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스털링 중앙역. 바람에서도 바다 냄새가 났다. 코델리아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얇은 여름 모자에 희고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꽁꽁 싸맨 겨울옷으로도 항구 도시에 도착한 기분을 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여행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반짝이는 금발을 부드러운 털모자 아래로 숨긴 코델리아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내린 애니가 침울한 분위기의 역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가씨, 마차를 잡아 올까요?”
“괜찮아요, 마중 온 사람이 있으니까.”
코델리아가 역 앞에 선 커다란 증기 마차를 가리켰다. 여덟 명이 타도 될 정도로 넉넉한 마차였다. 마차 옆면에 기대 서서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던 신사가 고개를 들었다.
신사의 녹색 눈이 부드러운 하늘색 털모자에 감싸인 코델리아의 얼굴을 발견하고 일순간 밝아졌다.
“레이디 코델리아. 오랜만입니다.”
코델리아는 콧등을 찡그렸다.
“정말 오랜만이긴 하네요. 그동안 잘 지냈나 봐요?”
“신경 써 주신 덕분입니다. 그리고…… 미스 헌터. 반갑습니다.”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천천히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신분만 따지면 에스페란사가 백 살쯤 많았더라도 먼저 무릎을 굽혔어야 했지만, 그들이 겪은 거대한 재난 앞에서 신분의 높낮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알라스테어는 생명의 은인을 대하는 예의로 에스페란사를 맞이했다.
“목숨 빚을 갚을 기회를 준다고 하셨지만, 설마하니 미스 헌터와 함께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책망 어린 어투에도 코델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스털링 시에서 스털링 백작이 마중하러 오는 것 이상으로 거창한 게 어딨다고요? 부담스럽거든요. 그렇죠?”
코델리아가 에스페란사와 애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애니는 그저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을 뿐이지만, 에스페란사는 잠깐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델리아는 거 보란 듯이 코끝을 세웠다.
알라스테어는 하녀인 애니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하고, 세 사람을 마차에 태웠다. 합승 마차를 제외하면 에스페란사가 타 본 것들 중에서도 가장 큰 마차였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스털링 백작 저택…….”
코델리아가 위협적으로 이마를 찡그리자, 알라스테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으로 가는 게 옳겠지만 보시다시피 레이디 코델리아의 심기를 고려해서 호텔로 갈 겁니다. 짐을 내려놓으셔야, 잠깐. 짐이 어디 있죠?”
“내가 가지고 있어요.”
“아.”
탄성을 터뜨린 알라스테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묻지도 않았다. 코델리아가 키득거리며 에스페란사의 어깨에 기댔다.
“아무튼, 짐을 내려놓아야 하니 호텔로 안내하겠습니다. 객실은 이미 예약해 뒀습니다. 레이디 코델리아의 이름으로 하면 추적될 수 있으니 제 집사의 부인 명의를 빌렸습니다. 콘스탄스 애쉬다운 부인이라고 합니다. 식사하실 만한 장소와 관광지도 정리해 두었습니다.”
“관광 가이드 쪽이 체질에 맞는 거 아니에요?”
코델리아가 짓궂게 물으며 알라스테어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저보다는 집사가 수고했지요. 그리고 일정 중에 시간을 내주시면 스털링 저택에서 대접을…….”
거기까지 말하던 알라스테어가 다시 코델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맛있어요?”
“요리사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날 당신 가족들과 마주치게 하진 않겠죠?”
서로가 불편해질 상황이 오지 않겠냐는 물음에 준비한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이 생기면 바로 기별하겠습니다.”
“그럼 좋아요.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은 뭘 먹지? 아, 바닷가재를 먹어 볼까? 테이트 양, 바닷가재 먹어 본 적 있나요?”
“네, 한 번이지만요.”
“그래요? 난 처음인데. 괜찮겠죠?”
코델리아와 애니는 이마를 맞대고 식당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차 안은 조금 조용해졌다. 창문 바깥으로 스쳐 지나가는 스털링의 거리를 바라보던 에스페란사가 입을 열었다.
“코델리아는 관광 목적이지만, 난 로드 에이번데일을 찾으러 왔어요. 던바틴에 있다는 건 알고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확인이 안 돼서 말이에요.”
“예?”
“개인적인 사정이에요. 아무튼, 던바틴에 있는 상류층 신사의 위치를 찾는 데는 정보상보다 로드 스털링이 빠를 것 같아서요.”
“예, 그거야 그렇지만.”
숨어 있는 게 아니라면, 스털링 백작인 알라스테어는 던바틴에 머물고 있는 상류층 신사 숙녀들의 위치를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던바틴 사교계는 대부분 그의 친척이거나, 인척이거나, 친척의 인척이거나 인척의 친척이었으니까. 하지만 에이번데일 백작은…….
“로드 스털링,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못 찾는 건가요?”
알라스테어가 성심껏 옮겨 적었던 관광지 목록에 푹 빠져 있던 코델리아가 불쑥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알라스테어는 무심코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로드 에이번데일은 던바틴 성에 있습니다.”
허탈할 정도로 쉽게 나온 답이었다. 속이 조금 답답했다. 에스페란사는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광산 관련으로?”
“알고 계셨군요.”
역시 그랬다.
“그럼 스털링으로 올 일은 없겠네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핀리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다행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시더가 던전에 연루되어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코델리아와 애니와 함께 있다가 던전이 열리면 해결하고, 핀리로 시더를 찾으러 가면 될 것 같았다. 다행인 일인데, 왠지 마음 한구석에서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에스페란사가 입을 닫자, 코델리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로드 스털링, 내일은 고급 상점가에 나가 볼까 하는데.”
“안내하겠습니다.”
“좋아요. 사실 돈 한 푼 안 갖고 왔거든요.”
코델리아는 반 장난으로 한 말이었으나, 알라스테어는 오히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하는 셈 치겠습니다.”
“어? 그 목숨 빚이 나한테도 해당되는 거였나요?”
마차가 호텔에 도착했다. 알라스테어는 마차 문을 열며 대답했다.
“그날, 레이디 코델리아가 아니었다면 전 죽었을 겁니다. 아무도 저를 살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
붉은 머리칼 위로 흰 햇빛이 쏟아졌다. 알라스테어는 덤덤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코델리아는 그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린 이후에도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니가 힐끔 두 사람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에스페란사 옆으로 따라붙었다.
세 사람이 짐을 내려놓고 나오는 동안 알라스테어는 호텔에 이런저런 당부를 하는 중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던 에스페란사는 마치 충실한 시종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당부하는 알라스테어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마벨우드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상류층 청년 특유의 무심함이 두드러졌는데.
호텔 관리자에게 당부를 마치고 돌아서던 알라스테어가 에스페란사를 발견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던 것 같았으나, 코델리아가 내려오자 금방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 로드 스털링. 아직 안 가고 있었군요?”
“……예. 할 일이 있어서. 아, 호텔 측에 일러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으니 쓰시면 됩니다.”
“그래요? 테이트 양, 어디로 간다고 했죠?”
“중앙 우체국이요.”
우체국에서 일하는 오빠가 있다고 덧붙인 애니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난 항구 주변을 구경해 볼까 하는데. 그럼 항구에 나를 먼저 내려 주고 우체국으로 가면 되겠네요. 에스페란사는요?”
“따로 할 일이 있어요. 그리고 항구에는 가지 말아요. 세 사람 모두.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타거나, 항구 근처에 가면 안 돼요.”
에스페란사는 다소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기차에서 던전 이야기를 처음 들은 애니는 창백한 얼굴로 에스페란사를 흘끔거렸다.
“오늘 가 보려고 했는데…… 오늘은 별일 없지 않을까요?”
“혹시 모르잖아요. 절대 안 돼요.”
에스페란사는 오늘 항구 근처에 던전 추적기를 설치해 둘 예정이었지만, 던전이라는 것은 그 속성상 휩쓸리면 끝이다. 에스페란사는 이미 기차에서 두 사람에게 초보자도 쉽게 쓸 수 있는 무기를 하나씩 나눠 주었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면 두 사람보다 힘세고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빼앗길 수도 있었다.
최선은 아예 엮이지도 않는 것이다.
“절대로, 절대로 가지 말아요.”
코델리아는 불만스레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던전을 겪어 본 사람으로서 그 충고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으므로, 불평은 하지 않았다.
늘 말을 잘 듣는 데다 바다에 별 관심이 없는 애니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이 알라스테어 렌프루에게로 향했을 때,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엉뚱한 것을 물었다.
“세 분이 다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겁니까?”
“그런 셈이네요. 전 다른 할 일이 있어서 왔고, 코델리아는 여행 목적이에요. 애니는…….”
눈이 마주치자 애니는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온 김에 오빠를 만나는 것뿐이고, 전 아가씨가 걱정돼서요.”
“날 걱정할 일이 뭐가 있다고.”
에스페란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알라스테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확인했다.
“테이트 양은 가족을 만나러 가신다고 했고, 미스 헌터는, 걱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알라스테어 렌프루도 마벨우드의 재난을 겪은 몸이었다. 총 한 자루로 거대한 괴물과 싸우는 에스페란사를 보았다. 새삼스레 걱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에스페란사가 위험할 정도의 일이면 알라스테어는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디 코델리아까지 혼자 다니시는 건, 괜찮으시겠습니까?”
“관광지 위주로 다닐 건데 별일이야 있겠어요? 음, 항구가 아니면 어디로 가지?”
“안내인을 소개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레이디 코델리아와의 친분이라면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눈앞의 누구 때문에 급이 내려가긴 했어도 여전히 코델리아 마벨우드는 나인 호더에서 손꼽히는 신붓감이고, 마벨우드 남작은 사교계의 대모와 같은 존재였다. 북방의 던바틴 출신들은 대체로 내부의 작은 사교계에서 결혼 상대를 구하는 편이었지만 소개를 받아 나인 호더 사교계에 진출하는 것을 꺼릴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 더 많은 기회가 있는 법이었으므로.
“고맙지만 됐어요. 여기까지 와서 사교 활동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사교 활동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좋아해요! 하지만 좋아하는 일이라고 언제나 즐거우란 법은 없잖아요? 그렇게 걱정되면 차라리 로드 스털링이 안내를 맡지 그래요?”
귀찮은 것을 털어 내듯 투덜거린 말에, 알라스테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정신이에요?”
코델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에스페란사는 혀를 찼다.
“그럼 난 먼저 가요.”
“어, 어? 마차 안 타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꾸한 에스페란사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호텔을 나왔다.
코델리아가 알라스테어에게 보이는 믿음과 호의는 같은 재난을 등 맞대고 이겨 내며 쌓인 것이다. 에스페란사에게도 그런 상대가 있다. 이곳에, 멀지 않은 곳에.
‘날 만나 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조금 울적했다. 에스페란사는 애써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나중에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