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알라스테어는 세 사람을 상점가로 안내했다. 항구 도시 스털링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끝의 로터리에는 백화점이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백화점 내의 보석 상점에서 가진 보석 몇 개를 팔고, 그렇게 얻은 돈 일부를 잭 앞으로 신탁을 넣어 두었다. 그사이에 코델리아는 슬쩍 새 무도화를 하나 더 장만했고, 애니는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쇼핑이 끝나자, 그들의 마차는 스털링 백작의 이름으로 예약해 둔 세공사의 공방으로 향했다.
공방은 깔끔한 이층집 같은 형태였다. 유명한 세공사답지 않게 호화스러운 접객실을 구비해 두고 있지도 않았고, 제복을 입은 점원들도 없었다.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스승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대신 자기들을 세공사의 제자라고 소개한 쌍둥이 남매가 그들을 안내했다. 낡은 가죽 소파에 몸을 붙이고 앉자 쌍둥이 남매가 서툴게 차를 내왔다. 애니는 그들이 차를 쏟기라도 할까 봐 연신 몸을 들썩였다.
“그냥 제가……!”
“애니, 앉아.”
에스페란사가 애니의 손목을 붙잡아 앉혔다. 다행히 똑같이 생긴 남매는 똑같이 잔 받침에 차 몇 방울 정도를 흘렸을 뿐, 무사히 네 잔의 차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나이 든 세공사가 두 제자의 부축을 받으며 느린 걸음으로 들어왔다. 에스페란사는 그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유명한 사람이잖아?’
게임에서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마정석 발견 초기와 달리 지금은 마정석 제련이 획일화되어 장인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보석 세공사 일을 겸하고 있는 것뿐이다. 던전이 빈번해지고 몬스터 부산물들이 마도구의 재료로 부상하면 마력 투과율에 맞춰 섬세한 마정석 제련 기술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때 이 세공사는 오스던에서 손꼽히는 마정석 제련공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런 사람이라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지.’
아무리 마정석 제련공이라고는 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귀한 물건을 맡기는 게 불안했는데, 장인의 얼굴을 본 순간 불안감이 씻겨 내려갔다. 보석함에서 목걸이를 꺼내는 에스페란사의 손길도 가벼워졌다.
장인은 그 명성에 걸맞은 눈을 지녔다. 침침해 보이던 눈이 에스페란사가 내민 목걸이를 본 순간 날카로워졌다.
“마정석이군요.”
장갑 낀 손이 보석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는 제련 방식인데.”
시선 움직임에 따라 배율이 조절되는 돋보기안경을 든 세공사가 마정석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오직 마정석 제련 방식에 관심이 있을 뿐 보석 세공사로서 이렇게 엄청난 물건을 본 데 대한 감격이나 관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문득 그 처음 보는 돋보기가 굉장히 익숙하다는 생각이…….
“마정석으로 쓰시려면 제련 방식을 바꾸셔야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세공사가 눈을 들었다. 사무적인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자, 순간 들었던 생각이 깜박 사라졌다. 그 기시감은 뭐였을까.
세공사는 정해진 것이 없으면 견본을 봐도 된다고 말하며 제자에게 견본품 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키가 작은 소년이 머리칼을 팔랑이며 뛰어가서 자기 몸의 반 정도 되는 커다란 궤짝을 가져왔다.
여러 가지 광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세공한 견본품들은 작았지만, 모양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에스페란사는 고민 끝에 익숙한 세공 몇 개를 골랐다.
“제련 방식도 바꾸시겠습니까? 모양이 바뀌면 목걸이도 수리해야 합니다.”
모양이 바뀌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목걸이에서 떼어 낼 생각이었으니까. 이 마정석에는 이미 정해 둔 용도가 있었다.
“이거, 남자 장신구로도 바꿀 수 있나요?”
“네에?”
세공사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코델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이 예쁜 걸요?”
애니와 알라스테어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빛깔, 투명도, 크기, 어느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는 보석이었다. 이런 것을 신사용으로 바꾼다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숙녀의 장신구가 당연히 신사의 것보다 더 크고 화려하다. 티아라부터 귀걸이 목걸이 브로치, 반지……. 그에 비해 신사의 몸에 지닐 만한 보석은 대체로 크기가 작고, 비교적 눈에 띄지 않는다. 남성용으로 바꾸려면 저 거대한 보석을 쪼개서 세공을 고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야말로 낭비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런 보물을 고작 남자 장신구 따위로 만들다니, 이건 보석에 대한 모욕이야!’
코델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 보아도 생각이 들리는 듯했다. 알라스테어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눈을 부라리는 코델리아를 자중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단호했다.
“필요하면 쪼개도 좋아요.”
“세상에, 제발 다시 생각해요. 에스페란사, 저런 엄청난 보석, 아니 마정석을 쪼개다니. 저 크기 좀 봐요. 저런 크기의 보석이 얼마나 드문데!”
보석은 쪼개면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하락한다. 하지만 마정석의 값을 매기는 방법은 보석과 달랐다. 그리고 이 마정석은 보석으로서만큼이나 마정석으로서의 가치도 높았다. 경매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에스페란사가 괜히 사들였던 것이 아니었다.
마정석의 가치를 잘 몰랐던 백여 년 전에 어느 황실의 보물이 되었지만, 이젠 본연의 기능으로 돌아갈 때도 되었다.
코델리아가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마정석을 살펴보던 세공사가 입을 열었다.
“신사분의 장신구라면, 브로치 정도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쉽지만 크기는 줄어들겠고요.”
“모양도 중요하지만, 기존 마도구의 동력으로 쓸 수 있게 제련이 될까요?”
늙은 세공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페란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공사가 다시 돋보기를 들었다. 황동빛 몸체가 삐걱거림 없이 움직이는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상하게 익숙했다.
“그런데 혹시 그 돋보기.”
에스페란사가 입을 떼려던 순간, 공방 문고리가 흔들렸다.
스털링 백작의 이름으로 예약해 두었으니 같은 시간에 다른 손님을 받을 리는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몸을 휙 돌렸다. 천천히 문고리가 돌아가고, 바깥에서부터 빛이 쏟아졌다. 키가 크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들어오다가 문턱에서 멈춰 섰다.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었던 에스페란사가 팔을 내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애니가 탄식을 터뜨렸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크게 떴다가 한발 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더듬더듬 물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밀런은 말을 아꼈지만, 불 보듯 뻔했다. 밀런이 여기 있다는 건, 시더도 여기 있다는 말이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지경이었다. 적어도 한 명은 안전한 줄 알았더니!
상황을 짐작한 코델리아가 나직이 혀를 찼다. 에이번데일 백작은 사교계에 그리 열성적인 인사가 아니라 코델리아도 그의 고용인까지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저 멀쩡하고 왠지 좀 재수 없게 생긴 청년이 로드 에이번데일의 시종인 모양이다.
‘주인이나 시종이나…….’
숙녀답지 않은 표현을 애써 삼킨 코델리아는 새침한 얼굴로 돌아와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앉았다. 로드 에이번데일의 시종에게 풀어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곧게 세운 목과 약간 치켜든 턱이 오만해 보였다. 애니는 그런 코델리아를 발견하고 남몰래 웃다가 같은 얼굴을 한 알라스테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역시 애니와 눈이 마주치자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에스페란사는 그런 일행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왜, 왜 여기 있는 거야? 탈마인에 있는 것 아니었어?”
“알고 계셨습니까?”
뒷조사했지. 에스페란사는 말하지 않았지만, 밀런은 대충 눈치챈 모양인지 구태여 다시 묻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백작님께서 스털링에 있는 해군 부대의 의뢰를 받으셨습니다. 자세한 건 기밀이라 함부로 말할 순 없습니다만. 그리고 제가 여기 온 건…… 선생님.”
세공사의 주름진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에드거 군, 맡긴 마정석은 모드에게 받아 가게. 모드.”
“네, 선생님.”
모드라고 불린 여자아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밀런을 데리고 갔다. 팔랑팔랑 걸어간 여자아이가 한쪽 벽 앞에 도착해 발판을 누르자 밑에서 승강기가 삐걱삐걱 올라왔다.
“아저씨는 무거워서 같이 타면 위험하니까 여기서 기다리세요.”
밀런은 아저씨란 말에 약간 이마를 찡그리기는 했으나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에스페란사가 세공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로드 에이번데일과 아는 사이셨군요.”
“마정석을 만지던 시절에 인연이 있었습니다.”
어쩐지 익숙하다 했는데, 그의 돋보기도 시더 클라이번의 작품이었던 모양이다. 저쪽도 에스페란사가 시더와 관련이 있다는 걸 몰랐는지 놀란 기색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시더와 무슨 사이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지금에 와서는, 어떤 표현도 쉽게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에스페란사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세공사는 말을 돌렸다.
“제련 방식은 아까 원하시는 정도만 맞춰드리면 되겠습니까?”
“……마도 공학자에게 선물할 마정석이에요. 호신용이고요. 즉각적으로 마력을 뽑아 쓸 수 있도록 마력 방출 속도에 신경 써 주세요. 쪼개더라도 최대 저장량이 줄어들지 않게 해 주시고요.”
갑자기 쏟아지는 요구 사항에도 세공사는 흔들림이 없었다. 묵묵히 끄덕이며 요구 사항을 받아 적는 장인의 손끝을 바라보던 코델리아가 불쑥 물었다.
“제련 과정에서 투명도가 낮아지지는 않겠죠?”
“그런 일은 없습니다.”
세공사가 딱딱하게 대답하자, 코델리아는 그제야 안심하고 다시 얌전한 자세로 돌아갔다. 잠시 후, 밀런이 상자를 들고나왔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에스페란사가 뒤돌아보자, 밀런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조끼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들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는데도 불구하고 밀런의 태도는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침착했다. 그는 에스페란사와 시더의 갈등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태연히 명함을 내밀었다.
“백작님께선 도노반 중령 소유의 사택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여기, 주소입니다.”
명백히 그의 단독 행동이었다.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자기 위치를 알길 바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이 먼 스털링까지 오지 않았던가?
망설이던 에스페란사가 천천히 팔을 들어 명함을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