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에스페란사는 뻑뻑한 눈을 깜박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낯선 잠자리, 훌쩍 추워진 날씨. 피곤할 이유는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아직 자고 있는…… 얼굴이 왜 그래요?”
짙은 녹색 모자를 쓴 코델리아가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다가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양손으로 뺨을 쓸어 보곤 화장대 위의 거울을 살폈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선 피로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만져 보아야 뺨이 조금 푸석하다는 게 느껴지는 정도였다.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는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표정이 나쁘잖아요.”
코델리아가 싱긋 웃으면서 자기 입꼬리를 양 손가락으로 올리는 시늉을 했다. 에스페란사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아무 일도 없었지. 에스페란사는 쓴웃음으로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으음.”
믿는 것 같진 않았지만, 코델리아는 더 묻지 않고 에스페란사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이거 잠깐 봐줄 수 있을까요?”
“이게 뭔데요?”
평범한 노트였다. 첫 페이지는 마벨우드 저택과 그 근처 마을의 지도였는데, 저택 위에 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별을 마구 덧붙여 놓았다.
“매뉴얼이에요. 내가 알라스테어 렌프루와 교류할 이유가 이거 말고 달리 뭐가 있겠어요? 둘이 머리 맞대고 고민했죠. 그런 일이 또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코델리아는 딱 한 번 던전을 겪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통찰력으로 여러 가지를 적어 두었다.
“……이렇게 큰 도시에 마벨우드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위험한 일을 하러 간다’는 말만으로도 아마 던전을 예측했을 코델리아의 눈에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에스페란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때엔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다. 아주 많이.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다 구하는 건 불가능해요.”
마벨우드의 일은 정말 운이 좋았다. 사람이 적었고, 규모도 작았다. 시더는 헌터 하나 몫을 거의 해 주었고, 알라스테어도 그럭저럭 헌터 반 몫은 했다. 수성전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람에 비해 무기가 많았고, 코델리아는 사람들을 금방 모았고 능숙하게 통솔했다. 모든 것이 마법처럼 맞아떨어진 드문 경우였다.
수많은 경험으로, 에스페란사는 그런 경우가 백 번 중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파인먼트 하우스에서 발생한 던전에서도 수십 명이 죽었다. 던전의 존재가 알려져 있고 수많은 헌터들이 상주하고 있는 13년 후의 나인 호더에서도 그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최대한 많이 구하는 건요?”
“설마 던전에 뛰어들 생각은 아니겠죠? 이번 던전은 바다에 생길 거예요. 코델리아, 바다는커녕 항구 근처에도 못 갈 줄 알아요.”
코델리아의 시선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짐작은 했겠지만, 그리고 아마도 이 매뉴얼을 보여 준 이유도 그 짐작을 확인하기 위해서겠지만, 직접 던전이 발생하리란 사실을 확인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달싹이는 입술과 연신 고쳐 맞잡는 손에서 두려움이 배어났다.
저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뛰어들 생각이었던 건가? 에스페란사가 눈을 부릅뜨자 코델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변명했다.
“……로드 스털링이 대응할 수 있도록 조언은 줄 수 있잖아요.”
“로드 스털링도 못 가요.”
설령 알라스테어가 던전이 발생할 때 그 바다에 있다고 하더라도 뭘 어쩌겠는가? 스털링 시에는 선출된 시장이 있고 주둔하는 군대가 있다. 군함에는 선장이 있고 장교들이 있다.
다섯 살 차이 나는 시더 클라이번이 박사 학위에 훈장까지 있는 ‘검증된’ 인물이라면, 알라스테어는 군사 훈련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증명된 것이 없었다. 급박한 재난 상황에서 그런 그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몇 마디 조언을 주는 것으로 코델리아의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애니, 거기서 눈치 보지 말고 너도 들어와서 들어.”
문턱을 앞에 두고 아닌 척 아까부터 서성이던 애니가 얼른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에스페란사는 소파에 기대 놓은 쿠션을 끌어안았다.
햇살이 눈부시도록 쏟아지는 이 응접실은 널찍하고 아기자기했다. 장식품 하나 허투루 배치된 것이 없었다. 훌륭한 환경이었으나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나 금속 냄새가 나는 연구실에서 느껴지던 안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쿠션을 꽉 쥐면서, 조금씩 밀려드는 결핍감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던전이 근처에 발생해서 피할 수 없을 때는, 무조건 지하로 가세요. 그리고 지상으로 통하는 문을 막아요. 거기만 막으면 돼요.”
물론 파인먼트 하우스에서처럼 특수 지형이 걸리면 답이 없다. 하지만 평범한 던전에서는 지하에서 문을 걸어 닫고 있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몬스터는 하늘에서부터 나타나니까.
“지하가 없으면 크고 튼튼한 석재 건물이 제일 좋고…….”
코델리아는 열성적으로 설명을 받아 적었다. 애니도 눈을 빛내며 들었다. 나갈 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에스페란사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코델리아를 일으켰다.
“잘 다녀와요.”
“에스페란사, 오늘도 할 일이 있어요?”
“음, 글쎄요.”
원래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지만, 어제 들은 이야기도 있으니 군함을 확인해 보고 올까 했다. 그 정찰용 오토마톤이란 게 얼마나 걸릴지도 확인을 해 보면 좋을 것 같았고. 개조라고 했으니 오래는 안 걸리겠지.
사흘? 나흘?
……아니지. 에스페란사는 자신의 머릿속 마도 공학자의 기준이 시더에게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 장교가 일주일 정도라고 말했다. 정찰용 오토마톤의 인식 거리를 늘리는 수준의 개조라면 딱 그쯤 걸릴 것이다.
“정해진 건 아니에요.”
“그럼 차라리 나랑 같이 나가요. 기분 전환도 할 겸! 스털링에 유명한 세공사가 있는 것 알아요? 원래는 마정석 제련공이었대요. 기대해 봐도 좋아요. 어때요?”
“어, 난 보석은 별로…….”
아니지. 마정석 제련공이었다면 맡길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 흐릿한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곧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애니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이어서 코델리아에게로.
“근처에 은행이 있나요? 잭한테 신탁을 들어 주고 싶은데.”
어차피 돈은 넘쳐 난다. 아니지. 에스페란사는 잠깐 고민하다가 생각을 고쳤다. 수중에 있는 건 돈이 아니라 환금성 높은 현물이다.
“보석상에도 들르면 좋겠네요. 근데 이런 것도 받아 주나?”
인벤토리에서 적당한 보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게임이라는 게 그렇다. 현실보다 재화의 가치가 낮고, 부자가 되는 것이 쉽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희귀하다는 물건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헌터들을 위한 경매장에 나오는 경매품들은 주로 보석보단 희귀한 아이템이나 무기 위주였지만 가끔 멸망한 황실의 보석이니 하는 것들을 구할 수도 있었다.
‘진짜 망한 왕실들이 있으니까. 게임 시작 몇 년 전쯤인가.’
격동의 시대에 그런 변화 정도는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덕에 보석엔 관심도 없었던 에스페란사도 괜찮은 물건들을 몇 점 가지고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와, 이런 거 처음 봐요! 할머님의 보석보다 더 귀한 것 같은데.”
물방울 모양으로 세공한 커다란 루비가 무려 다섯 개.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목걸이는 척 보기에도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가질래요?”
“이런 걸 줘도 돼요?”
“나는 어차피 쓸 일이 없으니까요.”
코델리아는 왜 쓸데가 없냐, 시즌이 시작되면 일주일 내내 무도회를 열어 주겠다, 하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에스페란사가 내민 목걸이를 얌전히 받아 갔다.
“애니, 너도 하나 가질래?”
“저까지요?”
애니는 질색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차피 쓸 일도 없다고 극구 사양하는 애니에게 조금 작고 무난한 목걸이를 하나 쥐여 주었다. 애니는 이 귀한 걸 잃어버리면 어쩌냐며 목걸이에 손도 대지 못했다. 결국 나인 호더로 돌아갈 때까지는 에스페란사가 대신 맡아 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건 세공사에게 맡길 물건인데…….”
마지막으로,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 한구석에서 제련공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떠올랐던 물건을 꺼냈다. 인벤토리에서 나오는 손에 집중하던 애니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보석함조차 그 화려함이 아찔할 정도였다. 코델리아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보석함이 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아직 그 나라 황실이 안 망해서 지금쯤 같은 물건이 거기에도 있겠지만, 어쨌든 황실의 보물이었다.
“처음 보는 보석이에요.”
수십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커다란 보석을 감쌌다. 목에 걸치면 쇄골을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다이아몬드와 살갗 위에서 선명하게 반짝이는 짙은 푸른빛.
“보석이 아니니까요.”
“보석이 아니라고요? 이렇게 예쁜데.”
애니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대편에 앉은 코델리아도 똑같은 표정이라 에스페란사는 조금 웃고 말았다.
“지금 이 상태로도 너무 예쁘고, 당신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굳이 맡겨야 할 필요가 있나요?”
“이건 줄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요.”
코델리아도 애니도 다음에 나올 답을 기다리는 듯했지만 에스페란사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이렇게 지체됐네. 로드 스털링이 기다리겠어요. 애니, 모자 쓰는 것 잊지 말고.”
가볍게 채비하고 내려가자 1층 로비에서 기다리던 알라스테어가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로드 스털링, 부탁할 일이 하나 있는데요.”
에스페란사는 아침 인사를 빠르게 읊조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말씀하십시오. 최대한 돕겠습니다.”
“사람을 하나 찾아 줬으면 좋겠어요. 위치만 확인해 주면 돼요.”
“제가 잘하는 일은 아닙니다만…… 아는 경관이 있으니 연락은 넣어 보겠습니다.”
알라스테어는 못 찾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을 두어 번 강조한 다음 에스페란사가 내미는 사진을 받아 갔다. 그의 눈이 커졌다.
“사진에 색이 있군요?”
두 사람 사이로 금빛 머리통이 불쑥 끼어들었다.
“신기술이래요. 봄에 그로더리 샵에서 봤어요. 어머, 그런데 이 남자는 누군데 그사이 사진을 찍었어요?”
코델리아는 예리했다. 에스페란사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