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긴 해안선을 따라 커다란 증기선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중 한 대가 트럼펫 같은 소리와 함께 출발했다. 며칠간 출발하는 배가 없었던 탓에 사람들의 시선이 배가 움직이는 모양으로 집중됐다.
항구를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 배를 타고 스털링에 도착한 사람들, 화물을 실었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선원들과 항구 노동자들, 오후부터 술에 얼큰하게 취한 채 돌아다니는 취객들.
다시 바람이 불었다. 에스페란사의 치마도 바람 방향에 따라 휘날렸다. 강철 날개를 꼼꼼히 덮은 후드 자락이 부풀었다.
에스페란사는 거의 버려진 것처럼 오래 정박된 배 근처에 던전 탐지기를 설치했다. 아예 방치한 게 아니고 정박료를 내고 있는지 배를 치우려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무척이나 낡고 녹슨 데다 몇 시간 동안 다가가는 사람 하나 없는 배였다.
남이 쓰는 자리에 몰래 설치하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기계도 아니거니와 던전의 여파로 항구가 다 무너지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설치를 끝낸 에스페란사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최대한 높이 날았다. 공기의 저항을 가르며 바다 위에 선 에스페란사의 시선 끝에 작은 섬이 보였다.
사이러스의 말이 맞다면 아마 저 섬일 것이다. 스털링 중앙역의 관광 안내소에서 챙겨 온 지도를 펼쳐 놓고 보아도 모양이 일치했다.
항구에서 배로도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였다. 날아서 그 섬까지 가는 건 어렵겠지만, 날씨가 좋아서 희미하게 섬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저 섬이 바로, 파오룬 무장 독립 단체가 기지로 쓰고 있는 섬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에서 망원경을 꺼냈다. 황동과 나무를 섞어 만든 망원경은 유물처럼 고풍스러운 형태였지만 성능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해안선에 배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피랍된 무역선으로 추정되는 배들도 있었다.
바다의 크기에 비하면 그리 멀지 않은 위치인데 오스던 해군이 고작 이 거리의 섬 하나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히 수상한 노릇이었다. 다리아가 도움을 준 것은 확실하고.
여기서 던전이 발생한다고 해도 오스던 본토까지 닿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대규모 레이드에서도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규모의 던전을 터뜨린 적은 없었다.
‘그런 건 사람이 깰 수가 없으니까.’
난이도도 웬만해야지. 그리고 관리자 입장에서도 규모를 적당히 조절하는 게 경제적이다. 던전을 여는 데 드는 마력을 아끼는 편이 좋으니까. 지금 이곳에서 던전이 발생한다면 난이도 조절 따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마력량은 신경 쓰겠지.
에스페란사는 섬에 조금 더 가까이 접근했다. 그래 봤자 섬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망원경 사용법이 기억나지 않아 조금 헤매다가 겨우 경통을 만져서 렌즈를 조절했다. 좁은 시야 속의 섬이 조금씩 커졌다. 초점을 맞추느라 흐리던 망원경 속 배가 시야를 마저 조절하니 곧 선명해졌다.
납치한 오스던 무역선, 자기들 소유로 보이는 비교적 낡은 배들. 고개를 끄덕이던 에스페란사는 이질적인 배 한 척을 발견했다.
구조가 어떻게 되는 거지? 배에 대해서 문외한이라도 보통 배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안다. 그런데 저 배는 뗏목부터 증기선까지 어떤 배와도 비슷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차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저런 게 물에 뜨기는 하나 싶을 정도로. 에스페란사가 그 배의 정체를 고민하는 동안, 커다란 그림자가 해변에 가까워졌다.
검은 머리칼의 청년이었다. 에스페란사 자신이 아주 잘 아는 얼굴.
‘사이러스다.’
앳되고 치기 어린 눈빛이 남은 13년 전의 사이러스. 키는 비슷했지만, 지금의 건장한 헌터와 비교하면 소년답게 호리호리했다. 어디까지나 비교급으로.
파오룬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를 따라 나왔다. 두 사람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으나 이 거리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애써 파도 소리를 무시하며 귀를 기울여 봤으나 어림도 없었다. 수 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거리인데, 헌터의 발달된 감각으로도 들릴 턱이 없었다.
다행히 길지 않은 대화 끝에 사이러스가 배에 올라탔다. 저 배가 사이러스의 배였던 모양이다. 그러면 동력도 알 만하다.
아니나 다를까, 마력이 차오르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마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는 환호하듯 부르르 떨기 시작한 배는 곧 바다를 가를 듯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항구를 벗어났다. 에스페란사는 그 배가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자리를 벗어났다.
대화는 하나도 듣지 못했지만 사이러스가 스털링에 있다는 걸 알았으니 오늘의 수확은 충분했다.
다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에스페란사는 허공에 턱을 괴고 멍하니 평온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인질로 잡히는 배가 군함이었다고 했지. 군함이라.
해군 기지에 찾아가 봐야겠다.
물론 기지에 당당히 들어가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왕성에도 무단 침입했는데 군부대라고 못 할 리가. 그리고 에스페란사는 이미 게임을 하면서 몇 번 스털링 시의 해군 기지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바다 위의 허공을 가로질렀다.
* * *
둥근 만을 따라 지어진 기지는 정박장을 껴안는 듯한 형태였다. 희미하게 보이던 기지가 차츰 가까워졌다. 에스페란사는 사람이 없는 해안가로 내려왔다.
“안 들켰겠지……?”
한적한 에이번데일과는 달리 스털링은 사람이 많은 도시였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에스페란사는 날개를 접어 인벤토리에 넣어 두며 주변을 휘휘 살폈다.
미색으로 켜진 지도를 시야 한구석에 펼쳐 놓고, 순찰을 피해 조심스레 움직였다. 해군 제복을 입은 장교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지나쳐 갔다. 에스페란사는 지도를 따라 사령부 건물로 향했다.
옛날에는 거의 맨발로 뛰어나온 사령관이 에스페란사를 맞이했지만, 지금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안광을 빛내며 서 있는 가고일 상 옆에 병사 둘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문이 잠겨 있는 것도 아니니 기절시키고 들어가는 법도 있겠지만, 문 앞에 보초 둘이 기절해 있는 모습은 너무 눈에 띈다. 에스페란사는 나무를 타고 지붕까지 뛰어올라 빈 굴뚝으로 몸을 던졌다. 검은 후드 자락이 길게 펄럭였다.
이 시대의 군사 시설에는 마력을 운반하는 파이프가 깔려 있다. 평소에는 냉난방 정도에나 쓰이지만 비상시에는 벙커를 작동시키고 군함을 출발시키는 동력, 기지를 지키기 위한 공격에까지 사용된다.
어쨌든 지금은 ‘평상시’였으므로 난방을 위해 쓰이는 몇 개의 파이프를 제외하면 대체로 쉬고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가죽 장갑을 낀 손등으로 온도를 가늠하며 커다란 파이프를 낮은 자세로 통과했다.
정보가 있을 만한 곳은 지하의 벙커나 고위 장교들의 사무실 정도. 군사 기밀을 찾기 위해서는 벙커 쪽이 더 유력하겠지만, 그런 최첨단 군사 시설을 부수지 않고 뚫을 자신은 없었다. 사무실 쪽으로 가야겠군.
고위 장교의 사무실은 대체로 위층에 있었고, 승강기로 중요 시설과 이어져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환풍구를 통해 장교의 방에 접근할 생각이었다. 장교가 방에 없으면 그대로 뒤지면 되고, 방에 있으면 기절시켜 놓고 뒤지면 된다.
사령부의 구조는 에스페란사의 맵과 같았기에 장교들의 방까지 가는 것은 문제없었다. 하지만 환풍구에는 문패가 붙어 있지 않아 어느 방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그저 환풍구 근처에서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부분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게 몇 개의 방을 지나치던 차였다.
젊은 장교와 나이 지긋한 장성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오는 방이 있었다.
“정찰용 오토마톤 개조에 일주일을 제시했는데,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워낙 원본이 좋았으니 개조도 금방인 것 같습니다.”
젊은 장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발음이 익숙한 것이 나인 호더 쪽에서 온 사람인 것 같았다. 정찰. 그 단어에 귀가 확 이끌렸다. 나이 든 군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그래, 원본이 좋았지! 누구 작품인데. 잘됐어. 오토마톤이 준비되면 바로 정찰을 시작해야겠군. 별것도 아닌 파오룬 잔챙이들을 상대로 너무 오래 끌었지. 생존자들 말대로 놈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난 게 틀림없네. 좀처럼 협동이란 걸 모르는 족속들이야. 안 그런가, 듀크 대위?”
“옳으신 말씀입니다, 준장님.”
에스페란사는 환풍구 틈새로 사무실을 훑었다. 또렷한 보라색 눈에 묵직한 원목 책상과 그 옆에 세워 둔 오스던 국기가 잠시 담겼다가 사라졌다.
선반에는 두꺼운 파일들이 꽂혀 있었는데, 가운데 빈자리에 놓인 액자에는 빼빼 마른 몸에 안경을 쓴 젊은 남자가 해괴하게 생긴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진이 꽂혀 있었다. 준장과 닮았지만, 본인은 아닌 것 같았다.
한쪽 벽에 걸어 둔 제복 위에 훈장이 빼곡했다. 책상 위에는 만년필과 노트, 지구본, 알 수 없는 레버와 다른 방으로 연결되는 듯한 파이프, 그리고 명패가 있었다.
준장이 피우는 파오란 연기가 환풍구로 흘러들어 왔다. 에스페란사는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손을 휘휘 내저어 연기를 쫓으며 귀를 기울였다.
“아주 하등한 족속들이지만, 교활하단 말이지. 무슨 수를 썼는지 짐작도 가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난 준장은 오스던 전역과 그 인근 해역을 표시한 지도 위, 바다 한가운데를 궐련으로 찍어 눌렀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지도가 타들어 갔다. 준장은 시커멓게 변한 지도 위의 점에 재를 털며 말했다.
“놈들이 배를 납치해 가는 해역이 추정하기로는 이쯤인데, 오스던에서는 수십 년 전에나 탔을 배로 잘도 우리 군함을 몇 대나 빼앗아 갔단 말이지. 그러니 이제 우리가 상대해야 할 건 놈들의 고물 배가 아니라 우리 군함이네. 나인 호더에서 신식 군함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아. 그 전까지는 정찰만 하는 거야, 정찰만.”
“그렇긴 합니다만, 대 오스던 해군이 고작 파오룬 해적 따위에게 밀린다고 시인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패기 넘치는 젊은 장교의 말에 준장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존심 따위가 승리를 가져다주지는 않지. 군인은 신중해야 한다네. 굴욕적인 것이 지는 것보다는 늘 낫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중얼거린 준장은 지도 위의 항만을 궐련 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씩 웃었다. 해군답게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졌다. 듀크 대위는 내심 ‘그냥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현명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던바틴 공작은 어쩌고 있던가?”
여유를 되찾은 듀크 대위가 차분히 설명했다.
“모아 온 사람들의 면면이 상당하더군요. 나인 호더로 진출하려는 것도 기정사실인 것 같습니다. 참석자 명단은 따로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광산은 핑계란 말이지? 늙은이가 머리 좀 썼군.”
“겸사겸사겠지요. 하지만 광산 일은 속히 처리하고 무도회 여는 데만 집중하는 티가 났습니다. 던바틴에 그런 유력 인사들이 비밀리에 모일 일이 좀처럼 없으니까 말입니다. 공작은 자기 조카를 에이번데일 백작에게 들이미는 것 같았고요.”
에이번데일. 이름을 되뇌며 코웃음을 친 준장이 찬장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거친 손길로 마개를 땄다.
“흥, 반응은?”
“관심은 없어 보였습니다만, 이상하게도 스털링 백작과 면식이 있는 듯하더군요. 던바틴 공작이 상당히 공을 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두 가문의 결합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부분까지 들은 에스페란사는 애써 몸을 돌렸다.
‘……어차피 들을 건 다 들었으니까.’
환풍구 너머로 검은 후드 자락이 스쳐 지나갔다. 순식간에 파이프를 타고 밖으로 나온 에스페란사는 해군 기지를 빠르게 벗어났다.
한편, 누군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준장은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말했다.
“그랬다면 에이번데일이 우리 의뢰를 받아들여 스털링까지 오는 일은 없었겠지. 또 헛수고한 모양이군.”
준장은 혀를 차고는 잔을 깨끗이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