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58
158화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치맛자락이 복사뼈를 바쁘게 스쳤다. 손에 들린 종이가 구겨졌다. 찻잔과 티팟이 든 트레이를 끌고 가던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에스페란사는 개의치 않고 휙 스쳐 지나갔다. 잔 받침 위의 찻잔이 바르르 떨렸다.
“무슨 일이야?”
“안녕하십니까, 에스페란사 님.”
소파에서 커다란 몸을 일으킨 사이러스가 말했다. 에스페란사는 성큼성큼 걸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하녀들이 눈치를 보다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기껏 준비해 온 하녀들에게 심술을 부릴 필요는 없지. 무표정으로 들어온 하녀들은 기계처럼 찻잔과 티팟을 내려놓았다. 달콤한 차향이 응접실을 메웠다.
“문을 한 뼘만 열어 놓고 나갈래?”
“네, 아가씨.”
매들린은 평소보다도 유독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다른 하녀들을 이끌고 나갔다.
“열어 둘 필요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사이러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투였다. 에스페란사는 신경 쓰지 않고 손에 걸리는 쿠션을 무릎 위에 올려 두며 물었다.
“그래서, 왜 왔는데?”
“정보상에게 제 행방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확인하느라 물어본 거야. 거긴 다른 것 때문에 갔고.”
“……그러셨군요. 저는 지금 거처를 옮긴 상태입니다.”
“필요할 때 다시 정보상한테 물어볼게.”
초침 소리가 침묵을 메웠다. 시간이 유독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왔으니까, 이왕 온 김에 확인이나 해 보자. 다리아나 과거의 네가 요즘 벌이고 있는 일 말이야.”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이 시기에 저희는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파오룬 해적들을 동원해서 상선을 막은 것.”
사이러스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이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런 건 사이러스의 입장에서 그다지 문제도 아닌 것이다. 파오룬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이용해서, 단지 이용만 해서 오스던 내의 권력을 잡는 일, 그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한 나라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행위와 같은 것들. 에스페란사는 가만히 그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 결론이 어떻게 돼? 지금 시더가 던바틴에 있잖아. 엮일 가능성은…….”
“예?”
“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물으면서도 왠지 에스페란사는 답을 알 것만 같았다. 파이프 밖으로 나오는 시커먼 연기처럼 엉겨서 형체 없는 답. 사이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스페란사 님. 과거 이 시기에 에이번데일은 자기 영지에 있었습니다. 던바틴에 방문한 적은 없습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백작의 행방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던바틴에 있었다면 저희가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너희가 벌인 일 때문에 간 걸 텐데. 마정석 국유화 문제 때문에…….”
에스페란사가 아니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 때문이구나. 입술을 잘근거리던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이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돼?”
“저희도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걸 바라진 않았습니다. 적당히 압박해서 내각의 반대 세력을 늘리다가, 해적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 원만한 해결은 아니겠지만요. 템프턴은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이런 일에 군부 책임자도 아닌 내각 수상이 책임을 질 정도의 일이 뭐가 있지?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제대로 말해. 무슨 일이야?”
“문을 닫아 주십시오.”
에스페란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등으로 눌러 닫았다. 사이러스가 입을 열었다.
“다리아의 도움을 받은 해적들 사이에선 이 기회에 오스던의 배를 탈취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겁니다. 군함이어도 괜찮고, 상선도 나쁘지 않지요. 인질을 잡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합병 조약이 무효화되지는 않겠지만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때에.”
잠깐만. 에스페란사는 눈을 크게 떴다.
“전부 죽이는 거야?”
“해상에 던전을 열 겁니다.”
“미쳤어!”
사이러스는 변명하지 않았다. 미친 계획이다. 정말로 자기 이익 외에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예. 미친 계획입니다. 하지만 그게 결론이었습니다.”
“왜 일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너무하지 않아?”
“바다에는 증거가 남지 않으니까요. 아직은 던전의 존재를 공개할 때가 아닙니다.”
“하지만 해상을 봉쇄했잖아.”
그런데 무슨 배가 뜬다고?
“그런 건 문제되지 않습니다. 에스페란사 님, 당장은 봉쇄했지만 몇 번 져 주고 물러나면 되는 일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에스페란사는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시더는? 시더가 그 배에 탈 가능성은?”
“모릅니다. 제가 알던 과거가 바뀌었으니까요.”
그건 전부 에스페란사의 잘못이다. 과거를 과거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눈앞에 사람이 있으면 구했고,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찾았다. 사람들에게 에스페란사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상황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다. 모든 것이 진짜라는 사실이 확실해진 지금,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시더의 안전을 확언할 수 없다는 것만은 뼈아팠다.
“……어떤 배였어? 옛날에 인질로 잡혔던 배 말이야.”
“군함이었습니다.”
에스페란사는 내심 안심했다. 민간인들이 탄 배가 붙잡히는 것보다는 낫다. 그리고 군함이라면 시더가 탈 가능성도 훨씬 적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좌시할 순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 때문이야.’
이런저런 이유를 붙였지만 결국 시더는 에스페란사를 피하기 위해서 던바틴으로 떠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영지에서 평화롭게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을 시더가 새로운 위험에 처한 건 에스페란사 때문이다.
그러니 거부당할 게 아무리 두려워도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멈춰 서지 않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게 기쁘기까지 했다. 에스페란사는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결심이 섰다.
“던바틴으로 가야겠어.”
사이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페란사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계획이란 게 정말 부질없다. 바로 방금 전에 던바틴으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그 결심은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뀌었다.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지. 대원칙은 바뀌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사이러스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에스페란사 님. 혹시라도 다리아와 다시 만나게 되면, 전면전은 피하십시오.”
다리아와의 전면전이라. 게임을 만들고, 그들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원흉이자 과거에 시더를 죽인 인물, 황금 발톱의 소유자.
적. 그러나 이길 수 있는 적이다.
“왜?”
“다리아는 이 세계에서 자신이 위협당하는 걸 견디지 못할 겁니다.”
“우린 이미 한 번 싸운 적이 있어. 잠깐이었지만.”
“먼저 공격하신 게 아니었겠지요. 다리아를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지 마십시오. 그건 상황을 너무 크게 바꾸고 말 겁니다. 다리아가 생각할 수 있게 두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괜히 도발했다가 상황을 너무 크게 바꿔서 과거의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으로 끌고 가지 말라는 말이다.
에스페란사가 더 강한 건 맞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 약점도 더 많다.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부분은 사이러스가 가진 과거에 대한 기억이다. 과거에 없던 그들을 다리아가 의식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던전을 처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될 텐데?”
“이 시기의 다리아는 던전이 해결될 때까지 지켜보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겁니다. 저희의 존재는 그 세상에 영향을 미치진 못할 테니까요. 신년 전까지 마주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스페란사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시 다리아가 현실의 일을 포기하고 이쪽에 집중할 가능성은 없어?”
사이러스는 단호했다.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온기를 머금었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구태여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예민한 문제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사이러스는 행여나 에스페란사가 캐물을까 봐 신경 쓰였는지 그 이후로는 입을 다물더니 서둘러서 돌아갔다. 에스페란사는 응접실에 그대로 앉아서 잠깐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정보의 편린들이 떠다니다가 곧 차분히 가라앉았다. 오래 고민할 일은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만에 하나라도 시더가 다리아의 계획에 휩쓸릴 수도 있다는 점이니까.
던바틴으로 가서, 시더를 찾는 것까지. 지금은 그것 말고는 생각하지 말자.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접실 문을 열었다. 바깥에 멍하니 서 있던 애니가 화들짝 놀랐다.
“애니, 미안한데 짐을 좀…… 왜 그래?”
애니는 묘한 얼굴로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다가, 멍한 눈으로 물었다.
“아가씨, 조금 전에 떠나신 그 신사분은 전에 에이번데일에서 뵀던 그분이죠?”
“응? 아, 맞아. 사이러스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애니는 입술을 앙다문 채 망설였다. 고용인으로서 주인의 손님에 대해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 손님이 특별히 뭔가를 한 게 아닐 때는 더더욱.
그걸 알면서도 말하려고 하는 건 이유가 있겠지. 에스페란사는 짐짓 가볍게 웃으며 애니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나도 쟤 별로 안 좋아해.”
애니는 조금 안도한 얼굴로 에스페란사의 등 너머를 흘끔거렸다.
“아까 그 신사분과 마주쳤는데, 그분의 표정이, 제가 과민 반응한 건지도 모르지만요…… 사람을 보는 얼굴이 아니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애니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재빨리 덧붙였다.
“원래 신사 숙녀분들은 저희 같은 하녀를 의식하시지는 않지만요. 그런 느낌이 아니라 그분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보다는 동물이나 물건 같은 걸 보는 것처럼, 왠지 위험한 기분이…… 아니에요.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아요.”
애니는 말끝을 얼버무렸지만 왠지 모르게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사이러스의 무심하다 못해 잔인한 태도. 과거에 저지른 무자비한 학살을 이야기 할 때도, 심지어 눈앞에 있는 상대의 죽음을 말할 때조차 일말의 배려가 없었다. 지난 7년간 게임할 때의 사이러스는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없기는 해도 그렇게 잔혹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변한 걸까? 아니면, 배려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건가? 왜?
에스페란사가 생각에 빠지자 괜히 안절부절못하던 애니가 보란 듯이 과장되게 ‘아!’ 하고 외쳤다.
“맞다, 아까 뭘 하라고 하셨죠?”
뻔히 말 돌리는 걸 알았지만 그냥 어울려 주기로 했다.
“짐 싸는 걸 도와달라고. 던바틴으로 갈 거야. 그리고 그 문제는 내가―”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보다 던바틴이라니, 왜요?”
“어느 백작님을 찾으러 가려고.”
“예? 어, 그럼 이 초대장은 어쩌죠? 집사님이 가져다드리라고 하셨는데.”
초대장이라고?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에스페란사가 애니의 손에서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봉투 겉면에 유려한 글씨로 적힌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코델리아 마벨우드.
은근히 성격이 급한 티를 내듯이 초대장에 쓰인 날짜는 바로 내일이었다. 오히려 빨라서 다행이었다. 이 정도라면 일정에 크게 지장이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던바틴이라니, 내 겨울옷이 어디 있더라. 아마 부족할 것 같은데.”
애니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날짜를 가늠해 보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돌렸다.
“겨울옷이 왜? 애니, 너도 가려고?”
“절 빼놓고 가실 생각이셨어요?”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던 에스페란사가 눈을 굴렸다. 애니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혼자 가시면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던바틴은 초행이면 힘들 거예요. 거긴 길도 복잡하고, 사투리도 심하고, 아무튼 힘들걸요!”
“위험한 일 하러 가는 거야.”
“위험한 일 하기 전까지만 데리고 계시면 되죠! 어차피 진짜 위험할 땐 지금까지처럼 창문으로 슝 빠져나가실 거잖아요?”
경험에 의거하여 도출한 논리정연한 결론이었다. 쟤는 같이 던전에 엮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왜 저렇게 잘 알지? 말문이 막힌 에스페란사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애니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