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8
18화
10 테롯이면 어린아이가 혼자 먹을 검은 빵 하나를 살 수 있다. 만 테롯은 증기 마차 마부가 한 달을 쉬지 않고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이다. 5만 테롯은 숙련된 재단사가 만든 드레스 한 벌 값이다.
현실의 물가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게임 내 결제액 기준으로는 따져볼 수 있다. 5만 테롯을 현금으로 살 수 있는 재화인 캐시로 환산하면 500 캐시. 500 캐시는 약 500만 원. 이벤트 때, 쿠폰을 끼워서 사면 300만 원 안팎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천 원짜리 쿠폰들로 나눠서 가장 알뜰하게 사면 250만 원 내외로 떨어질 수도.
에스페란사는 그렇게 큰 금액을 결제한 적은 없고, 테롯은 게임 내에서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물가와 대응해 보면 절대 적은 돈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같은 액수의 잔금도 치러야 할 터였다.
그러나 고인물은 돈이 많다. 에스페란사는 고액권을 쏟아 내면서도 표정 하나 변화가 없었다.
“와아…….”
잭이 군침을 흘린다. 하지만 저 애는 이 돈에 손댈 수 없을 것이다. 설령 훔치는 데 성공하더라도, 백 테롯도 아니고 천 테롯짜리 고액권을 가지고 있어 봤자 곱게 빼앗기면 다행일 테니.
아무 일도 없이 나왔다. 달라진 것은 가벼워진 파우치와 손에 들린 기묘한 장치뿐. 광택을 내는 주사위 같이 생긴 것은 위에 둥근 홈이 파여 있는 것 말고는 별 특징이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그것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아이템: 정보상의 수신기]―설명: 정보상이 준 수신기. 어딘가 수상하다.
아무 설명도 없이 그게 끝이었다. 도움이 안 된다.
“저, 저는 이제 돌아가도…….”
“날 데리고 바깥까지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저는 집에 굶고 있는 동생이 있어요! 제가 가지 않으면…….”
“잭, 거짓말하지 마.”
소년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얼굴은 신사 숙녀들 꼬랑지에 붙어 따라다니는 인형 같았다. 그것들은 분칠을 해 놓아도 어찌나 징그럽게 생겼는지, 그걸 예쁘다고 달고 다니는 부자들 마음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 여자는 꼭 그것처럼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날 데려다줘.”
“……네.”
정보상에게 갈 때보다도 조용히, 그들은 얼터 지구에서 그래도 가장 크고 안전한 길들을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에스페란사는 잭을 물끄러미 보았다. 오늘은 공쳤다는 낭패감이 역력한데도, 두려운 에스페란사 앞에서 그것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소년의 얼굴. 그러나 또 치기를 완전히 감추지도 못한다. 가볍게 혀를 찼다.
“따라와.”
에스페란사는 근처의 빵집으로 들어갔다. 빵집 주인은 꼬질꼬질한 잭이 들어올 때 눈을 부라렸다가, 시커먼 후드를 쓴 에스페란사가 눈짓을 하자 입을 꾹 다물고 못 본 척했다.
“네가 먹고 싶은 것, 다 골라.”
“예, 예?”
“먹고 들어가면 되잖아? 돈은 빼앗아도 먹던 빵까지 빼앗진 않겠지.”
정확히 그런 곳이었으나, 잭은 말하지 않았다. 말마따나 다 먹어 치우면 되니까.
얼터 지구 근처의 빵집이니 대단한 빵을 파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소매치기 소년이 하루 끼니로 때우는 시커먼 빵이나 멀건 오트밀에 비하면 천국의 만찬이다. 기름진 빵을 정신없이 고르는 꼬마를 바라보던 에스페란사가 한숨지었다.
‘신문팔이 잭’에 비하면 똑똑하지도 않고, 겁도 많다. 건달들 비위는 잘 맞추는 편인지 그들의 보호 아래 살고 있지만 그것도 몇 년 안 갈 것이다. 아이는 일용직을 전전하거나, 범죄자들의 소굴에 기어 들어가겠지. 그래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나인 호더에 사는, 잭보다 덜 불행한 사람들은 모두 그의 불행에 지분이 있다. 여왕부터 시더 클라이번을 거쳐 이 빵집 주인까지도.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그 책임에서 가장 자유로운 에스페란사조차도.
한 아이의 빈곤은, 사회 전부의 책임이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에스페란사의 명령에 따라 무른 과일이 든 빵과 갈아 만든 고기를 넣은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던 잭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고작 먹을 걸 줬다고 아이의 철옹성 같던 경계는 반쯤 허물어진 상태였다.
“너 보통 낮엔 어디에 있니?”
“그냥 돌아다녀요. 얼터 지구에 사는 형들이랑. 가끔은 조금 더 나와서 상점가를 돌아다니고.”
건달들 시중을 들거나 소매치기를 한단 말이다.
“나랑 약속을 좀 하자. 내가 여기 돈을 맡기고 가면, 매일 저녁에 빵 한 개씩을 먹을 수 있게 해 줄게. 딱 한 개만이고, 여기서 먹고 나가야 해.”
빵집 주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게 보였다. 자기랑은 합의한 적 없으니까 당연하지. 그건 알아서 보상해 줄 참이다.
“대신, 내가 이 빵집에 뭔가 맡기고 가면…… 너 글은 읽을 줄 아니?”
“읽을 줄 알아요.”
아이가 부루퉁히 대답했다. 읽을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를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빵집 주인을 흘끔 보았다.
아냐, 믿을 만하지 않아.
“그럼 때와 시를 정해서 만나도록 하자. 내가 시간을 정해서 이 빵집에 알릴 테니까, 넌 그때 맞춰서 여기로 나와.”
에스페란사는 같은 말을 빵집 주인에게도 반복했다.
“한 달 값으로 만 테롯을 먼저 주지. 자네가 잘해 준다면, 앞으로도 맡길 수 있을 거야. 매일 저녁, 빵 한 개. 더도 덜도 말고, 아이가 고르는 것은 무엇이든 한 개를 주고 가게 안에서 먹을 수 있게 해.”
이런 작은 빵집에서 만 테롯은 한 달 매출에 버금가는 돈이었다. 하루에 빵 하나, 기껏해야 빵 30개의 값으로는 차고 넘쳤다.
“잘해 줄 거라고 믿네. 말했듯, 언제든 내가 와서 확인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하게.”
“이를 말씀이십니까, 아가씨. 걱정 마십시오. 저 꼬마 놈은 제가 알아서 잘 먹이겠습니다.”
“절대 빵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해. 돈도 주지 말고. 빵 하나만이야. ……일을 시키고 돈을 주는 건 마음대로 하고.”
빵집 주인은 이해했다. 아이를 고용하고 지금 준 돈에서 얼마간을 떼어 주라는 말이다. 아주 조금만. 그걸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다음번에도 이런 행운이 떨어질지가 결정되겠지.
누추한 소년은 빵가루가 묻은 손을 빨며 에스페란사를 올려다보았다.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쉬었다. 이 나인 호더엔 이런 아이가 수도 없이 많았다. 우연히 이름이 ‘잭’이라서, 눈에 띄어서 배곯는 것을 면하게 된 아이는 한 명뿐이다.
에스페란사는 나인 호더의 빈곤을 구제할 능력도, 그럴 의지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에스페란사는 잭을 이끌고 빵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까부터 의심하던 점을 캐물었다.
“너, 그 정보상한테 돈 받았지?”
헤실헤실 웃으며 인사하고 가려던 잭이 삐걱거리며 돌아보았다.
“거기서 돈 받고 날 데리고 간 거지?”
“그, 그건,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래도 정보상 중엔 제일 착해요.”
허이구. 제일 위험한 사람에게 데려가 줘 놓고 말은 잘한다.
‘고객 걱정은 없을 사람인데, 왜 굳이 이런 꼬마에게 돈까지 줘 가며 나를 끌어들였을까?’
에스페란사가 그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그가 에스페란사를 부른 것이다. 에스페란사가 잭을 만난 걸 알고, 이 애에게 돈을 줘 가며 끌어들였다. 그자의 모든 것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형들한텐 말 안 하시면 안 될까요?”
정보상과 건달들은 사이가 안 좋은가 보다. 그래 보였다. ‘선생’은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와 수상한 행태만 빼면 그야말로 예의 바르고 단정한 청년이다. 눈에 보이는 힘을 숭상하는 건달들이 혐오할 법한 종류의.
“너도 내 비밀을 지켜 준다면야.”
“비밀, 무슨 비밀이요?”
“내가 뭘 의뢰했는지 봤잖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럼 나도 약속할게.”
“약속할게요!”
소년은 방도가 없었다. 대답을 들은 에스페란사는 라이딩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인파에 섞인 여자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짜 귀신 아니겠지…….”
홀린 것 같은 기분이다. 잭은 빵집으로 슬쩍 들어가 주인에게 아까 그 사람을 기억하냐고 물어보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일까지 썩 꺼지라는 대답을 들었다.
“내일까지. 내일까지래!”
소년은 겅중겅중 춤을 추며 초라한 빈민굴로 기어들어 갔다. 내일은 그에게도 먹을 빵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부드러운 빵. 안에 과일이나 고기가 든 빵이.
* * *
환하게 빛이 들어오는 서재에서 시더 클라이번은 설계도를 펜 끝으로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집중이 잘 되지 않는 듯 희게 빛나는 금빛 머리칼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의자에 몸을 묻고 고개를 젖혔다 다시 펜을 잡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
유독 집중이 안 되는 날이었다.
에스페란사가 그의 집에 들이닥친 날부터 머릿속을 휘저어놓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에스페란사의 탓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에스페란사가 몰고 온 고민거리인 것도 맞았다.
그런데 그 원흉이 오늘 무려 빈민가로 향했다. 불결하고,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자들로 가득한 얼터 지구로. 그러니 설계도가 아니라 뭘 펼쳐 놨어도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에스페란사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장총을 어깨에 툭 얹고는 보지도 않고 쏘아서 전부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어 버리는 전투력을 생각해 보면, 나인 호더 전체가 하루 동안 쓸 만한 마력을 담고 있는 그 작은 몸을 생각해 보면, 어디서 군대라도 몰려오지 않는 이상 당할 리가 없다.
그래 봤자 뒷골목 건달들. 그들이 가진 시답잖은 날붙이나 화약 무기 같은 것으론 에스페란사를 해칠 수 없다. 마법 무기에 대해서는, 본인이 가진 게 더 훌륭하니…….
거기까지 생각한 시더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 에스페란사가 가진 총기는 꽤 훌륭하다. 하지만 13년 후의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솔직히 아쉬운 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고작 그게? 그 정도로 잘 쏘는 사람에게는 더 훌륭한 무기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예를 들면 ‘희대의 천재 마도 공학자’인 시더 클라이번이 직접 제작한 총기 같은 것 말이다.
“총을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내가 더 잘 만들겠지. 시더는 가볍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보다 머릿속이 훨씬 깨끗해졌다. 어차피 오늘 다른 일을 하기는 글렀으니 가볍게 모양이나 잡아 봐야겠다. 이 구실로 잘 구슬려 보면 에스페란사에게서 피를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반은 총 만드는 데 쓰고 반은 남겨서 연구용으로 써야지.
빚어진 듯 군더더기 없는 뒷모습이 연구실 문 안쪽으로 사라지려던 순간, 서재 테라스에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뭔가가 떨어질 때 나는 소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