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어설픈 웃음으로 답하는 에스페란사를 달래듯 럭스 부인은 좀 더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님 걱정은 마셔요. 밀런도 같이 갔으니 위험한 일은 아니겠죠. 그리고 그분이야 남들 위험한 곳에서도 귀신같이 살아 돌아올 분이시니.”
“그럴까요?”
“그럼요!”
멧돼지 정도의 위험이었다면 그랬겠지. 평범한 암살자라도 그럭저럭 안심할 수 있었다. 시더가 늘 몸에 지니고 있는 회중시계나 지팡이에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장치들이 있었고 밀런도 한 사람 몫을 하는 사수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시더를 노리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다. 에스페란사는 럭스 부인의 편안한 웃음을 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아무렴 백작님이 걱정이겠어요? 아가씨가 더 걱정이죠. 애니 저 애를 좀 보세요. 오늘 아침에도 아가씨 걱정된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럭스 부인이 가리킨 곳은 창문 너머의 정원이었다. 애니는 친구인 매들린과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밌는지 종알종알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내용이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낯빛만 봐도 에이번데일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어머나.”
걱정이 한가득이라고 보란 듯이 말했던 럭스 부인이 민망한 듯 뺨을 붉혔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들뜬 애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다른 친구들이 다가와서 애니와 무언가 이야기를 하며 짐을 나눠 들고 갔다. 사실상 시녀 일을 하는 애니는 남는 시간에 친구들의 잡일을 도와줄 이유가 없는데도 선뜻 무거운 짐을 나눠 들며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애니가, 에이번데일에는 친구가 없었거든요.”
“그야 그동안 나인 호더 저택에서만 일을 했으니까요. 보통 하녀들은 다 그렇지요. 에이번데일 쪽 하녀들도 나인 호더로 올라오는 법이 없답니다.”
그러니 애니가 에스페란사를 따라 에이번데일로 갔던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심지어 에스페란사도 애니를 신경 써 주지 못했다.
오늘의 할 일을 정했다. 언제까지 집 안에만 있을 수도 없으니까.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 들어온 애니가 에스페란사를 발견하고 이마를 소매로 훔쳤다.
“애니, 나랑 오늘 나갈 데가 있어.”
“네? 지금요?”
“응, 지금.”
“어디로 가는데요?”
어디냐면, 애니가 마치 꿈의 궁전처럼 말했던 곳.
“마이튼 홀.”
애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요? 절 데려가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외출복 입어. 아니지, 내 옷 입을래?”
“네에?”
애니는 그것만은 극구 사양했다. 단지 부담스러워서만은 아니었다. 애니는 친구들과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잡일 하녀와 시녀로 일이 갈린 후에도 친구들과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 격차를 시각적으로 확인시키는 것은 절대 애니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비록 애니는 에스페란사에게 이런 속사정을 전부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나가는 친구들을 흘끔거리는 것만으로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네가 가진 제일 좋은 옷으로 입고 나와.”
애니가 친구들에게 나눠 줄 선물도 하나씩 마련해 줘야겠다.
증기 마차가 느릿느릿 어퍼 레인을 가로질렀다. 마차 문이 닫히자 애니는 신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잠시 후, 마부 테일러가 증기 마차를 마이튼 홀 앞에 세웠다.
“테일러 씨, 그럼 세 시까지 부탁해요!”
애니가 마부를 떠나보내는 사이 에스페란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게들을 살폈다. 상류층 아가씨들이 입는 옷가게는 부담스럽겠지만 그렇다고 애니의 형편에 맞는 옷을 사 주려고 부른 건 아니었다.
“애니. 지금부터 내가 너한테 옷을 사 줄 건데, 네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기를 죽이고 싶을 때 입을 옷이라고 생각하고 골라 봐.”
“네? 저요? 제 옷을 사는 거예요?”
“아니면 왜 널 데리고 왔겠어.”
“당연히 아가씨 옷 고르시는 일을 도우려고 온 거죠!”
“내 옷은 필요 없어.”
이미 에이번데일에서 많이 맞췄고, 다음 겨울까지는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잠깐만…….
‘돌아갈 수 있겠지?’
오히려 아무것도 몰랐던 예전에는 어렴풋이 확신할 수 있었는데 아는 게 많아질수록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에스페란사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애니는 재빨리 에스페란사의 팔을 붙잡고 이끌었다.
“그럼 이쪽이에요.”
마이튼 홀은 상류층을 위한 고급 상점가였으므로 질 좋은 외출복을 구하기 쉬웠다. 그리고 의외로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가격이 조금 낮은 기성품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신사 숙녀가 다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런 가게에서는 눈을 빛내며 옷을 고르는 어린 무용수들이나 오페라 가수들도 볼 수 있었다.
애니는 그런 가게를 찾아 들어가 계절별로 적당한 옷을 골라 왔다. 소재가 좋고 직조가 탄탄하지만 유행과 날씨를 타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옷만 귀신같이 찾아내는 솜씨가 발군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어느 부인은 애니를 붙잡고 자기 딸 옷을 좀 골라 주면 안 되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애니는 눈대중으로 적당한 옷을 두어 벌 골라 주고 나왔다.
“대단한데?”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애니가 눈을 찡긋거렸다.
“가난한 집 둘째 딸은 이런 솜씨라도 없으면 평생 남이 입던 옷만 물려 입어야 한답니다.”
“그렇게 가난한 집은 아니잖아.”
“부모님이 엄하셔서요. 여자애가 예쁜 옷을 탐하면 타락한다고 생각하시죠.”
애니는 그래서 예쁜 옷에 더 집착하게 된 것도 있다고 말했다. 금욕적인 까만 옷을 두르고 회초리를 휘두르는 어머니와 그 뒤에서 혀를 차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에스페란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답은 나왔지. 남이 하지 말라는 것보다 재밌는 일이 얼마나 있다고.
“모자랑 구두도 사자.”
“정말요?”
“응. 내 기분 전환이야.”
가진 돈은 많은데 쓸 곳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저번처럼 미래 지폐를 함부로 남발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 나라엔 머리 좋은 사람이 많았다. 저번엔 공작한테 걸렸으니 망정이지 그걸 찾아낸 게 템프턴 수상이었으면 두 배로 곤란해졌을 것이다.
그럼 이 돈은 어디서 났느냐.
뭐, 게임 몇 년 하다 보면 환금성 좋은 보석들도 몇 개 쟁여 놓는 법이다. 돈으로 절대 못 바꾸는 보석도 몇 개 있지만.
뭘 살지에 대한 고민은 애니에게 맡긴 채 에스페란사는 거침없이 지갑을 열었다. 쌓인 짐은 거침없이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매들린을 비롯한 애니의 친구들을 위한 리본과 모자, 애니의 새 구두를 산 두 사람은 홀 끝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다.
“여긴 겨울인데도 사람이 많네요.”
북적이는 줄 바깥으로 빠져나온 애니가 혀를 내둘렀다. 에스페란사는 벤치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아이스크림은 원래 겨울 간식이고…….”
여기까지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나온 사람들의 방은 겨울에도 따뜻할 테니까.
에스페란사는 그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얄팍하더라도 이 풍요를 그냥 누리고 싶었다.
이 가게의 아이스크림에는 좋은 기억이 있다.
혀끝에서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는 차가운 맛과 줄 선 귀부인들과 소년 소녀들. 유리 천장 위에서 오색으로 부서지는 햇살. 북적거리는 마이튼 홀의 풍경.
모자 그늘 아래로 보이는 미소. 규칙적인 지팡이 소리. 사각거리는 여름 드레스와 품에 안은 못생긴 인형. 툭툭 던지는 말장난엔 친애의 감정이 담겨 있었고 보폭을 맞춰 걷는 걸음은 느릿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걸 맞춰 볼게요.’
은근한 목소리가 에스페란사를 이 가게로 이끌었다. 입 안에 넣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짧은 즐거움.
이 세계에서의 모든 기억들도 입 안에 넣은 아이스크림 한 스푼처럼 녹아 버릴까? 언젠간 그런 일도 있었던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까?
시더도 그럴까?
마지막 남은 한 스푼이 다 녹아서 물이 될 때까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스푼 위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단물은 아무런 가치도 없어 보였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새삼 숨이 막혔다. 그런 결말. 고작 그런 걸 위해서 달려 나가고 있는 건가?
눈앞이 얼핏 흐려졌다. 에스페란사는 화들짝 놀라 소매로 눈가를 빠르게 훔쳤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
마이튼 홀로 온 건 잘못된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아니지. 다른 어디였더라도, 결론은 같았을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냈다.
그래, 차라리 그런 결말이면 다행이지. 돌아가기도 전에 시더가 죽어 버리는 결말보다는 낫지.
그렇게 생각하며 웃자, 애니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아가씨, 음…….”
뭐라 말하려던 애니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 와 에스페란사의 눈치를 본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외출복 차림의 어린 숙녀들이 다가온 탓이었다. 애니는 에스페란사의 귀에 속삭였다.
“저 옆 가게에서 과자를 좀 사 올게요.”
말은 그렇게 해도 하녀와 어울리고 있는 것이 트집 잡힐까 피해 준 것이 분명했다.
‘그런 건 전혀 상관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애니는 과자 가게로 들어가 버렸으므로, 에스페란사는 그냥 오랜만에 본 두 숙녀와 인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세상에, 소식도 없이 나인 호더로 올라왔네요?”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에스페란사도 이 두 숙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쾌활한 쪽이 루신다 맥스웰, 조금 더 얌전한 쪽이 실비아 험프리였다. 실비아 쪽은 과거로 오기 전에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으니, 하필 이 두 사람을 만나게 된 게 다행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에요.”
“반가워요!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시즌도 끝났는데 이런 때에 나인 호더로 왔을 줄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로드 에이번데일 같은 분은 한번 움직이면 기사가 나기 마련이니까요.”
찾고 있는 인물의 이름이 나오자 에스페란사는 반사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대체 어느 신문에 기사가 났길래 아직도 행방을 못 찾고 있는 건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인 호더에 온 건 나 혼자예요. 로드 에이번데일은 일이 있어서.”
“어머, 그랬군요. 심심하지 않았어요? 연락을 하지 그랬어요!”
“경황이 없어서요.”
성의 없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소소한 신변잡기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들 사이에 대단한 친분은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이런 말을 끝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그렇다 치고, 코델리아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건가요? 정말 반가워할 텐데 말이에요.”
미안하게도, 에스페란사는 그제야 코델리아가 나인 호더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코델리아에게 잭을 맡겨 놓았다는 사실도.
사고의 폭이 얼마나 좁아졌는지, 스스로가 얼마나 궁지에 몰린 상태인지 깨달아 버렸다.
과자 세트를 한 아름 안고 달려오던 애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스페란사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입가가 일그러졌다.
“이만 돌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