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어퍼 레인에서도 손꼽히게 부유하고 아름다운 저택. 가장 화려하고 이국적인 품종의 장미 덤불이 벽돌담을 둘러쌌다. 비록 겨울이라 꽃이 만발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눈이 쌓인 정원도 충분히 운치가 있었다.
정원을 가로지른 증기 마차가 현관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부드러운 털이 달린 모자를 쓴 에스페란사가 마차에서 내렸다.
코델리아 마벨우드가 빙그레 웃으며 팔을 벌렸다.
“나인 호더에 있으면서 내게 편지 한 장 보내지 않다니, 정말 무심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터져 나온 불만과 달리 에스페란사를 껴안는 손길은 따뜻했다. 에스페란사도 웃으며 코델리아를 마주 안았다.
“오랜만이에요.”
“네! 엄청요! 그러니까 할 말이 아주 많아요. 자, 들어가요. 반가운 얼굴도 만나 봐야죠. 엘렌! 잭은 어디 있니?”
지나가던 하녀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수업받는 중이에요.”
“그럼 끝나고 내 응접실로 데려와 줘.”
“수업?”
“가정 교사를 붙여 줬단 얘기 했잖아요. 애가 생각보다 영리하더라고요. 원한다면 학교에도 보내 줄까 해요. 이런 말을 본인한테 하면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지만요.”
에스페란사의 팔을 끌고 자기의 전용 응접실로 데려가는 동안 코델리아는 잭이 그간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조잘거렸다. 따라가지 못하는 공부를 밤새도록 하다가 코피가 나서 쓰러진 이야기까지 해 주었다. 처음에는 잭을 내심 못마땅해하던 마벨우드 남작도 잭이 쓰러진 이후에는 은근히 챙기고 있다고 말할 적엔 다 들으란 듯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코델리아! 숙녀의 웃음치고는 방정맞기 그지없구나.”
“할머님!”
마벨우드에서 본 웰즐리 부인과 똑같이 엄격한 얼굴을 한 마벨우드 남작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미스 헌터, 인사가 늦었군.”
에스페란사가 무릎을 굽히자, 마벨우드 남작은 손을 붙잡아 만류했다.
“은인에게 인사를 받을 수는 없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시오. 도울 수 있는 최대한으로 돕겠소.”
잭을 맡아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갚은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마벨우드 남작은 강경했다. 코델리아가 옆에서 눈치를 줘서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고 말했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남작은 두 사람이 회포를 풀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할머님은 보시다시피 고집이 있으셔서요. 웬만해선 그냥 들어드리는 게 나아요.”
눈을 찡긋거린 코델리아가 아기자기하게 꾸민 응접실로 에스페란사를 안내했다.
에이번데일 저택의 정석적인 응접실과 달리 코델리아의 개인 응접실은 하늘색과 초록색으로 밝게 꾸며져 있어 산뜻했다.
“어떻게 이렇게 비밀스럽게 온 거예요? 로드 에이번데일이 나인 호더에 왔으면 소문이 안 날 리가 없는데. 사교계 사람들이 소식에 얼마나 민감한데요!”
“시더는 안 왔어요.”
“안 왔다고요? 그럼 당신만 따로 온 거예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늘이 드리운 에스페란사의 눈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코델리아가 손뼉을 쳤다. 알겠다!
“싸웠군요?”
얼굴에 써 있기라도 한 건지, 다들 귀신이다.
“……비슷해요.”
거보란 듯이 코끝을 세운 코델리아는 분명 그 백작님 잘못일 거라고 꿍얼거렸다. 사실은 정확히 그 반대인데.
“내 생각에, 로드 에이번데일이 에스페란사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콧등을 찡그린 코델리아가 짐짓 심술궂은 목소리를 냈다. 에스페란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웃었다.
“꼭 그렇지도 않아요.”
“아닐걸요. 흥, 그 심술궂은 백작께서 당신한테만 태도를 바꾸는 꼴을 봤어야 했는데. 난 마벨우드에 있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요.”
에스페란사는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마벨우드에서의 일을 돌이켜 보았다. 언제부터였냐고 물어본 적은 없었다. 낯간지럽기도 하고, 늘 끝을 앞두고 있는 그들에게 시작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물어볼 걸 그랬나?
쓴웃음이 배어났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상황이 막 시작한 연인들의 귀여운 투닥거림 정도가 아니었단 사실을 깨달은 코델리아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난 요즘 바빴어요. 세상에, 시즌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웬 장교에, 은행가에……. 시즌 전에 얼굴만 보라는데 얼굴부터 싫은 걸 어떡하냔 말이죠.”
탁자에 놓인 쿠키를 이로 베어 문 코델리아는 투덜거리며 지금까지 만난 신사들의 신상 명세를 읊었다.
유명한 사업가도 있었고, 부유한 은행가, 훈장을 주렁주렁 단 장교……. 그러나 대부분은 고매한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어쨌든 코델리아 마벨우드의 이름값이 있으니 만나는 사람도 범상치 않았다.
“난 좀 성실한 사람을 원해요. 마벨우드에 도움이 될 사람이면 좋고, 내게 충실할 사람이면 더 좋고요.”
“코델리아, 결혼하기에는 좀 어리지 않아요?”
스물둘 정도면 결혼하기에 적당한 나이라고 하겠으나 열여덟은 사교계에서도 어린 감이 있었다. 그러니 던바틴 공작이 열예닐곱 살의 코델리아를 약혼으로 냉큼 묶어 뒀던 꼴은 또 얼마나 성급했는지.
“그렇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을 구하려면 부지런하게 다녀야 하니까요. 할머님 말씀은 이해해요. 에스페란사, 모두가 당신처럼 우연히 가까이 있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는 않아요.”
이 만남을 위해서 에스페란사는 세계와 시간을 거슬러야 했다. 그러니 그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코델리아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곱씹으며 찻잔을 비운 에스페란사가 물었다.
“호감이 가는 사람은 있어요?”
“전혀요! 다들 어찌나 자기 자랑에 열심이신지. 정말이지, 자기 장점을 늘어놓으면 내가 대단하다고 박수라도 쳐 줄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말 안 해도 알아본단 말이에요.”
동조를 원하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으나, 에스페란사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자랑’ 하면 시더 클라이번도 빼놓을 수가 없었다. 이룬 것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편이었으나, 횟수로만 따지면 만만치 않았다. 저 코델리아도 시더 클라이번이라면 학을 떼겠지.
“어쨌든, 당신이 와 줘서 정말 다행이에요. 당신과 놀러 나간다고 하면 할머님도 저를 한량 장교들 따위와의 만남에 밀어 넣진 못하시겠죠. 아무렴, 마벨우드의 은인이신데요.”
“음, 그게 말이죠. 난 곧 떠날 거라서요.”
“네? 어디로요? 설마 로드 에이번데일이 밉게 굴었다고 파오룬으로 가 버리는 건 아니죠?”
코델리아가 다급히 에스페란사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럴 거라면 차라리 에이번데일 저택에서 나와서 우리 집으로 들어와요. 내 옆방을 비워 줄게요. 네?”
“그런 거 아니에요! 파오룬으로 가는 게 아니라. 사실, 던바틴으로 가요.”
목적지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휘둥그레 눈을 뜬 코델리아가 던바틴, 하고 되뇌었다. 알라스테어 렌프루와의 협업을 통해 파혼으로 인한 악감정은 어느 정도 털어 냈겠지만 코델리아에게는 여전히 달갑지 않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던바틴 어디요?”
코델리아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모르겠어요. 후보지는 몇 군데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고요? 내가 제대로 듣고 있는 게 맞나요?”
한숨을 터뜨린 에스페란사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더가 던바틴에 있어요. 광산 문제라고 하더군요.”
“정치 얘기네요. 할머님께 들었어요.”
마벨우드 남작의 정치적 입장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코델리아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코델리아는 빙그레 웃었다.
“로드 에이번데일을 만나러 가는 건가요?”
“일단은 그렇죠.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연락을 하고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섣부른 질문을 내어놓고는 어깨를 슬쩍 움츠린 코델리아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연락을 받아 줄 거라면 처음부터 목적지를 숨기지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싸웠으니까요. 내가 잘못한 거예요.”
그 잘못 때문에 떠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진작에 떠났겠지. 어쩌면 에스페란사의 잘못은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쏟아진 비밀이 그를 궁지로 몰기 전까지는.
정확히 어떤 이유로 떠나기로 결심했든 그날 밤,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적시던 눈물이 계기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피할 때가 아니어서요. 좀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찾아볼 생각이에요.”
시더 클라이번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던전뿐이라면, 던전만 방어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던바틴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을 다리아가 시더를 이르게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건 곤란하다.
“그래서 도움이 못 되겠네요. 미안해요.”
“미안할 것 없어요, 에스페란사. 나도 같이 갈 거니까요.”
“네?”
“내 생각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코델리아는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빠르게 한 줄을 적어 내렸다.
“전보로 보낼 거예요.”
내용은 이러했다.
고민하던 코델리아가 이틀 후의 날짜를 적어 넣었다. 한 번 펜을 다시 잡으니 구구절절한 추신까지 덧붙여졌다. 비용이 상당할 텐데도 글자 수에 구애받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데 교류가 없던 상대에게 느닷없이 보내는 전보를 저렇게 길게 쓸 이유가 있나?
“이쯤이면 여유롭겠지요?”
“로드 스털링과 연락을 했었어요?”
“사감을 빼놓고 보면 인맥으로 훌륭하고 사람으로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가끔 편지를 주고받는 정도예요.”
그런 것치고는 친밀감이 상당해 보였다. 코델리아는 종이를 휘휘 흔들더니 아예 하녀를 불러 전보를 부쳐 버렸다. 에스페란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당해 버리고 말았다. 코델리아는 혀를 쏙 빼며 말했다.
“이제 날 안 데려가는 법은 없는 거예요.”
“난 위험한 일 하러 가는 거예요.”
“그럴 것 같았어요. 위험한 일에는 안 데려가면 되잖아요? 난 할머님을 피해 관광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일 거예요. 당신은 로드 스털링의 정보력으로 로드 에이번데일을 찾으면 되고요. 던바틴에서 사람을 찾는데 던바틴 공작의 외아들만큼 적합한 인물을 생각해 낼 수 있겠어요?”
기껏해 봐야 정보상을 찾아볼 생각이었던 에스페란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코델리아는 거보란 듯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봐요. 난 도움이 되잖아요.”
부정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