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하필 오늘은 바깥의 날씨도 흐린 탓에 공작은 거대한 윤곽으로만 보였다. 어깨에 걸친 모피가 아니었다면 공작인 줄 못 알아볼 뻔했다. 에스페란사는 놀란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며 빠르게 속삭였다.
“상황이 나빠 보이니까 빠르게 말할게요. 정보를 찾고 있어요.”
“보다시피, 난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오.”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족적인 눈매가 얼핏 찡그려졌다. 고집스레 다문 턱이 소란을 일으킨 것을 책망하는 듯했다. 에스페란사는 흐린 햇빛을 등진 채 공작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었다.
“정보상은 어디로 간 거죠?”
“다리아가 알겠지. 내 손을 떠난 일이오. 제발 가시오. 침입자가 들어온 걸 알면 곤란해질 거요.”
찰나였다. 그러나 ‘제발’ 하고 말하는 공작의 음성에서 공포를 엿보았다. 에스페란사와 다리아라는 두 강력한 마법사들 사이를 오가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배짱을 보이던 공작이 무엇 때문에?
아니, 공포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깝다. 대체 무엇이 갈리스턴 공작 에드먼드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에스페란사는 본능적으로 꺼진 램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손끝에 닿은 유리가 따뜻했다. 아까까지 켜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 뭐 하는…….”
손끝에서부터 마력이 흘러나왔다. 램프가 방을 환히 밝혔다. 공작의 주먹 쥔 손가락 사이에서 검은 구슬이 툭 빠져나와 발치를 굴렀다.
검은 머리칼 아래의 뺨은 얼룩덜룩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말을 잃고 말았다. 무자비한 폭력의 흔적이었다. 갖춰 입은 옷깃 아래로 이어지는 상처를 보면 조끼 아래의 몸도 결코 멀쩡하진 않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다리아가 이랬어요?”
공작은 웃었다.
“미스 헌터, 그대는 다리아와 같은 세상에서 온 것 같지 않군.”
“……우리 세상도 넓으니까요.”
같은 부류답지 않게 순진하단 소리인 것 같은데, 그리 밉지는 않았다. 눈짓으로 답을 종용하자, 공작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놀랄 것 없소. 밑바닥에서 기던 자들이 왕족을 짓밟을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지 않소? 폐하껜 이보다 정중하니 다행스러운 일이지.”
“그걸 그냥 내버려 뒀어요?”
말하면서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다른 방법이 있었겠는가?
“견딜 만하오.”
그러나 노예의 낙인을 찍듯 새겨 놓은 폭력의 흔적은 ‘견딜 만하다’는 말로 넘어가기 어려운 일이었다. 감시자들에게는 좋은 화풀이 상대를 던져 주고, 수족인 공작을 묶어서 온 세상의 눈이 주목하는 여왕을 압박한다. 다리아의 입장에선 제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 날씨에 저렇게 좋은 모피를 걸치고 궁전에서 시중받고 사는 사람을 동정할 이유도 없겠지. 그렇지만…….
“도와달란 말은 안 하네요.”
“도와줄 거요?”
아마도. 하지만 즉각적인 도움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공동의 적을 두고 있지만 가는 길이 다르니까.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가 가진 미래의 지식이라는 이점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시더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그래서도 안 되고.
에스페란사가 대답하지 않자 공작은 거보란 듯이 웃었다.
“강력하고 위험한 힘은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내 것이 아닌 힘을 이용하려던 대가는 보다시피 이미 호되게 치르고 있지 않소?”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정말로 괜찮은 것처럼.
“대답이 충분히 됐다면, 가 보는 게 좋겠소.”
그렇게 말한 공작은 김이 오르는 찻물에 손을 적셨다. 벌겋게 달아오른 손끝이 탁자 위에 빠르게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공교롭게도 사이러스가 말해 준 곳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니까 이 양반도 비장의 수를 하나쯤은 숨겨 두고 있었단 말이군.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전한 에스페란사는 공작의 감시자가 돌아오기 전에 창문을 열었다. 손등으로 찻물을 훔친 공작이 낮게 속삭였다.
“에스페란사 양. 그대가 이 세상에 가진 호의에 묻겠소.”
호칭의 변화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헌터라는 가짜 성을 쓴 가짜 신분이 아니라, 에스페란사의 본질을 두드리는 말. 창문 손잡이를 쥔 채 고개를 돌리자, 공작이 물었다.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소?”
* * *
마법사의 펍이 위치한 배들린가는 조용했지만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후드를 조금 더 눌러쓰고 골목을 따라 걸었다. 물어물어 찾아가야 했다면 상황이 곤란했겠지만 다행히 애니가 펍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애니는 ‘아가씨가 가실 만한 곳이 아닌데…….’ 하고 입맛을 다시면서도 에스페란사의 손에 약도를 쥐여 주었다.
돌아가게 된다면, 애니에게도 뭔가 선물을 남겨 줘야지. 하녀로서도 말동무로서도 애니는 넘치도록 잘해 줬으니까.
돌아가게 된다면……. 에스페란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질문에 무슨 답을 해야 했을까?
아니지.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몸을 바쁘게 움직이면 쓸데없는 생각도 줄어들겠지. 에스페란사는 ‘마법사의 펍’의 문을 열었다.
정보상이 살기에 적당한 위치, 그럴듯한 이름의 펍이었다. 너무 노골적인 작명이라 오히려 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맥주 한 잔씩 들고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점은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이런 노동자 거리에까지 절대 보급될 일 없는 것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덩치 큰 중년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커다란 나팔관이 달린 축음기를 구경했다. 레코드에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쩡쩡 울리는 아리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족들이나 즐기는 오페라 따위 관심도 없는 노동 계급 남자들이 신나게 태엽을 돌렸다.
에스페란사는 사람들이 소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바로 향했다. 무뚝뚝한 바텐더가 에스페란사를 흘끔 바라보았다.
‘여자네?’
수염을 달고 있는 데다 체격이 커서 티가 잘 나지 않았지만 그 수염이 묘하게 어색한 탓에 오히려 눈에 띄고 말았다. 수상한 행색을 보니 이 바텐더가 정보상인 모양이다.
“사이러스의 행방을 찾고 있어.”
일단 확인을 해 볼까.
바텐더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닦던 잔을 내려놓았다.
“눈을 보여 주시오.”
눈? 별 특이한 요구가 다 있다고 생각하며 후드를 조금 젖히자, 희귀한 보랏빛 홍채가 드러났다. 바텐더의 눈이 마치 보석 감정사처럼 그 눈을 훑었다.
“진짜 눈이군.”
“그럼 가짜도 있나?”
“진짜만큼 정교한 가짜 눈? 없지. 하지만 진짜만큼 정교한 팔은 본 적 있소. 작년에 찾아온 상이군인이었는데, 덕분에 진귀한 구경 했지.”
바텐더는 일부러 사용하는 듯한 고압적인 하오체로 대꾸했다. 에스페란사는 순간적으로 ‘그거 누가 만들었는지 아느냐’ 하고 자랑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랑 같은 걸 할 계제가 아니었다. 입을 다문 에스페란사를 흘끔거린 바텐더가 고개를 까닥였다.
“주문은?”
“아무거나 줘.”
“후회할 텐데.”
바텐더는 그 말을 증명하듯 정말 딱 ‘아무거나’ 줬다. 차마 구정물보다 조금 나은 음료로 입술을 적시지 못하는 에스페란사를 비웃듯이 자기 손에 들린 잔 바닥을 가리켰다. 어쩔 수 없이 잔을 비우자, 바닥에 글씨가 나타났다. 에스페란사는 수첩에 그 글씨를 기록했다.
“하나 더. 에이번데일 백작을 찾고 있는데.”
“몰라.”
“알아내라고.”
대놓고 속 시커멓게 구는 놈도 같잖았지만 이건 또 색다르게 기분 나쁘다. 고객이 왔으면 대접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에스페란사는 손끝으로 보석 하나를 튕겨 넘겼다. 현금을 잘못 쓰다 공작에게 걸렸던 기억이 있어 아예 작전을 바꾸었다.
“이렇게 현금화하기 어려운 걸로 생색은.”
바텐더가 퉁명스레 말했다.
“다음 주 오늘 이 시간에 다시 찾아와 보든가. 있을 거라고 장담은 못 해.”
일주일이나 걸린다니. 그사이 시더 클라이번이 다치기라도 하면 자기가 책임질 건가? 에스페란사는 불만스러운 내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임은 다친 작자가 져야지.
뒤늦게 희미하게 돌아온 이성이 그렇게 말했지만, 알 게 뭐람.
문이 닫히자, 바텐더는 똑같은 수염을 가진 남자와 자리를 바꾸었다.
“에이번데일 백작이라. 그 천재라는 양반 말이지. 요즘 그 양반 찾는 사람 많군.”
짧은 중얼거림은 펍의 소음에 묻혀 버렸다.
펍에서 나온 에스페란사는 인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이러스는 나인 호더의 작은 호텔에서 묵고 있다고 했는데, 주기적으로 거처를 옮기는 모양이다.
당장 찾아갈 게 아니면 필요할 때 다시 물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길가에 멈춰 선 소형 전차가 덜커덕거리며 증기를 내뿜었다. 매운 연기가 눈에 들어갈까 후드를 푹 덮어쓴 채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골목에서 빠져나온 순간, 에스페란사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최악이다.
후드를 덮어써서 얼굴이 보이진 않겠지만 걸음걸이 따위로 정체를 파악 당한 전적이 있으니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길로 돌아서 가기에는 눈앞의 길이 유일한 대로였고, 골목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저녁 시간에 늦겠는데. 에스페란사가 모른 척 옆 골목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뭔가를 열심히 받아 적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몸을 움찔한 순간, 남자가 입을 뻐금거렸다.
“미스…… 왜 이런 거리에?”
이름을 말하려던 그가 눈치 좋게 입을 다물었다. 말한다고 이 거리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할 테고 상류층까지 소문이 돌아서 망신을 당하는 일도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렇지. 에스페란사도 여기서 펄즈베리 자작 켄드릭을 만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는 자작님은요?”
“조사차 들렀습니다. 아동 납치 사건이, 아. 아닙니다.”
괜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한 건지 켄드릭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를 바라보는 눈만은 추궁의 기색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전처럼 부담스러운 호감의 기색을 보이지 않는 그는 썩 멀쩡한 상류층 신사처럼 보였다.
“이런 거리는 숙녀분께는…….”
“위험해 보이나요?”
그 말에 에스페란사의 행색을 재빨리 살핀 켄드릭이 입을 다물었다. 후드 한 장 뒤집어쓴 것뿐인데, 묘하게 상대의 기를 누르는 것 같았다. 후드 그림자 아래의 장밋빛 입술이 대답을 재촉하듯 살짝 비틀렸다.
“예, 음,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평판에 안 좋습니다. 에이번데일은 뭘 하길래 숙녀를 이런 거리에 혼자 보낸 겁니까?”
물론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시더 클라이번이 설령 나인 호더의 저택에 있다고 하더라도 에스페란사가 할 일을 하는 데 그가 동행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리고 켄드릭의 이런 간섭은 솔직히 월권이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그 모든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지는 않았다. 어차피 말해 봐야 변하지 않을 테니까.
“없어요.”
“같이 오신 게 아니었군요. 하긴 요즘 상황이…….”
“말을 할 거면 끝까지 하시는 게 어떨까요.”
켄드릭은 멋쩍은 티를 내며 붉은 머리칼을 괜히 헤집었다. 다행히 이건 해도 되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간섭하는 건 아닙니다만. 요즘 광산과 관련해서 내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그것 때문에 바쁜 줄 알았습니다만. 아닙니까?”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엉뚱한 데서 제대로 된 단서를 건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자세한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에스페란사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켄드릭이 한숨과 함께 양손에 고개를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