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사이러스가 에스페란사를 상대하는 사이 던전을 다시 만들려던 다리아는 이를 갈았다.
무지막지한 게, 이유도 없이 앞길을 막는다. 다리아는 욕을 뱉으며 에스페란사의 무릎을 걷어찼다. 밀려났던 에스페란사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다시 부딪혀 왔다.
얽히고설킨 근접전이 이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건 다리아였다. 그들의 목표에는 시간제한이 있었으므로. 다리아는 해상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곳을 다급히 힐끔거렸다.
에스페란사가 무릎으로 다리아의 손목을 걷어차자, 다리아는 억누른 비명과 함께 휘청거렸다. 땀에 젖은 손바닥 사이에서 황금 발톱이 미끄러졌다.
잡아야 해.
에스페란사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황금 발톱이 떨어지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잡는 데 성공한 것은 다리아 쪽이었다. 에스페란사의 손은 허공을 움켜쥐는 데 그쳤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얼른 손을 물렸지만 온몸을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다리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너, 이걸 탐내는구나?”
뼈아픈 실수였다. 정보의 불균형은 에스페란사의 큰 무기였는데. 다리아가 입술을 히죽 올렸다.
“그래, 안면도 없는 게 왜 갑자기 방해질인가 했네. 이제야 이해가 가.”
에스페란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하지 않은 게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정보력의 우위가 에스페란사의 강점이었는데, 상대에게 목적을 들켜 버리다니. 이렇게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꿈도 꾸지 마, 빌어먹을 년.”
사납게 중얼거린 다리아가 몸을 일으키는 사이러스를 발견하고 입꼬리를 비쭉 올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듯이. 난폭하게 뻗은 다리가 멈칫한 에스페란사를 걷어참과 동시에 다시 군함 위의 상공으로 향했다.
거센 힘에 밀려 추락하던 에스페란사는 머리칼 끝이 바다에 닿기 직전에 날개를 펼쳤다. 금속 날개 끝이 허공을 긁어 추락을 멈추었다. 까마득한 위에서 에스페란사를 내려다보던 다리아는 황금 발톱을 들고 허공을 길게 그었다. 거대한 맹수의 발톱처럼 시공간을 가르며 바다 한편에 벽을 세웠다.
다리아의 손이 느리게, 재듯이 하늘 위로 둘러 반대편 바다를 향해 움직였다. 그 손길을 따라 투명한 벽이 하늘을 감쌌다.
에스페란사는 숨을 짧게 내쉬었다. 던전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사람의 힘으로, 저런 것을……. 커다란 스푼으로 떠내는 것처럼 공간이 유리되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하면서도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기분.
막아야 한다.
다시 위로 도약하려던 에스페란사에게 사이러스가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피하려고 해도 체격 차이가 워낙 커서 근접전에선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패턴이 뻔한 사이러스의 공격은 한 번도 먹히지 않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가고 있었다.
점점 초조해졌다. 입술이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 둘은 던전을 열고 이대로 돌아가 버려도 그만이다. 던전이 열리면 불리해지는 건 에스페란사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다음 순간,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의 검을 막으려던 손을 벌렸다. 허점이 드러남과 동시에 사이러스의 검날이 에스페란사의 옆구리에 스쳤다.
‘정말 들어갔어?’
사이러스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에스페란사를 올려다보았다. 무의식적으로, 공격이 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스페란사의 시선은 이미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벌렸던 손이 뒤로 젖혀졌다가 그대로 세검을 움켜쥐고 던졌다. 새파란 마력에 감싸여 다트처럼 날아간 검날이 다리아의 손목을 찌르는 모습이, 사이러스의 시야를 헤집었다.
말도 안 돼.
다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멀지 않은 바다에서 군함들 간에 대포가 오가는 살벌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그 비명은 하늘을 찢어 놓을 것 같이 사방을 울렸다.
하지만 그다음에 일어난 일이야말로 진짜 재앙이었다.
하늘을 감싼 투명한 막이 끝없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력 공급을 끊을 시점을 놓쳐 버린 것이다. 황금 발톱은 다리아의 몸 자체를 거대한 마정석으로 여기는 듯 마력을 거침없이 빨아들였다. 다리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흡혈귀에게 피가 빨리는 것만 같았다. 조절할 수가 없었다. 사이러스가 외쳤다.
“뭐 하는 거야? 그만해!”
“안 돼, 안 멈춰져!”
예상치 못한 재난에 에스페란사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뻣뻣이 굳었다. 던전이, 전장과 일대의 바다만을 감쌌던 던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멀리, 더 멀리…… 육지까지. 얕은 바다를 기어오르며 몸을 뒤트는 괴물의 모습이 못 박힌 듯 시야를 장악했다.
육지엔 시더가 있다.
애니와 코델리아도, 알라스테어와 밀런도, 알라스테어의 친척들과 애니의 가족들도.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설마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던전 범위에 들어온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 설마 던전이 그 정도로 넓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제발, 제발.
“됐다!”
황금 발톱을 든 손을 끊어지도록 휘둘러 겨우 마력을 끊어 낸 다리아가 외쳤다. 마력이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손바닥 안에 닿는 열기에 피부가 얼얼했다. 어지러울 지경이다. 힘이 빠진 몸을 겨우 바로 세운 다리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력은 부족하고, 적은 가까웠다. 싸우면 반드시 진다. 에스페란사는 허공에서 다리아를 향해 총을 겨냥하고 있었다. 저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다리아의 목을 꿰뚫는 데 얼마나 걸릴까? 분명 순식간일 것이다. 그리고 다리아는 지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상태에 손목 부상까지 있었다.
대적자들의 시선이 얽혀 들었다.
저 여자의 목적을 알았으니, 적어도 아예 실패한 건 아니다. 지금 죽지만 않는다면, 이 자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이번 일은, 어떻게든 수습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다리아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함께해 온 동생은 짧은 끄덕임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에스페란사의 등 뒤로 접근한 사이러스가 노출된 등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에스페란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검을 피하며 총을 쏘았다.
피하겠어. 방아쇠를 당기며 실패를 예감한 에스페란사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사이러스는 피하는 대신 마력탄을 마주 보고 허공을 박찼다.
순식간이었다. 새파란 마력의 선이 사이러스의 어깨를 관통했고, 사이러스는 어깨를 내주며 에스페란사를 지나쳐 다리아가 있는 높은 하늘로 이동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어깨를 쥔 사이러스가 다리아의 옆에 서자, 두 사람은 순식간에 공간을 마저 찢어 빠져나갔다.
그야말로 준 대로 돌려받은 격이다. 광활한 하늘 위에 홀로 남은 에스페란사가 숨을 깊이 내쉬었다.
모든 게 채 10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혼이 나갈 것 같았지만, 쉴 틈이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총구를 내렸다. 초점이 어긋난 시선이 알림창을 읽어 내렸다.
[던전 발생!]유형: 바다
등급: A
위험도: C
헌터님, 행운을 빕니다!
발밑에서부터 거대한 바다 괴물들이 바다를 헤치고 파도를 일으키며 난폭한 괴성을 질러댔다. 귀가 먹먹할 정도였지만 에스페란사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차르륵, 금속 날개가 펼쳐졌다. 한 쌍의 날개가 항구가 보일 때까지 바다 위를 가로질렀다. 망원경 렌즈 너머에는 선착장에 줄지어 선 배들, 항구 노동자들과 선원들, 장교들, 주변 가게 점원들……그리고 그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해변으로 향하는 바다 위의 괴물들까지 담겼다.
총을 높게 들어 마력을 길게 쏘았다.
새파란 선으로 화한 마력은 순식간에 바다를 지나 항구를 가로질러 가다가 무형의 벽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에스페란사는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안도감이 쏟아졌다.
던전의 범위는 지금껏 경험해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넓지만, 다행히 육지 안으로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선착장, 광장, 해군 기지.’
시더는 지금쯤 적어도 호텔에서 코델리아와 애니를 만났을 것이다. 그들이 에스페란사의 지시를 잘 따라 줬다면 아마 스털링 밖에 있을 테고, 호텔에만 있더라도 적어도 던전 범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제야 멈춰 있던 몸의 기능이 삐걱삐걱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총을 고쳐 쥐며 머나먼 항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들끼리의 전투를 멈추고 거대한 바다 괴물과의 싸움을 시작한 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육지 사람들은 피할 데가 있으니까.’
망설였지만, 에스페란사는 결국 몸을 돌렸다. 수중 던전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바다 괴물이니 육지의 피해가 크지는 않을 것이다. 해군 기지도 있으니 어떻게든 피하고 대응할 방법을 찾겠지.
‘지원군도 불러 놨고.’
제때에만 와 준다면 말이지.
온 세상에 에스페란사 한 사람만이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는 것이 맞았다. 부디 이 선택이 옳기를 바라면서, 에스페란사는 바다 괴물들이 엉켜 있는 전장에 몸을 던졌다.
해상의 던전. 수많은 던전을 경험한 에스페란사였지만, 가장 선호하지 않는 타입 중 하나였다.
[수중 던전에서는 화기의 사용이 제한됩니다. 모든 화기류의 공격력이 40%, 치명타 피해가 60%, 명중률이 20% 감소합니다.]기다란 장총이 인벤토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에스페란사의 오른손은 허공에서 거대한 낫을 꺼냈다.
그래도 별수 없다. 부딪히는 것밖엔.
* * *
“로드 에이번데일이 늦네요.”
로비에 앉아 있던 코델리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니는 눈만 힐끔 들었다 다시 레이스에 집중했다. 코델리아가 저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저러다 또 앉겠지.
그러나 이번엔 아니었다. 코델리아는 일어선 채 단호히 말했다.
“역으로 가요.”
“지금요? 하지만 백작님께서…….”
“이러다 기차 시간에 늦겠어요. 호텔에 메모를 남기죠. 로드 에이번데일은 시간 맞춰 역으로 바로 오시라고.”
애니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기에겐 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아가씨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면야.”
“테이트 양의 가족들은요?”
“이미 역으로 가 있을 거예요. 가까운 도시의 친척 집에 머물기로 했어요.”
“잘됐네요.”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라스테어를 향해 눈짓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알라스테어가 짐을 가지고 나가자, 마부가 짐을 증기 마차에 실었다.
“나도 웬만하면 기다리고 싶지만, 우린 우리의 안전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총 한 자루 가졌다고 그 괴물들과 싸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로드 에이번데일과는 다르죠.”
호텔이 멀어지는 것을 보다 못한 코델리아가 마차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아가씨, 누구도 아가씨를 비난하지 않았어요.”
“알아요. 그냥 내가, 내가 좀 그래요.”
희미하게 웃은 코델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웃었다.
“……차라리 늑장 부리느라 늦는 거라면 좋겠네요.”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시더 클라이번이 무사히 호텔에 도착하기만 했다면, 설령 기차 하나를 놓치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했다.
“왜 이렇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지? 마차는 또 왜 이렇게 느린 거야. 내가 성격이 급한 건가?”
“아니요. 마차가 늦는 게 맞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알라스테어는 코델리아가 닫았던 창문을 열어 커다란 몸을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밖에 무슨 일 있나?”
“예, 백작님! 별건 아닙니다만, 도로가 통제돼서 좀 막힙니다.”
하필 이 시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