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디아넬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런 반응을 보일 수가 있담?
“……저도 관심 있어서 묻는 게 아니에요! 이만큼 거절당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다고요. 백부님껜 정중하게 거절당했다고 잘 말할게요. 하지만, 그래도 노력한 티는 나야 하잖아요.”
미련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약혼녀도 있고 관심도 전혀 보이지 않는 신사에게 매달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존심이 상했다. 미련과 자존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디아넬라가 열아홉의 덜 여문 머리로 생각해 낸 최선이 이것이었다.
“저도 알 만한 명예로운 가문의 숙녀분인가요?”
대답은 없었다. 철컥, 철컥, 부품 맞물리는 소리만 들렸다. 아기자기한 정원 의자에 비해 커다랗고 늘씬한 몸이 등받이에 불량하게 기댄 채 한 손으로 기계 부품을 돌리고 있었다. 디아넬라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느 집안이에요? 예쁜가요? 엄청난 미인이에요? 아니면, 대단한 상속녀인가요? 요즘 많이들 그런 결혼을 한다던데.”
마지막 것은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던진 질문이었으나, 상대는 여전히 못 들은 것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례한 질문이니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디아넬라는 울상을 지으며 발을 쿵 굴렀다. 정말로 나쁜 의도는 없는데. 그냥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다른 여자는 다 잡초처럼 보인다고 해도 성심성의껏 반응해 줄 수 있는데!
“왜 하나도 말씀을 안 하세요? 제가 그분께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 저도 명예를 아는 숙녀예요!”
철컥. 마지막 부품이 맞아떨어지자, 시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까진 그래도 조용조용 말하는 것 같더니 점점 목소리가 커져서 귀찮았다.
“미스 렌프루. 당신이 아니라 당신 백부가 나서도 내 약혼녀의 머리끝 하나 못 건드릴 테니 그런 걱정은 안 해요.”
“그럼 왜요……?”
겉옷 단추를 다시 채우며 자리에서 일어난 시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적당히 떠들게 두면 갈 줄 알았더니 끝도 없고.”
지팡이 짚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며 차츰 멀어졌다. 디아넬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일어났다. 이 정도면 백부님이 보기에도 갸륵할 정도는 되겠지.
그래도 내심 아쉬웠다.
투박하고 재미없는 던바틴 남자들과는 달랐는데. 소매 끝까지 세련되고, 냉정하다 못해 무례한 태도조차 밉지 않았다. 사실 밉긴 했지만……. 입술이 바싹 말랐다. 손을 천천히 폈다 다시 쥐기를 반복하자 새콤한 사탕을 입에 물었을 때와 같은 감각도 차츰 잦아들었다.
* * *
디아넬라 렌프루의 사정이야 어떻건, 시더는 빠른 걸음으로 무도회장으로 돌아왔다. 막 군무가 시작되어 테이블 주위는 한산했다. 아까 뛰쳐나간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여전히 무도회장에서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더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 던바틴까지 온 나인 호더 신사들이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에이번데일! 여기 있었군. 아까 어느 숙녀분과 춤추는 걸 봤는데. 숙녀분은?”
“모르지.”
나인 호더 신사는 던바틴 사람들에 비해 에이번데일 백작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짧은 대답에서 상황을 대충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게다가 듣기로 피후견인이라던 아가씨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모양인데. 물론 그것도 꽤 놀랍긴 했다. 저 성질을 견디는 숙녀가 있다는 점에서.
“아하…… 알 만하군. 아, 이쪽은 듀크 대위.”
신사가 콧수염을 기른 장교를 가리키며 말했다. 서른 언저리로 보이는 장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소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에머리 듀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로드 에이번데일.”
대위라는 남자와 악수를 하자, 먼저 말을 걸었던 신사가 말했다.
“듀크 대위는 해군에 복무 중이라 이번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더군. 해군에서도 이번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야.”
그래야겠지. 시더는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대양의 주인처럼 군림하던 대 오스던 해군이 군대 꼴도 못 갖춘 해적 나부랭이에게 밀려서 납치된 배만 벌써 몇 척인데.
“예, 물론입니다. 듣기로는 사령부에서도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더군요. 결국 군대를 파견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역시 회의적인 어투였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지 않는 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겨도 본전, 지면 체면 다 구기는 그런 결정을 내릴 리 없었다.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스털링에 있는 해군 부대에 들렀다 왔는데,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전투에서 살아 나온 배가 막 항구에 도착했다더군요. 그 해적들이 나타난 이후로 처음으로 돌아온 배입니다. 생존자들 말로는 해적들 사이에 내부 분열이 일어난 것 같답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일이 빨리 마무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망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시더는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갈리스턴 공작은 에스페란사에게 다리아가 해적들을 손에 넣었다고 했다. 최첨단 무기를 둘둘 감은 군함들을 상대로 해적들이 선전하는 이유는 다리아 덕분이다. 그러니 해적들 내에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든 말든 그들의 무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리아가 갑자기 손을 떼지 않는 이상. 그런데 갑자기 배를 놓친다고? 던전을 만들어서 가라앉히기만 하면 되는데?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다리아가 다 쌓아 놓은 성을 무너뜨릴 이유가 없었다. 이건 오히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로 보인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이들과 나눌 수는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알게 되었을까. 그는 눈을 설핏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로드 에이번데일, 혹시 군함에서 쓸 만한 정찰용 오토마톤도 만들 수 있습니까?”
듀크 대위가 불쑥 물었다.
“만들자면 못할 건 없겠지요. 장비와 연구실은 필요하겠습니다만.”
“그 정도야 얼마든지 지원되지요. 사실 필요한 건 개발보다는 개조입니다만.”
그렇게 말한 듀크 대위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행여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사령부에서는 해적들이 정말로 후퇴하는 중인지 확인하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외부인에게 하면 안 되지만, 로드 에이번데일이 그냥 외부인은 아니니까요.”
스스로를 군부와 아무 관련 없는 외부인이라고 생각하는 시더는 그냥 의례적인 미소만 띠었을 뿐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안다. 나인 호더에서도 군부대의 의뢰를 받은 전적이 있는 데다 신분도 신원도 확실한 인물이니 믿겠다는 것이겠지.
시더는 잠시 고민했다. 핀리의 마도 공학 학회와 스털링 해군의 의뢰. 관심 있는 쪽은 단연 전자였지만, 후자를 선택해서 현재 상황을 좀 더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몰두하다 보면 불쑥 치밀어 오르는 두려운 감정도 사그라들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발밑의 벼랑에서 멀어지면 되는 것이다.
“언제가 좋겠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
그러면 공작의 꺼림칙한 접근도 떼어 낼 수 있을 테고.
‘나인 호더 사교계와 혼맥으로 연결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래서 알라스테어 렌프루와 만난 적도 없는 코델리아 마벨우드를 약혼시켰고, 그 약혼이 최악의 방향으로 깨진 지금, 조카딸이라도 밀어 넣어 보려는 것이다.
나인 호더의 부유한 영주들이 가진 자본과, 수십, 수백 년간 쌓인 인맥과 평판, 그리고 의회에서의 영향력. 이번 일을 겪으면서 던바틴 공작은 더더욱 중남부 중심의 정책 기조에 대항할 세력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코델리아 마벨우드라는 카드를 고작 괴담 따위에 버려 버릴 때보다 더 절실하게.
하지만 고르고 골라서 시더 클라이번이라니. 공작은 출신 좋고 지참금도 풍족하게 챙겨 갈 자기 조카 정도면 누구나 좋아하겠거니 제멋대로 넘겨짚은 모양이지만, 상대가 나빴다.
평생 독신으로 산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주 특별한 단 한 명이 아니면. 그의 평화롭고 정돈된 일상을 기분 좋게 깨뜨리고, 자기 멋대로 스며들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시더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내일 출발하도록 하지요. 기대되는군요.”
아직은 시간이 있다. 아직은, 열정도 특별함도 남아 있었다.
대화가 끝나자, 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사라졌다. 시더는 망설임 없이 닫힌 문으로 향했다. 동생과 대화를 나누던 공작이 그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이번데일!”
조용히 나가려고 했는데. 시선이 몰린 것을 느낀 시더가 입 안으로 험한 말을 중얼거렸다. 공작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다가와 등으로 문을 슬쩍 가렸다.
“일찍 돌아가는군. 무도회를 더 즐기지 않고. 디앤은 어디에 두고 혼자인가?”
“내일 떠날 준비를 해야 해서요. 미스 렌프루가 어디 계신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샤프롱에게 여쭈셔야지요.”
은근슬쩍 조카와 그를 엮어 보려던 공작이 이마를 일그러뜨렸다.
“어디 갈 곳이라도 있나 보지? 내 조카 아이와 함께 다녀오는 게 어떻겠나? 이 근방은 누구보다 그 애가 잘 알고 있다네.”
시더는 잠시 고민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공작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급한 의뢰를 받아서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고요.”
“뭐라고 했나, 자네?”
마지막 말은 공작밖에 듣지 못할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공작이 역정을 내는 바람에 시선이 집중되고 말았다. 시더는 혀를 차며 말했다.
“다른 신사분을 알아보시죠. 50년 전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누가 어른이 주선하는 선 자리 따위에 관심을 갖겠습니까마는.”
공작의 얼굴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줄곧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이토록 노골적인 거절을 당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 부분이 놀라울 따름이다. 정말로 몰랐단 말인가?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워낙 급한 의뢰라 내일 만나 뵙고 떠나기 어렵게 되었는데 이렇게 인사드릴 기회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보게, 에이번데일!”
공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데도 시더는 마치 못 들은 것처럼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지나쳐 갔다. 덩어리져 엉킨 목소리와 음악 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이제 어쩔 겁니까? 디앤만 꼴이 우습게 되었는데! 그러게 처음부터 알라스테어의 혼사를 멋대로 깨뜨리지만 않았으면……!”
공작의 동생이 분을 터뜨리는 소리도 희미해졌다. 시더는 피식 웃어 버렸다. 나인 호더에 줄을 대려고 혼처를 찾는 건 확실해 보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로 인해 확실해진 것은 하루빨리 이 고리타분한 성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뿐이다. 침실로 향하는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머릿속으로는 새롭게 추가된 일정에 대해 곱씹고 있었다.
스털링이라.
다리아의 계획도 스털링 시와 인접한 바다에서 이루어지고 있겠지. 안전을 생각한다면 스털링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게 옳았다. 하지만 생명의 위협은 그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 적어도 지식에의 욕구를 억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무심코 그렇게 넘어가려던 찰나였다. 어느덧 시야를 가득 채운 문 앞에 멈춰 선 시더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죽으면 에스페란사는 어떻게 하지?’
당장 돌아가지도 못하고, 작위가 회수되든 세습되든 지금처럼 저택에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유언장을 고쳐 두었으니 재정적인 어려움은 없겠지만…….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 끝이 자조적으로 비틀렸다.
바로 이런 게 문제였다. 세상의 중심이 옮겨 가는 것. 생각도 결정도 통제에서 벗어나는 감각. 스스로가 더 이상 그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깨달음.
그러니까, 더욱 스털링이다.
심장이 그 결정을 책망하듯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