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6
16화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외출했다더니 금방 왔네요.”
“네. 물어볼 건?”
“해결됐어요.”
에스페란사는 책상 위에 놓인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더는 한숨을 쉬며 크라바트를 끌렀다.
“파오란 피울 건데, 계속 있을래요?”
그로서는 드물게 한 배려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연기를 뿜어 내쫓았을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책이 이렇게 많은 데서 파오란을?’
연구 목적이지 책을 딱히 아끼는 것은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피우고 환기하시면 다시 올게요.”
문이 닫혔다. 궐련에 불을 붙이자 알싸한 연기 냄새가 났다. 귀찮은 늙은이에게 시달렸던 머리가 조금 개었다.
“아, 가죽.”
물어볼 것도 해결됐으면서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겠다.
정말이지, 이래서 의회가 싫다. 이놈의 백작 작위에 줄줄이 따라오는 의무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가죽 얘기도 끝내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 나온 김에 그는 서랍에서 그 가죽을 꺼내 펼쳤다. 스티뮬러로 다시 확인해 보니 역시, 다른 가죽에 비해 월등히 투과율이 높다. 상점에서도 느꼈지만 이런 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었다니, 보호종인가?
아니지.
파오란 연기를 다시 한 번 들이켠 시더가 생각했다.
“……몬스터?”
몬스터 도감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는 궐련을 든 채로, 서재 밖으로 달려 나왔다.
“에스페란사!”
나간 지 5분도 안 돼서 다시 불려 들어온 에스페란사는 뚱하니 자리에 앉았다.
“이게 뭔지 알고 있었어요?”
“그럼, 모르고 사라고 했을까요.”
티타임 전에 슬쩍 주방장에게 가서 티 푸드 메뉴에 영향력을 행사할 예정이었는데, 매캐한 연기가 나는 서재에 끌려왔다. 자연히 툴툴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환기하고 부르라니까…….”
“아, 미안해요.”
시더는 군말 없이 파오란을 끄고 창문도 열었다. 그리고 에스페란사는 매캐한 파오란 연기가 가득한 서재 대신 안쪽의 연구실로 들어가야 했다.
“몬스터 부산물이라는 건 다 이런 식인가요? 일반적인 재료와는 달리 마력 투과율도 높고.”
“투과율만 높은 건 아니고, 이런저런 부가 속성이 달려있는데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죠? 그건 트롤 가죽 같은데, 방어구 같은 데 많이 써요.”
등급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처치 난이도에 비해 능력치가 좋아서 많이 선호된다.
물론 시더가 저번에 한 것처럼 마정석에 헌터의 피를 조합해서 다 뚫어 버릴 수도 있겠으나, 그건 일부 공격 무기에만 쓸 수 있는 치트키 같은 것이다. 당연하게도 일단 돈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지만 그런 방법은 방어 장비에는 사용이 어렵다. 특히 액체류를 흘려 넣을 수 없고 무거울수록 디버프가 들어가는 의류에는 피도 마정석도 쓸 수 없다.
요는, 결국 몬스터 부산물은 다양하게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보통 어떻게 가공하는데요?”
“그건…….”
에스페란사는 기대 어린 남자의 눈을 슬쩍 외면했다.
“저도 모르죠. 전 구매만 했으니까.”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럼 하나하나 실험해 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이것저것 다 해 보기엔 양이 좀 부족한데.”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눈이 번뜩인다. 던전만 있었으면 에스페란사를 뺑이 돌려 아이템 수급 노예로 쓸 그런 눈이다.
“없는 걸 어떻게 구해요?”
“그러네요. 유감이에요.”
던전이나 몬스터가 있었으면 어떻게 나왔을지 뻔한 말투였다. 에스페란사는 발을 슬쩍 밀어 학구열로 번뜩이는 눈에서 벗어났다.
“아무튼, 갑자기 트롤 가죽 같은 게 나타났다는 건 이상한 일이에요. 분명 황금 발톱과 관련이 있을 거예요.”
“그렇겠죠.”
황금 발톱이나 에스페란사의 귀환 문제보다는 콩고물에만 관심 있는 남자가 길쭉한 몸을 비스듬히 누이며 대꾸했다. 그 성의 없는 대꾸에 에스페란사는 눈을 세모꼴로 떴다. 자기 일 아니라고!
“이건 중요한 일이에요, 로드 에이번데일. 트롤 가죽이 나타났다는 건…….”
그쯤 해서 시더 역시 얼굴을 굳혔다. 에스페란사는 누가 들을까 두렵다는 듯 속삭였다.
“저처럼 시간을 거슬러 온 헌터가 있어서 가죽을 팔았거나, 아니면.”
“지금 던전이 있거나.”
남자가 받아 말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시원시원했다.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겠네요. 가게 주인 말로는 그날 팔던 가죽은 전부 원래 거래하던 사냥꾼의 친척이 가지고 온 물건들이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노예 엔딩인가?’
시더의 눈빛이 있지도 않은 몬스터 부산물을 셈하듯 빛을 냈다. 던전이 눈앞에 있었다면 아이템을 가져올 때까지 에스페란사를 내쫓았을 것 같다.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자, 방 안이 고요해졌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계기판 소리만이 두방망이질치는 심장 소리를 가려 준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샅샅이 훑듯이 지나갔다. 흉포한 침묵에 쫓기듯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요.”
“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 좋을 일만 일어나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냐는 생각 반. 프롤로그부터 설정이 붕괴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 반. 그렇게 나온 결론이었다.
분명히 프롤로그에서는 메모리얼 파크 사건이라고도 명명되는 그 ‘몬스터 사태’가 첫 던전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알고 보니 그 전에도 던전이 있긴 했답니다’라는 결론이라니?
“‘몬스터 사태’가 첫 던전이라고 그랬다고요!”
“알려지지 않은 거겠죠.”
시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사실 그게 합리적인 추측이다. 그것이 역사가들의 판단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에스페란사가 알고 있는 것은 게임 개발사가 내놓은 설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어차피 게임의 시작은 몬스터 사태 5년 후고, 그 시점에서 이미 몬스터 사태가 첫 던전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도 않다. 누가 알아볼 것도 아니다. 알아냈다 해도 달라질 것도 없다. 그러니까…….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차라리, 모종의 이유로 과거가 변화했다는 가설이 더 믿을 만하다. 그리고 과거가 변할 만한 요인이라면, 일단 에스페란사 본인도 변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시간으로 넘어오고 나서 한 게 없으니 제쳐 두고. 이건 진짜 뼈아픈 이유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아무래도.
“황금 발톱 때문일지도 몰라요.”
황금 발톱이 이 시간대에 떨어졌기 때문에 던전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모든 게 설명된다.
“당신 때문일 수도 있죠.”
시더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폭탄을 던졌다.
“아닐걸요. 제가 뭘 했다고.”
“물론 당신은 한 게 없지만.”
이 사람이?
정말 한 게 없긴 해도,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것과 남이 말하는 건 기분이 다르다. 에스페란사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더 클라이번은 검지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시간을 거슬러 온 게 당신과 다른 헌터가 아니라 당신과 몬스터라면요? 당신 때문에 몬스터도 같이 왔다면?”
“……진짜 대단한 발상이네요.”
‘플레이어’라면 하지 않을 발상이다.
몬스터는 게임 속의 설정이고, 헌터는 실재하는 사람이다. 에스페란사가 이 시간으로 온 것이 ‘퀘스트’를 보낸, 아마 개발사 관련자일 사람의 고의라면 굳이 몬스터를 같이 옮길 이유도 없다. 있더라도 에이번데일 저택에 같이 떨어뜨렸겠지. 난데없이 가죽으로 만나게 할 게 아니라.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이곳이 ‘게임 속’이라는 가정하에서나 가능한 생각이겠지. 에스페란사는 치솟아 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내리눌렀다. 여기가 게임 속이 아니라면, 실재하는 공간이라면, ‘귀환증’만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지니까.
에스페란사가 질색하자 시더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그 가설을 털어 냈다. 납득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당장 답을 이끌어 낼 수도 없는 문제였으니까. 팔걸이를 두드리는 리듬이 점점 빨라졌다.
“아니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당신과 함께 이 시기로 온 헌터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던전도 있다.”
“그건!”
가장 발생하기 어려운 경우지만, 현재 상태로 보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황금 발톱의 존재로 인해, 혹은 어떤 다른 작용으로 이 시점에 던전이 이미 발생했고, 이 시점에 존재하는 다른 헌터가 던전들을 해결하고 있다는 가설.
어쨌든 누군가 트롤을 해치우긴 했을 테니까.
“그럼 그 헌터를 찾아봐야겠네요.”
시더는 고개를 저었다.
“반대로요. 던전을 찾아야 해요.”
“아, 몬스터 부산물이 그렇게 탐나요?”
“물론 그것도 있죠.”
다른 이유도 있다. 던전은 사람과 달리 몸을 숨기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던전이란 것이 알려지지 않은 걸 보면, 그에 대한 기록도 얼마 없을 게 뻔했다.
공식적인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면, 가야 할 곳은 돌고 돌아 다시 그곳이다.
“결국, 정보상에 가 봐야겠네요.”
시더는 반대했다. 더럽고, 불결하고,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면서. 그 말도 틀리진 않았지만 에스페란사에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13년 후, 헌터가 넘쳐나는 그곳에서도 필요한 정보는 이런 식으로 얻었었다.
어떤 게이머들은 헌터 자유 게시판 같은 데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그들의 방식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에스페란사는 가상 현실 게임을 할 때 그런 기능을 최소한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게이머 간 친목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친해지는 사람은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게임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 * *
[맵: 얼터 지구, 나인 호더]얼마 전에 보았던 맵이 그대로 떴다. 그날과 다른 점이라면, 거미줄처럼 꼬인 시커먼 뒷골목 안쪽으로 선명한 미색 길이 나 있었다는 점이다.
저번에 드나들었던 바로 그 길이다.
오늘의 에스페란사는 장비를 제대로 착용한 채, 그때 입었던 검은 후드를 두르고 있었다.
‘불편하지만, 장비가 워낙 눈에 띄니까.’
여러 세트를 갖춰 놓고는 있지만 능력치가 제일 좋은 것만 입기 마련이라, 에스페란사의 차림은 처음 에이번데일 백작 저택에 도착했던 날과 다르지 않았다. 그 꼴로 거리를 지나다니면 시더의 말마따나 경관들에게 붙잡힐 수도 있으니 그 위에 검은 라이딩 후드를 둘렀다.
‘거의 사신……’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후드가 좀 시커먼 색일 수도 있지. 분명히 존재감을 죽여 주는 부가 속성이 붙어 있는데 어쩐지 더 눈에 띄는 것 같을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