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에스페란사가 거절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던 때에, 문이 열렸다. 문 뒤에 누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코델리아만 깜짝 놀랐다.
“스털링이 어디에요?”
문틈으로 작은 얼굴이 빼꼼 들어왔다. 코델리아가 짐짓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잭. 숙녀의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하라고 배우지 않았니?”
잭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고 오히려 뻔뻔하게 대꾸했다.
“어느 방이든 노크를 하라고 배우기는 했죠. 잘못했어요.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요?”
“너 같은 어린애들은 몰라도 좋아.”
“내가 아가씨보다는 도움이 될걸요. 그렇죠?”
에스페란사를 돌아본 잭이 앞니 빠진 치열을 보이며 씩 웃었다. 그 짧은 사이에 아이의 수척하던 뺨에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에스페란사가 준 장난감을 끌어안던 팔도 제법 길쭉해졌다. 주근깨가 콕콕 박힌 장난기 어린 뺨이 아니라면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희망도 미래도 없는 잿빛 빈민가에 두고 잊어버리려고 했던 아이였다.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정이야말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애는 에스페란사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연민을 느낀 상대였다. 알량한 도움이나마 베풀고 싶었고, 토라진 것을 풀어 주고 싶었고,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게 됐다.
에스페란사는 조금 긴장한 채로 눈만 들어 올려다보는 꼬마와 눈을 맞추었다.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너 키가 많이 컸구나?”
“……당연하죠.”
잭이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제법 덤덤한 체를 하지만 자랑하고 싶은 티가 났다. 에스페란사는 그 꼬마의 머리를 한 손으로 헝클었다. 부쩍 결이 좋아진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잘됐네.”
“그래서 스털링이 어딘데요? 왜 거기로 가는 거예요?”
두 번째 질문에서는 선명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흔들리는 눈을 들여다보려니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속내가 빤히 읽히는 것만은 여전했다.
“할 일이 있어서.”
“코델리아 아가씨도요?”
“이쪽은 관광이야.”
잭이 코델리아를 돌아보더니 입을 삐죽였다. 코델리아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잭. 비밀을 지켜 줄 거지?”
잭은 에스페란사와 코델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마지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아오는 거라면요.”
코델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던바틴 따위의 재수 없는 땅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으므로.
“당연히 돌아오지! 얘는, 그런 걸 걱정했니? 정말 귀엽기 짝이 없어. 그리 오래 있지도 않을 거야. 잭, 나랑 약속이다. 너는 모르는 일인 거야. 알았지? 대신 선물 사다 줄게.”
어떤 상황이라도 선물을 거절하는 법이 없는 어린아이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사 와요.”
“그럼, 그럼.”
“그래서 진짜 뭐 하러 가는 건데요?”
코델리아는 아이의 집요함에 혀를 찼다. 두 사람은 결국 잭까지 끼워서 계획을 짜야 했다. 다행히 잭은 협조적이었다.
“걱정 마세요. 모르는 척할게요. 내 방에 짐 가방이랑 편지를 숨겨 놔도 괜찮아요.”
“얘는! 도망가는 건 아니야. 할머님께 당당하게 말할 거라고. 넌 그냥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만 비밀로 해 주면 돼.”
마벨우드 남작은 코델리아가 에스페란사와 단둘이 여행을 떠나는 것은 허용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지가 던바틴이라는 것을 알아도 허용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알았어요.”
잭은 오해한 것이 부끄러운지, 입을 삐죽거렸다. 코델리아는 깔깔거리며 잭을 마구 놀려댔다.
“그렇게 열심히 도와줄 생각이었어? 응? 내가 할머님께 혼날까 봐 걱정이 됐어?”
“그런 거 아니에요! 이씨, 진짜 아니라니까요.”
질색하며 코델리아를 밀어내던 잭이 에스페란사와 눈을 마주치자 흠칫했다. 에스페란사는 잭을 곤경에서 구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너 코델리아를 엄청 좋아하는구나?”
“아, 아니라니까요? 왜 다들 이래!”
잭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더니 쿵쾅거리며 도망가 버렸다.
“저 꼬마가 날 이기려면 한참 멀었다니까요!”
한참을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던 코델리아가 숨을 헐떡였다. 웃음이 차츰 잦아들자,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말 깜찍하지 않아요?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이 생긴 것 같아요.”
나인 호더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 아가씨의 말에서 작고 꼬질꼬질하던 빈민가 꼬마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잭의 태도에서도 코델리아에 대한 신뢰가 보였다. 조금 건방지게 굴어도, 심술을 부려도 코델리아가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아는 것이다. 버려지는 것,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던 꼬마는 이제 코델리아를 믿었다.
설령 에스페란사가 직접 잭을 맡았더라도 코델리아와 남작과 마벨우드 저택의 사람들이 해낸 것만큼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자라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성급하고 무책임한 결정이 좋은 결과로 돌아와서 정말로 다행이다.
“잭을 잘 맡아 줘서 고마워요.”
코델리아는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마벨우드 사람들의 목숨 빚을 언급하는 대신 그냥 이렇게 말했다.
“고마우면 절대 날 놓고 가지 말아요. 놓고 가면 평생 미워할 거예요.”
문제의 던전이 도시에까지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몬스터 사태’가 이 세상에 알려진 첫 던전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니 코델리아를 번화가의 호화로운 호텔 안에 두면 안전할 것이다. 애니도 데려가는데 코델리아가 안 될 이유는 없겠지. 두 사람은 시더처럼 직접적으로 쫓기는 게 아니니까.
고민 끝에 에스페란사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이틀 후.
하루에 두 번, 나인 호더에서 스털링으로 직행하는 급행열차. 헌터 하나, 하녀 하나, 숙녀 하나를 태운 열차가 허공에 흰 궤적을 그리며 나인 호더 중앙역을 떠났다.
* * *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뻗은 철로의 끝.
여느 때와 같이 항구 노동자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는 스털링 중앙역에서는 묘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이곳 스털링 시의 항구를 오가는 배들 중 절반은 대 파오룬 식민 무역을 주업으로 하는 상선이었고, 4분의 1은 군함이었으며 남은 4분의 1은 국내 다른 도시나 인접 국가으로 향하는 선박들이었다.
오스던과 파오룬을 오가는 주 항로가 막혀 버린 지금, 파오룬으로 향한 배들은 오지 않았고, 떠난 배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선원을 구하는 공고가 붙지 않은 지도 오래. 정박한 배는 많았지만 생기가 없어 마치 유령 항구처럼 보였다.
항구에서 가장 큰 건물 지붕에 앉은 여자의 다홍색 머리칼이 비릿한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한가로이 발끝을 까닥이며 자기 작품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무심했다.
불안과 초조가 피부에 닿을 듯 느껴지는 항구의 모습이 보는 이라고 즐거울 리 없다. 이 상황을 직접 만들어 낸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큰 감흥은 없었지만.
마치 영화 속 세트장을 보는 것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움직이는 선원들을 바라보던 다리아는 손끝을 툭 움직였다. 지나가는 선원 하나를 옆으로 튕겨 낼 듯이. 물론 손가락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고, 선원은 멀쩡하게 갈 길을 갔다. 그러나 다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걸어 다니는 장난감을 구경하는 듯했다.
“머리 색 좀 그만 바꿔. 찾기 힘들잖아.”
지붕 위로 가볍게 안착한 청년이 말했다. 앳된 얼굴에선 언짢은 기색이 숨겨지지 않았다. 다리아는 손끝을 튕겼다. 이번에도 손은 그저 허공을 긋기만 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길게 흔들리던 다홍색 머리가 차츰 차분한 검은색 단발로 바뀌었다.
“그 녀석이 게임엔 이런 기능도 필요하다잖아. 커스터마이징? 신분 숨기기도 좋고, 나쁘지 않은데.”
“그 신분을 나한테까지 숨기면 어떡하라고.”
가뜩이나 피곤한데 항구를 두 바퀴나 돌아야 했던 사이러스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다리아가 일어나 사이러스의 정강이를 발로 후려쳤다.
“시끄러워.”
경사진 지붕에 비스듬히 서 있던 사이러스는 잠깐 휘청했으나 금세 중심을 잡았다.
“던바틴 쪽은 어때?”
“의회에서 정책을 부결시키려는 쪽으로 가는 것 같긴 한데 내부 잠입이 까다로워서 표가 얼마나 모였는지까지는 확인 못 했어. 일단 상원 표는 거의 안 모인 것 같고, 의외로 하원 표는 적지 않은 것 같아.”
다리아는 지붕 위에 풀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부결 쪽으로 결정이 날지도 모르겠군. 적의를 해소할 기회를 주면 안 되지. 의회 소집일 전에 결론을 내야 하는데 말이야. 해적 놈들을 철수시켜 놨으니 이쪽이든 저쪽이든 반응이 오겠지. 헤이븐리 놈 말대로 친왕실 측 인사를 충동질해 놓긴 했는데……. 이런 섬세한 짓은 두 번은 못해 먹겠다.”
템프턴 수상은 보기 드물게 잘생기고 유능한 정치인이다. 어느 고명한 후작의 신분 낮은 후처가 낳은 차남으로서 무시당했던 사연도 있었다. 다리아가 오스던을 잘게 다져 놓을 때의 그는 방해꾼이지만, 맛있게 반죽된 오스던을 세상에 만찬으로 내놓을 때엔 훌륭한 장식이 될 것이다.
‘캐릭터성이 있다는 거지.’
평생 먹고사는 데 바빴던 두 사람은 생각해 내지 못할 일이었으나, 새로 생긴 동업자는 이런 부분에 박식했다. 아직 있지도 않은 유저들의 호감을 빼놓고 보더라도 행정가로서 템프턴보다 유능한 인물을 찾기는 어려웠다.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게임 초반에 수습용으로 꽂아 넣기에도 괜찮았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다리아로서는 드물게 계략이란 것을 만들어 레이먼드 템프턴을 몰아넣는 중이었다. 이 초유의 사태에 이미 그 밑의 관료들은 패닉 상태였고,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 적이 거의 없는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는 광산 국유화 결정이다.
템프턴 수상 자신을 위해서라면 식량부터 국가 통제하에 넣었어야 했다. 하지만 마정석 수급이 워낙 급했던 데다가, 식량에 대한 안건부터 냈다가는 의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부와 남부 영주 세력이 절대 반대할 것이 틀림없었다. 반면 마정석 광산은 주로 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북부는 정치적 영향력이 적었고 중, 남부의 주류 세력과는 전통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헤이븐리 그놈, 똑똑하던데. 출신 성분에 까탈스러운 공작이 괜히 데리고 있던 게 아닌가 봐.”
“쓸 만한가 보네.”
“그럭저럭. 얘도 정보 관리직 같은 걸로 써먹을까 싶어.”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우리가 없는 동안에도 관리자는 필요할 테니까.”
그들은 점점 바빠질 테니까. 비단 올해 연말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
그런 그들을 재촉하듯 멀지 않은 광장의 시계탑에서 묵직한 종소리가 났다. 다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그럭저럭 여유가 있으니까 넌 여기서 던바틴 쪽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봐. 헤이븐리 놈이 딴마음을 먹지 않는지도 확인하고. 던전 날 보자고.”
“뭐? 그치만 이번 ……는?”
난데없이 터진 폭죽 소리에 사이러스의 목소리가 묻혔다. 다리아가 씩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손에 들린 황금빛 날이 허공을 그었다. 섬광처럼 터져 나온 빛이 사라졌을 무렵엔 다리아도 자리에 없었다. 홀로 남은 사이러스는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체 혼자서 어쩔 셈인 거야? 거기서 우린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불안감이 담긴 목소리가 흩어졌다. 사이러스는 굳은 얼굴로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어차피 사이러스는 다리아 없이 이곳에서 나갈 수 없으니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할 수밖에. 모쪼록 현실의 그들도 괜찮기를 바랄 뿐이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
이 장난감 같은 세계가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