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밀런은 편지만 전해 주고 구석으로 물러나 애니와 더는 물을 의미도 없는 안부 따위를 주고받았다. 에스페란사는 편지를 꼭꼭 씹듯이 읽어 내렸다.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둥글게 모으며 투덜거렸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지금 같은 서먹함이 없던 때라면 모를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그런 시도를 할 만큼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정말, 이게 무슨 소리람. 펜촉으로 추신 부분만 툭툭 두드리던 에스페란사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펜을 잡았다.
뺨이 말려 올라간 채로 편지를 쓰는 에스페란사를 본 코델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흥, 로드 에이번데일이 그렇게 얄밉게 구는데도 편지 한 장이면 용서가 된단 말이죠?”
“얄밉게 군 적 없……지는 아닌데, 그것 때문은 아니라니까요.”
시더는 늘 어느 정도 얄밉게 굴지만 그건, 그러니까 패시브 스킬 같은 거다. 새삼스럽게 그런 걸로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모든 문제는 기본적으로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속인 데 있었고, 그다음으로는 시더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해일처럼 들이닥친 데 있었다. 제아무리 깊게 뿌리박은 나무라도 해일을 견딜 수는 없듯이, 그도 그저 그렇게 휩쓸려 버린 것뿐이다.
에스페란사의 위로는 참던 눈물을 흘려보내게 해 줄 수는 있었지만, 괴로움을 잊게 해 주진 못했다. 다행히 편지로만 짐작하는 그는 전보다 많이 안정된 것 같았다. 밀런에게 물어봐도 생활 패턴이 망가진 것 빼고는 특별한 구석이 없다고 한다.
그건 에스페란사가 오기 전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좋은 일이지만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생각에 잠긴 동안 편지 한 귀퉁이에 끄적인 그림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느슨히 머리를 묶은 작은 캐릭터가 깜찍했다. 머리통이 몸만 했는데 그 작은 몸뚱어리에 크라바트에 재킷까지 야무지게 걸치고 있었다.
킥킥거리며 앙증맞은 손에 지팡이까지 쥐여 주던 에스페란사는 갑자기 든 생각에 고개를 휙 돌렸다.
“애니!”
“네?”
밀런에게 레이스 리본을 보여 주던 애니가 리본을 대충 던져 버리고 달려왔다.
“좀 이따 오빠 보러 우체국 간다고 했지?”
“정확히는 오빠가 아니라 조카들 보러 가는 거지만, 네, 우체국에 가긴 하겠죠. 뭐 시키실 일 있으세요?”
“잠시만.”
종이를 한 장 더 꺼내 얼른 뭔가를 휘갈겨 적은 에스페란사는 종이를 봉투에 넣고 봉했다. 봉투 위에는 커다랗게 ‘사이러스’라고 적었다. 그 봉투째로 짙은 색 봉투에 넣어 주소를 적었다.
“이거, 최대한 빨리 보내 줘. 나인 호더까지 가는 당일 특급우편으로. 가격은 아무리 비싸도 상관없어.”
보통의 특급우편은 도착하는 데 사나흘 정도가 걸린다. 하지만 당일 특급으로 보내면 늦어도 다음 날 아침까지는 도착했다. 시간이 촉박했으므로, 돈을 좀 쓰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나았다.
“중요한 편지인 거죠? 제가 오빠한테 오늘 나가는 우편 마차에 끼워 넣어 보라고 할게요. 걱정 마세요.”
편지를 받아든 애니가 잠시 벗어 두었던 코트를 걸치고 달려 나갔다. 편지가 무사히 도착한다고 끝나는 건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의 위치를 몰랐다. 적은 주소는 마법사의 펍 주소였다. 그러니까 펍에서 사이러스에게로 편지를 전하는 시간도 생각해야 했다.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제 쪽의 편지도 빨리 주셨으면 합니다.”
에스페란사는 얼른 편지를 봉투에 넣어 밀런에게 내밀었다. 코델리아가 멀리서 ‘주인이나 시종이나’ 하고 한 번 더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지만 밀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밀런이 떠난 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으로 올라온 에스페란사는 책상 위로 고개를 떨군 채 챙겨 온 편지를 다시 읽어 보다가 돌연 이마를 찡그렸다.
“그림이 어디 갔지?”
시더가 보낸 편지는 여기 있는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그 낙서, 다른 편지지에 한 거였나? 설마 그게 시더에게 보낸 편지였던 건가?
‘미쳤나 봐.’
쿵. 책상에 머리를 박는 소리에 체스판을 노려보던 코델리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지. 이럴 게 아니지. 침착하자. 까짓것 좀 창피하고 말면 된다. 더 중요한 일들을 해야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로드 스털링, 저번에 부탁한 건 아직까지 소식 없어요?”
코델리아와 체스를 두고 있던 알라스테어가 말에서 손을 뗐다.
“무슨 부탁인데?”
이 일과 관련이 없는 사촌 부부가 궁금한 티를 냈지만 알라스테어는 못 들은 척 그를 등지고 일어났다.
“와, 이거 여기 둔 거죠?”
그새를 틈타 코델리아가 그의 말을 먹어 버리자 이 체스판에 걸린 벌칙을 떠올린 잘생긴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하지만 일의 경중을 잊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사립 탐정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정보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알라스테어의 시종이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오랜 불륜 검거 경력으로 미행에 도가 텄다는 유명 사립 탐정답게 무려 사이러스를 미행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있었다. 다른 사람을 사이러스로 착각하고 미행한 기록은 제외하고.
에스페란사는 종이를 빠르게 넘기다가 넌지시 물었다.
“여자랑 같이 있다는 얘기는 없었대요?”
“이상한 머리 색을 한 여자가 같이 포착된 적이 한 번 있습니다. 빨간 잉크로 표시된 것이 여자와 함께 목격된 장소일 겁니다.”
헌터들은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다. 돈이 들긴 했지만, 그것도 기본적으론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이 여자가 다리아가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립 탐정은 사이러스를 제대로 찾은 셈이다.
사립 탐정이 보내 준 정보를 읽어 보면 사이러스는 스털링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였지만 다리아와 함께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서로 연락은 되는 모양이고. 에스페란사는 다리아와의 접촉을 서술해 놓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었다.
불륜 상대?
“아, 불륜 전문 탐정이라서……?”
그 말에 알라스테어가 머쓱한 얼굴로 눈을 피했다. 픽 웃은 에스페란사가 다시 종이에 집중했다.
다음 페이지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당시에 사이러스를 미행하는 사람은 이 사립 탐정 외에도 몇 명 더 있었던 같다. 그런데 미행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기색이 있었다…….
이 사립 탐정까지 그걸 알 정도면 사이러스가 제법 티를 낸 거겠지. 아마 다른 미행자 측에 경고하려는 의도였을 테니 사립 탐정이 위험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행당하는 걸 들키면서 조사한 결과라니, 양에 비해 질이 심히 부실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 조사 결과를 기준으로 보면, 사이러스는 정찰선의 출항을 기다리는 듯 주기적으로 항구 근처 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종이를 덮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천천히, 하나씩, 퍼즐이 모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독히 느리게 느껴졌다.
* * *
시더의 일주일짜리 의뢰는 이틀을 당겨 5일 만에 끝내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말이 5일이지, 에스페란사가 처음 시더의 편지를 받았을 때가 이미 이틀째였으므로 남은 시간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윽고 예정일로부터 하루 전.
에스페란사는 알라스테어에게 부탁해 얻은 사격장에서 훈련을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양손에 들린 세검이 날카로운 빛을 내며 휘었다. 찌르고, 몸을 돌리는 반동으로 길게 난 상처를 손목 힘으로 비틀며, 착지. 일련의 동작들이 매끄러웠다. 땅에 발을 디딘 에스페란사는 지금은 쓰고 있지 않은 날개의 무게를 고려하며 다시 한 번 도약했다.
상황이 아주 공교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더가 스털링에 있다는 사실은 에스페란사의 계획에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다.
약점이 늘어나는 것은 결코 반길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차라리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닿는, 같은 도시에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편도 20분 거리에 있어도 얼굴도 못 보기는 하지만.
그래도 편지는 있으니까.
아무런 소식도 없었던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시더의 편지는 솔직했고, 원망이나 배신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구름 낀 하늘이 개듯, 억지로 덮은 냉랭함에 가려져 있던 애정이 불시에 툭, 툭, 튀어나왔다.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만.
일주일짜리 의뢰를 닷새 만에 끝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더 클라이번이 자기 입으로 하겠다고 한 일을 못 할 리는 없다. 예정대로라면 바로 내일이 그가 의뢰받은 일을 마치는 날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이르면 내일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과연 현실의 시더가 현실의 에스페란사에게도 다정할까? 서로 마주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쉽게 애정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외면당하는 건 달갑지 않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스스로 휘두른 칼에 상처를 입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버리곤 다시 훈련에 몰두했다.
점심때쯤 사격장에서 돌아온 에스페란사는 호텔 1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밀런을 발견했다. 이젠 이 광경이 사뭇 익숙하게 느껴졌다.
“일찍 왔네. 시더가 이 시간에 일어났을 리가…….”
“없지요. 새벽에 적어 놓으신 겁니다.”
“그렇지. 네가 일찍 깨울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이게 익숙해져서요.”
저런.
뭐가 좋은 거라고. 에스페란사는 혀를 차며 편지를 뜯었다.
아, 그러시구나. 에스페란사는 턱을 괴며 마치 시더가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한 것처럼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습관적인 오만에 늘 그러해 왔듯이.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 내리는 동안 뚱하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제일 아래 덧붙여진 내용을 읽기 전까지는.
‘당신 주려고 그린 게 아니었다고.’
어떤 얼굴로 추신을 썼을지 짐작이 갔다.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럴 때만큼은 당장 시더와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어?”
이번 편지는 한 장이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뒷장을 확인했다. 느긋하게 적어 내려간 듯한 앞장과 달리 뒷장에는 글씨가 없었다.
대신 그림이 있었다.
찻물을 들인 것처럼 부드러운 색의 편지지 위에, 펜으로 슥슥 그린 여자가 미소 짓고 있었다. 색 없는 슈미즈 드레스는 발목 위에서 흔들거렸고 팔목을 덮고 허리까지 늘어뜨린 짙은 머리칼 위에서 빛이 미끄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