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52
152화
차가운 침구가 등을 감쌌다. 에스페란사는 뻑뻑한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낯선 천장화가 에스페란사를 반겼다. 늦은 아침이었다. 사람의 생활 패턴은 전염성이 강해서,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일찍 재우는 데 성공하면서 본인의 기상 시간을 희생하고 말았다. 에스페란사는 습관적으로 상태 창에 뜬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10시 35분.
어두운 하늘 때문에 실제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느껴졌다. 해가 뜨기는 한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침대를 혼자 차지하고 앉아 고개를 돌리다가 탁자에 놓인 청동 재떨이를 발견하고 나서야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떠올려 냈다. 그리고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어디 갔지?”
일부러 소리를 내어 말했지만, 소리는 넓은 벽에 부딪혀 사그라들었다. 숄을 대충 걸치고 바깥으로 나왔다. 저택은 약간 어수선했다. 에스페란사를 발견한 애니가 뭔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아, 그래. 좋은 아침. 애니, 그런데 혹시 시더는…….”
“백작님이라면, 밤에 급하게 나가셨다던데요?”
“밤에?”
늦은 저녁에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시더를 끌어안고 잠들었던 기억은 남아 있었다. 맹세컨대 그게 끝이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기억이 날아갈 리가 있나.
그런데 나갔다고?
“네. 모르셨어요?”
몰랐어!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래 놓고, 그냥 갔다고? 일언반구 말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용인들은 모두 바쁘게 일하는 중인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청소 하녀들만 청소 도구를 들고 방과 방 사이를 휘리릭 오갔다. 그들에게 물어봐야 대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밀런은?”
“같이 갔어요.”
그렇단 말이지. 야반도주를 한 주제에 밀런을 챙길 여유는 있었단 말이지.
“그럼 음, 콜먼이랑 덴버 부인은?”
에스페란사는 콜먼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짝 멈칫했지만, 영문을 모르는 애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제 퇴직하셨다는데요? 급하게 가셨대요. 안 그래도 아침에 신임 집사님이 오셨어요.”
‘바로 옆에 있는 날 깨워서 외출한다는 말 한마디 할 겨를도 없으면서 집사를 새로 고용할 시간은 있었다고?’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대체 어딜 갔길래? 에스페란사는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찾으러 갔다.
“덴버 부인!”
그리고 하녀장, 덴버 부인은 가뜩이나 바쁜 상황에 흥분한 에스페란사에게 붙잡혀 사정 설명을 하느라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아가씨, 그러니까 말이죠.”
애써 에스페란사를 진정시킨 덴버 부인이 한 설명은 이러했다.
시더 클라이번, 이 얄밉고 못된 인간은 밤늦은 시간에 방에서 나와서, 밀런을 불러 짐을 싸게 하고, 콜먼을 해고하고 전 백작의 시종이었던 밀런의 아버지를 신임 집사로 불러 앉히고, 밀런과 단둘이 아침 기차를 타고 나갔다는 것이다.
기차라고? 기차라고!
“어디로 갔는데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 나인 호더 아닐까요?”
“나한테 전하라고 한 말은?”
“제게는 없어요. 아, 그보다 아가씨.”
덴버 부인은 얼이 빠진 에스페란사를 잘 차려입은 중년 남자에게로 안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찰스 밀런입니다.”
고풍스럽게 나이 든 남자는 아들과 빼닮은 얼굴이었다. 상급 고용인의 정장을 빠짐없이 차려입고, 밀런과 똑같이 무뚝뚝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물론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에스페란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반가워요. 그런데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콜먼 전 집사는 건강이 악화되어 은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 급한 대로 본래 이 저택에서 일하던 제가 집사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만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런 건 괜찮아요. 시더는 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 혹시 언질 받은 것 없나요?”
“제게 남기신 말씀은 없습니다. 아마 나인 호더로 가신 게 아닐까요?”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긴 하다. 기차를 타고 당장 갈 만한 데라곤 나인 호더의 에이번데일 저택뿐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거라면 왜 말도 없이 떠났단 말인가?
“아가씨!”
그때 치마를 한 손에 쥐고 달려온 애니가 에스페란사의 손에 편지를 쥐여 주었다. 밀랍으로 봉인까지 찍은 편지 봉투에는 시더의 필체가 분명한 필기체로 에스페란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백작님 침실 청소하는 애들이 발견했대서 얼른 가지고 왔어요. 잘했죠?”
애니는 그 애들과 친해지려고 열심히 잡일을 도와준 보람이 있다고 키득거렸다. 에스페란사가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애니가 보란 듯이 눈을 찡긋거렸다.
밀런 집사의 눈초리가 얼핏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막 새 집사가 된 그는 고용인의 기강을 잡는 대신 에스페란사가 편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애니를 보면서 검지를 입술에 올리는 것으로 주의를 끝냈다. 애니가 조용해지자 에스페란사는 천천히 편지를 뜯었다.
내용은 짧았다. 시답잖은 인사 몇 마디. 어제의 위로에 대한 감사 한마디. 그리고…….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곤조곤하면서도 묘하게 냉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입술을 대고 읽어 주는 듯했다. 그래서 더 열이 올랐다. 누가 죽게 내버려 둔다고! 어떻게 편지에서까지 얄미울 수가 있지? 에스페란사는 구겼던 종이를 찢어 버릴 듯이 다시 펼쳤다. 마지막 문단은 이러했다.
자기는 말도 없이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가 버려 놓고 자기 생각을 해 달라고?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해?
편지지를 뚫어 버릴 듯한 눈빛이 순식간에 추신까지 읽어 내렸다.
“나인 호더로 가라고……? 누구 멋대로?”
문장 자체는 훨씬 부드럽고 에두른 권유였으나 에스페란사가 받아들이기에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자기는 튀어 놓고 편지로 어디로 가라 마라 하고 있으면 그게 지시지, 뭐.’
그러나 잠시 후, 에스페란사는 그게 최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저택에서 에스페란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더의 연구실에서 뒹구는 것뿐이니까.
“애니. 나인 호더로 갈 거야. 밀런 집사, 정말 반갑고, 잘 부탁해요. 그런데 난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밀런 집사는 무뚝뚝하고 왠지 약간 재수 없는 시더의 시종을 꼭 닮은 얼굴로 말했다.
“나인 호더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해 두었습니다. 오후 세 시 기차입니다, 아가씨.”
하녀 다섯 명이 달려들어 짐을 쌌다. 에스페란사는 숙녀의 기준으로는 물론이거니와 하녀들보다도 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이번에 겨울옷을 맞추면서 옷이 늘었다.
곧 애니가 무려 짐 가방 두 개짜리 짐을 완성했다. 자기 것까지 합쳐서 짐 가방 세 개였다. 에스페란사는 그것들을 전부 인벤토리에 털어 넣었다. 손가방 한 개씩만 제외하고.
* * *
나인 호더까지 가는 길은 한산했다. 밀런 집사는 시더처럼 일등실 한 칸을 전부 예매해 버리는 짓은 하지 않았으므로, 에스페란사와 애니는 조용한 노부부와 객실을 같이 썼다.
기차 창밖으로 한산한 숲길이 이어지다가, 먼발치로부터 공장에 둘러싸인 시계탑과 마천루의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역은 나인 호더 중앙역입니다!”
까만 제복을 입은 승무원이 일등석 복도를 오가며 종을 울렸다.
기차가 멈춘 뒤, 그들은 가벼운 짐을 챙겨 내렸다. 기관차에서 증기가 훅 끼쳤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가 두 사람을 무자비하게 치고 지나갔다. 애니를 붙잡고 옆으로 빠져나온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역 바깥의 도시로 향했다.
나인 호더였다. 모든 것이 시작된 바로 그 도시. 어쩌면 지금도 그 원흉들이 똬리 틀고 있을, 문명의 첨단이자 쇠락의 절벽.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증기 마차를 잡아 올게요.”
“아냐. 전차를 타자. 어차피 짐도 없잖아.”
기묘한 감이었다.
증기 마차는 비싼 대신 나인 호더 중앙역이 있는 퀸즈센트럴을 지나 곧장 어퍼 레인으로 향할 것이다. 그에 반해 전차는 퀸즈센트럴에서 어퍼 레인까지 가는 데 직행으로도 무려 40분이 걸린다. 퀸즈센트럴, 시청, 캐틀릭 스트리트, 의회까지 지나야 어퍼 레인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상류층 신사 숙녀의 발길이 닿을 만한 곳은 전부 다 찍는다고 보면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상류층 신사 숙녀들은 잘 이용하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전형적인 숙녀의 가을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므로 전차에 타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고집을 부린 까닭은, 직감이라고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퇴근 시간 전에 도착한 덕에 몇 정거장 가지 않아서 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창가에 앉아 5분에 한 번씩 덜커덕 멈추는 전차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퀸즈센트럴은 에스페란사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몇 정거장이 더 지나고,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관공서 건물이 있어야 할 시청 주변을 지나갈 때쯤 에스페란사는 길의 모습이 다른 의미로 낯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시기에는 본 적이 없었던 건물들이다. 비록 완공된 것은 없었지만 공사장 주위를 둘러놓은 벽에 그려진 모양이 익숙했다. 용도를 짐작하기 힘든, 그러나 대단히 화려하고 자유로운 형태의 건물들. 이 딱딱한 거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몇 년 후 자유분방한 차림의 마법사들이 북적거릴 거리에는 더없이 잘 어울렸다.
‘게임에서 봤던 건물들이…….’
“무슨 공사를 이렇게 한꺼번에 한담.”
애니가 투덜거렸다. 그 말이 맞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가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토록 한 번에 뜯어고치는 일은 드물다.
이제 시작이란 말이지.
공사 기간을 생각하면 게임 오픈 직전에 건물이 완공될 것이다. 다리아가 시청 소유 부지를 얻어 낸 것이 몇 달 전이니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고 하면 시기도 얼추 맞았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쫓기는 듯 다급해졌다.
이 세계가 일개 게임판으로 전락하는 시기가 머지않았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적어도 그 전에는 돌아가야 해.’
넉넉잡아 1년을 예상했지만 귀환증으로 바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기계 자체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면 그에 소요되는 시간도 계산해야 한다. 시더 클라이번이 마음을 먹으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그를 설득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그 전에, 그를 온전히 지켜 낼 수는 있을까?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지그시 짓눌렀다. 이제 공사를 시작한 시청 광장 거리와 달리 캐틀릭 스트리트의 건물들은 벌써부터 간판을 바꿔 달고 있었다. ‘해터의 장비 상점’이 될 ‘해터의 모자 가게’와 ‘윈드밀 마법서적 전문점’이 될 ‘윈드밀 서점.’ 일전에 캐틀릭 스트리트에서는 보지 못했던 낯익은 이름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어퍼 레인에 도착해 마차로 갈아타는 내내 마치 롤러코스터라도 탄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구름이 낮게 깔린 잿빛 하늘이 마치 단꿈에서 깨어나라고 다그치는 듯했다. 지난 몇 달은 달콤하고, 편안하고, 나태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위험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으며.
에스페란사의 곁에는 시더가 없었다.
그러니 늑장 부릴 시간이 없다. 다리아의 계획은 차근차근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신년까지는 기껏해야 한 달 반. 여유 시간도 딱 그만큼이다.
마차에서 내리자 떠날 때와 같은 에이번데일 저택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한때 잡초가 발목을 찌르는 폐허였던 저택으로.
이곳이 다시 폐허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모자를 조금 들어 올린 에스페란사는 꼭 닫힌 서재 창문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움직여야지.
늦은 만큼 더욱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