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철로는 스털링 시를 지나 주도 탈마인으로 뻗는다. 탈마인 뒤로 몇 개의 소도시가 더 있고, 차츰 고도가 높아지는 북단으로 가면 끝없는 고원과 광산 도시뿐이다. 삽만 떠도 마정석이 쏟아져 나오는 그 천혜의 땅은, 오스던 전역에서 마도 공학의 수혜를 가장 적게 받은 지역이기도 했다.
그런 결과가 발생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이 탈마인 성의 고리타분한 꼴을 보면 공작의 중세 사람 같은 취향도 한 축을 차지할 것 같았다.
차가운 정원 의자에 몸을 기댄 마도 공학자 시더 클라이번은 낡아서 삐걱대는 고성을 자랑스레 보여 주던 공작의 낯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그런 류의 고집이라면 그 역시 만만치 않았다. 최첨단 기술을 찍어 내는 마도 공학자의 저택에서 기본 설비를 제외한 마도구를 거의 쓰지 않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들의 이해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충분한 가치 판단을 통해 그런 결정을 내린 시더와는 달리 공작은 그저 단순한 기계 혐오자, 마법 혐오자일 뿐이었다. 딱한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명색이 공작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이런 다 쓰러져 가는 고성에서 차가운 벽돌 위를 기어 다니는 쥐를 세며 자랐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시더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런 공작이 마도 공학자인 시더 클라이번을 붙잡고 늘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지. 정확히는 ‘나인 호더 출신의 부유한 백작’을 붙잡은 것이지. 마도 공학자라는 흠에도 불구하고.
지난 일주일, 시더는 공작의 손에 붙들려 휘둘리느라 시간 낭비만 했다. 모인 표 수는 충분했고, 반대표를 던져 주기로 한 의원들의 면면도 확인했다. 이제 능구렁이 상대하기도 끝이 났으니 느긋하게 학회에 참석해서 새로운 기술을 구경하며 머리를 비우려던 그의 계획은 전부 수포로 돌아갔다.
성에는 이미 공작이 초대한 북부 유력 가문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공작은 의회 일을 휘리릭 끝내 버린 뒤 일주일 내내 파티를 열었다. 애초에 목적이 이쪽이었던 것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러다 명단이 유출되면 어쩔 거냐고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공작은 뻔뻔스레 나무는 숲에 숨기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원치는 않았지만, 이 성에 신세 지고 있는 몸으로서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생각은 있었는지 무도회는 성 내에 머무는 손님들 외에 드나드는 초대객 없이 진행되었다.
딸 가진 부모들만 신이 났다. 한정된 북부 사교계의 신랑감들만 보다가 결혼 적령기의 귀족 남자, 그것도 작위 있는 귀족들이 유입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딸들의 등을 떠밀며 저 중 누구 하나라도 물어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 부유한 영지, 키가 크고 외모가 아름다운 백작은 그중에서도 최상등품이었으나, 던바틴 사교계의 숙녀들에게는 나무에 열린 모과 같은 존재였다. 향은 좋아도 따먹을 수는 없었다.
“대체 어디 계시는 거예요? 로드 에이번데일!”
바로 저 귀찮기 짝이 없는 숙녀, 공작의 조카인 미스 디아넬라 렌프루의 짝으로 낙점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엔 시더 클라이번의 의사는 물론이거니와, 저 렌프루 아가씨의 의사조차 없었다.
던바틴 사교계는 위계질서가 엄격한 편이었다. 공작이 시더 클라이번에게 ‘내가 딸처럼 아끼는 조카일세. 숫기가 없어 춤을 못 추는데 부탁 좀 하겠네.’ 하고 조카의 손을 넘긴 순간 그냥 그런 것으로 정해져 버리는 것이다.
하루 이틀은 어떻게 참았다. 하지만 할 일은 대강 마무리가 되었는데도 좀처럼 돌아갈 틈을 주질 않았다. 양심은 있는지 나름대로 막아 주는 듯하던 알라스테어 렌프루도 어제 무슨 소식인가를 듣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무도회장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또다시 열아홉짜리 공작의 조카를 떠맡을 위기감이 엄습하자, 시더는 아예 정원으로 도망친 참이었다.
‘정치란 참 귀찮은 것이지.’
성에서 머물라는 공작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한 대가로 귀찮은 열아홉 살 애송이를 떠맡게 될 줄 알았다면, 광산을 정부에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던바틴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어요!”
공작의 조카, 미스 디아넬라 렌프루는 첫날부터 리튼에서 온 젊은 백작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시큰둥하게 굴며 예의만 겨우 챙기는 시더 클라이번에게 수줍은 웃음을 보이던 디아넬라의 관심은 둘째 날에는 적극적인 애정 공세로, 셋째 날에는 오기로, 넷째 날에는 미련으로 남았으며 다섯째 날에 터진 분노가 여섯째 날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소진되었다. 그리하여 일곱째 날에는 시더도 머리를 좀 식힐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결코 추위 때문이 아니란 것은 분명했다. 준 적 없는 기대를 끌어안고 쏟아 내는 화를 받아 줘야 할 시점이다. 스무 살쯤에는 자주 있었던 일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숙녀가 다가와 테이블을 탕, 주먹으로 내리쳤다. 재떨이가 테이블 위에서 덜그럭거렸다.
“제가 그렇게 별로인가요? 정말 조금도 관심이 가지 않으세요?”
대체로 무례하지만, 그래도 신사 된 도리를 아예 무시할 수 없었던 시더 클라이번은 눈을 허공에 비껴 뜨며 궐련을 재떨이에 문질렀다. 요컨대 대화하기 싫다는 티를 내면서도 아예 무시하지는 않았다.
“약혼녀가 있단 말씀을 열일곱 번째 드리고 있군요, 미스 렌프루.”
어린 숙녀는 그 무례한 태도에 펑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쏘아붙였다.
“절 떼어 내려고 거짓말하시는 것 다 알고 있어요! 백부님께서 다 조사를 하셔서…… 앗.”
그래. 조사에도 안 잡힐 정도로 아무도 모르는 일이란 말이지. 사방팔방 소문이라도 냈어야 했나? 빈정이 상한 시더는 비뚠 웃음으로 답했다.
“없는 약혼녀를 내세워 가며 거절해야 할 만큼 대단한 분은 아니실 텐데요, 미스 렌프루.”
대단하기보다는 대단히 귀찮았다. 사실 그런 거짓말씩이나 해 가며 떼어 낼 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지금 그의 관심은 마법 혐오자에 지역주의의 수호신인 던바틴 공작이 나인 호더를 주 활동 지역으로 삼고 있는 마도 공학자 백작에게 자기 조카를 떠넘기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조금 더 솔직하자면, 사실 그것도 별로 관심 없었다.
던바틴에서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머리를 비우고, 조금 더 그에게 중요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어느 마법사와 그 마법사가 몰고 온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언제쯤 마음을 한 김 식히고 에스페란사를 제대로 볼 수 있을지, 결국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그 결정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지…… 그런 중대한 질문들.
그런데 지금 빌어먹을 공작 때문에 발이 묶여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관심도 없는 여자의 예비 약혼자 후보 따위로 떠밀려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춤을 추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도망가는 게 벌써 일주일째였다.
이쯤 되자 그냥 광산 국유화에 찬성표를 던져, 던바틴 공작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로드 에이번데일! 듣고 계신가요?”
“아뇨.”
시더는 한발 늦게 대답했다. 사실 디아넬라 렌프루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왜 안 가고 계속 붙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알아들을 만큼 거절을 했을 텐데.
깊은 한숨을 끝으로 마지막 남은 예의도 버려 버렸다.
“미스 렌프루. 난 당신이 그냥 갔으면 좋겠어요. 솔직한 말로는 좀 성가시군요.”
“……정말이지 너무하시네요. 무례해요.”
날카롭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단지 그의 무례함에 놀라서만은 아니었고, 사실 반 정도는 추위에 떠느라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옷을 빌려주는 친절을 보태 줄 마음은 없었다. 추우면 들어가겠지. 시더는 시큰둥하게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곤 턱을 괴며 말했다.
“무례한 나는 찬바람 맞으며 하고 싶은 생각이나 계속할 테니 미스 렌프루는 적당히 들어가서 몸이나 녹이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요? 귀찮게 치근덕거리지 말고.”
디아넬라의 창백한 얼굴이 순식간에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차오르는 수치심이 얄팍한 호감을 밀쳐 냈다.
“저, 저도 원해서 당신을 찾아온 게 아니라고요!”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개진 얼굴로 해 봐야 별로 설득력 없는 말이었다. 뒤늦게나마 땅에 떨어진 자존심을 챙기는 게 다행이기는 했다. 자존심을 신경 쓰기 시작했으니 조금만 더 무시하면 갈 것 같다.
“백부님이 소개해 주신 분이니까, 저는 최선을 다해야 해요.”
“아하.”
“백부님은 절 아끼셔서, 좋은 혼사를 소개해 주시려고 한 거니까…….”
미스 렌프루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려던 시더도 그쯤 돼서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디아넬라 렌프루는 멈칫했다.
“그건, 모르셨을 거예요.”
사실 공작이 에스페란사의 존재 자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 뒤에 따라붙은 소문들도. 명목상으로는 피후견인에 불과했으니 실제로 둘이 어떻게 붙어먹었든 상관없다고 여겼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은 더 진창에 처박혔다.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미스 렌프루, 당신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그 백부께서 상대가 어느 숙녀분과 1년 가까이 동거 중이라는 얘기는 하셨는지? 설마 그것도 몰랐을 거라고 하진 않겠죠. 나인 호더 전체가 다 아는 이야기인데.”
빨갛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세상에, 동거라고요?”
소녀의 눈이 시더를 위아래로 재빨리 훑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군. 무슨 상상을 하는 거죠?”
“아무 상상도 안 했어요!”
“뭘 상상했든 그럭저럭 맞을 거예요. 그럼 이제 가서 가증스러운 백부님께 침이라도 뱉어 줄 이유는 충분한 거겠죠?”
리튼을 떠나 온 지금, 그의 눈은 즐거움을 찾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에스페란사도 없고, 몰두할 연구 거리도 없었다.
관심도 없는 혼사에 억지로 끌어들이려 사람을 귀찮게 군 값으로 던바틴 공작의 조카가 공작의 얼굴에 침 뱉는 꼴을 본다면 그럭저럭 악감정 없이 넘어가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뭐, 그럴 리가 없겠지.
시더는 그 말을 끝으로 디아넬라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끊고 새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디아넬라 렌프루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던바틴의 좁은 사교계에서 던바틴 공작의 조카딸이라는 신분에,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디아넬라는 누구에게나 쉽게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디아넬라를 선택하지 않는 경우는 있어도 이토록 무례하게 무시당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아까는 숙녀의 앞이라고 불을 끄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아예 존재를 모른 척하겠단 의도가 뻔했다. 그는 어느덧 주머니에서 웬 기계를 꺼내 손끝으로 굴리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척 보기에도 시중에는 없는 초소형 기계 장치였다.
‘턱도 없는 건 알겠어. 하지만 지금 돌아가면…….’
디아넬라는 완고한 백부의 호통과 투명 인간 취급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투명 인간 취급을 선택했다. 눈앞의 이 남자가 아니라도 레이디 칭호가 없는 디아넬라가 좋은 남편감을 찾기 위해선 백부인 던바틴 공작의 주선이 필요했다. 그러니 공작에게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5분도 안 돼서 쫓겨난 티는 내지 말아야지.
그러나 날은 추웠고, 겨울의 정원은 불을 밝혀 놓아도 볼 것이 없었다. 디아넬라는 1분 만에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넬라의 앞에는 대화 상대 비슷한 것이 있었다. 디아넬라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 같긴 했지만.
이 남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가 뭐가 있을까? 마도 공학? 디아넬라는 볼트와 너트, 나사와 톱니바퀴의 미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볼트와 너트 중 어느 것이 나사처럼 생긴 물건인지도 헷갈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할 말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저기, 로드 에이번데일. 혼사 얘긴 안 꺼낼 테니 약혼녀분 얘기라도 해 주면 안 될까요?”
아니나 다를까 ‘왜 아직도 안 가고 있었냐’는 눈빛이 돌아왔다. 한번 무례하기 시작한 시더 클라이번은 거침없이 말했다.
“관심 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