 기계 부품을 따라 진동하고 있었고 바닥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쩍쩍 갈라진 기둥도 부들거렸다. 대체 어쩌다 이 꼴이 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상태로도 위태로운 창고에 이만한 크기의 진동이 계속 가해진다면 정말로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대로 천장이고 기둥이고 전부 무너져 기계도 다 부서져 버리길 바라는 내심의 소망이 있기는 했지만, 시더는 기계 앞으로 나아가 레버를 당겼다. 해석 기관 전체를 달구던 마력이 잦아들었다. 진동도 천천히 멎었다. 천장에서 부스러져 떨어진 돌 조각이 발치를 굴렀다.
기계 내부의 마력이 완전히 빈 것을 확인한 시더가 사이러스를 향해 보란 듯이 말했다.
“자. 보다시피 기계는 반이나마 작동은 하지만, 필요한 마력은 백만 토트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이제 궁금증은 전부 해결이 되셨는지?”
사이러스는 시더가 애초부터 그를 이용해 이 기계를 작동시켜 볼 생각이었단 사실을 전혀 몰랐으므로, 스스로 억지를 부렸다는 점을 통감하며 고개를 숙였다. 채혈을 더 하면 어떻게든 마력량을 채울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부서진 기계를 움직이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
“……예. 충분합니다.”
“그럼 이제 내 숲에서 나가 주시는 게 어떨까요? 협조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되면 어련히 연락할 테니.”
그러나 입꼬리를 비뚤게 끌어올린 시더의 얼굴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고 말하는 듯했다. 사이러스는 불안한 낯을 감추지 못한 채 에스페란사를 돌아보았다.
“에스페란사 님. 백작이 거절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은 낮습니다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제가 기본적인 원리는 알고 있고, 다른 마도 공학자들도 결국은 시공간 기계의 재현에 성공했으니까요.”
시더가 했던 말이 진짜였다.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말이 달라졌네?”
“지금으로서는 에이번데일 외에 다른 마도 공학자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시간을 준다면…… 이쪽에 관심이 있는 마도 공학자는 많으니까요.”
“난 됐어.”
솔직히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이대로 시더가 정말로 거절한다면 이 세상에 묶여야 하는 건가, 하는 불안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했고, 약속한 이상 지켜야 했다. 두 번이나 신뢰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어떻게 해도 ‘다시 만날 수 없다면 죽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마음이 바뀌신다면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제 위치는 배들린가에 있는 ‘마법사의 펍’ 바텐더가 알고 있습니다.”
“넌 앞으로 뭘 하려고?”
에스페란사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물었다. 에두른 거절이었지만, 사이러스는 모른 척했다.
“일단은 나인 호더로 가 볼 생각입니다. 다리아가 가진 황금 발톱을 빼앗으려면 언젠가 한 번은 부딪혀야 할 테니까요.”
그 때가 되면 결국 다시 만나게 되겠군.
사이러스는 두 사람에게 각각 인사하고, 의외로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아쉬운가요?”
“뭐가요?”
시더는 가늘어진 눈으로 에스페란사를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스스로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에스페란사의 감정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저 남자는 ‘에스페란사와 같은 세계로 돌아갈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했다. 어차피 그는 모르는 일이 될 텐데.
“돌아가죠.”
말을 타고 돌아가는 동안은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사이러스가 있을 때도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지만. 늘 두 사람 사이를 메우던 가벼운 말장난도, 시선으로 주고받던 웃음도 없었다.
메마른 침묵을 지키며 흑룡이 만들어 놓은 시커먼 공터를 지나, 나무가 듬성듬성해지는 숲의 초입에 다다랐다. 에스페란사는 왠지 저택이 평소보다 조금 음침하게 느껴졌다.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기가 어둡다고 하면 과민한 걸까? 그러나 마치 장엄한 저택 주변에 검은 안개가 낀 것처럼 느껴져 불안했다. 진짜 게임이었다면 은근한 배경 음악이 깔릴 것 같다.
현관문을 연 순간, 어수선한 분위기가 살갗을 콕콕 찔렀다. 널따란 홀은 관광객을 받지 않는 날 으레 그렇듯 휑하기만 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시더를 발견한 덴버 부인이 창백한 얼굴로 달려왔다.
“돌아오셨군요, 백작님! 콜먼 집사가 쓰러졌습니다.”
숨을 몰아쉰 부인이 얼른 말을 이었다.
“아까의 지진 때문인 것 같아요. 발작을 하며 쓰러져서 의사를 불렀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요.”
콜먼 집사는 나이에 비해 정정해서 죽어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면이 있었다. 그런 콜먼이 발작까지 하며 쓰러졌다니. 게다가 지진?
“지진이라면 설마…….”
지진이라고 할 만한 진동은 하나뿐이었다. 그게 여기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나? 하지만 그렇다 해도 콜먼과 기계가 무슨 상관이길래 고작 그런 진동으로 발작을 일으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집사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아니요, 여기 있습니다.”
하인들의 부축을 뿌리친 콜먼 집사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젊고 건장한 하인들이 악으로 뭉친 노인의 팔 힘을 당해 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시뻘겋게 핏줄이 터진 눈을 부릅뜬 그가 대뜸 시더를 향해 물었다.
“그 기계를 다시 켜신 겁니까? 그, 그 악마의 기계를?”
시더는 물끄러미 집사를 내려다보았다. 집사는 본래 시더의 취미 생활에 부정적이었다. 마귀에 씐 것처럼 백안시하기도 했다. 노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려니 하고 적당히 무시해 왔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셔서는 안 되는 겁니다. 돌아가신 백작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그게 어떤 기계인데……!”
시더의 크라바트를 쥔 앙상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흘러넘쳤다. 모자란 숨을 헐떡거리던 노인이 목 놓아 외쳤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무심하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날카로운 통증이 뺨을 스쳤다.
어수선하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에스페란사가 순식간에 집사의 팔을 꺾어 제압했다. 젊은 하인 넷을 뿌리쳤던 집사는 에스페란사의 손아귀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 자신이 한 짓을 깨달은 노인은 꺽꺽 목 졸린 소리만 냈다.
“별꼴을 다 보겠군.”
시더가 혀를 차며 손끝으로 뺨을 문질렀다. 한평생 남을 쳐 본 적 없는 노인이 헛손질로 친 것이 그리 아플 리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집사에게 뺨을 맞는 백작이 어디 있나. 모멸감이 통증보다 더 선명했다.
“덴버 부인!”
하얗게 질린 덴버 부인이 재빨리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지시가 필요하진 않겠지. 알아서 해결하게.”
덴버 부인은 수더분한 성격이었지만, 대저택의 하녀장답게 눈치가 빨랐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에스페란사가 사심을 담아 기절시킨 집사는 시체처럼 늘어져 집사실로 옮겨졌다. 하인들을 단단히 입단속한 덴버 부인은 밀런에게 그들을 맡겨 버렸다. 상급 고용인들 손을 떠돌던 하인들이 혼이 빼앗긴 얼굴로 예, 예, 하는 동안 의사가 도착했다.
“백작님부터 보시는 게 낫겠어요.”
덴버 부인은 주눅 든 와중에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의사는 시더의 보잘것없는 상처를 확인한 후 얼음주머니를 처방해 주었다.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상처보다도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수치심이 더 강했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시선을 외면했다. 뭐라 위로를 할 수도 없어 에스페란사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의사가 떠나자, 덴버 부인이 어깨를 웅크리며 말했다.
“백작님, 콜먼 집사가 한 짓은…….”
“변명은 부인이 할 일이 아니지. 안 그런가?”
“……맞습니다. 제가 주제넘었어요.”
“자, 그럼 내가 들어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집사에게 묻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기절한 상태인 데다 곧이 말을 할지도 알 수 없으니 시더는 편한 대로 말이 통하는 쪽을 괴롭히기로 했다.
잠시 망설이던 덴버 부인이 두 손을 모아 쥐며 말했다.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않은 건, 오직 전 백작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작님께서 명령하신다면 따라야지요.”
덴버 부인의 선한 낯이 흐려졌다.
“백작님, 창고에 있던 기계가 망가진 게 태풍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었죠. 사실은 태풍이 아니었어요. 그 기계였죠.”
시더의 나이 열여섯에 만들고 통렬한 첫 실패로 남은 기계는 4년 동안 그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다. 관리도 전혀 되지 않았다. 다만 선대 백작의 사냥용 오두막이 근처에 있었기에 그 존재를 잊지는 않았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무 살의 시더 클라이번이 나인 호더에서 박사 학위 논문에 매진하고 있던 때에, 그 기계가 움직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땅이 울리는 듯한 진동이 저택까지 이어졌다.
“아무래도 도련님의 기계가 말썽을 일으킨 것 같은데?”
5년 전, 비교적 멀쩡했던 시절의 콜먼 집사가 흐린 눈으로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은 식기를 닦던 손이 느려졌다. 그때 덴버 부인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큰일 났어요! 백작님이 숲에 계신다고요!”
쨍그랑, 값진 은 식기가 발치를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