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흐려지는 말끝에서 무언가 잡힐 듯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묻지 않기로 했다. 사실 관심도 없었다. 대신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겉옷을 꺼냈다. 사이러스의 눈이 커졌다. 깨끗하게 다려진 옷에서는 상쾌한 냄새가 났다.
“애니가 전해달래. 옷을 빌려줬나 봐?”
“별것 아니었습니다.”
“누가 뭐래. 가 봐. 자세한 얘기는 시더가 깨어나면 하자.”
에스페란사는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홀로 남은 사이러스는 잠시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새 찢어진 부분까지 솜씨 좋게 꿰매 놓았다. 그 하녀는 저택으로 들어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을 텐데. 버린다고 생각하고 준 옷이라 이렇게 멀쩡히 돌려받을 줄은 몰랐다.
급박한 상황에 잠시 본 것뿐이라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하녀였다.
덜컹거리며 재앙의 잔해 사이를 달려가던 짐 마차.
엉망이 된 항구 쪽의 몬스터 처리를 돕고 육지로 올라오자마자 발견한 광경이었다. 바다야 에스페란사가 알아서 할 테니 그리 많지 않은 육지의 괴물들을 처리하고 던전 경험이 없는 다수의 멍청이들을 구해 내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사람이 샌드위치 속 재료들처럼 엉겨 붙은 짐 마차가 힘겹게 항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말을 타고 뒤따라오는 열 명 남짓한 군인들이 호위 병력의 전부였다.
병력을 지원한 군 상부도 짐 마차 속 사람들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저 정도뿐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병력을 지원할 바에는 구할 수 있는 쪽에 인원을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것뿐이다.
운이 좋다면 한 마리 정도는 어찌 해치우고 피해 갈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다섯 마리의 각기 다른 괴물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커다란 꼬리를 휘두르자, 짐 마차는 픽 쓰러졌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군인들이 어찌어찌 괴물들을 상대하는 사이 마차에서 기어 나왔다.
몬스터들의 무자비한 공격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흩어져 도망치다가 넘어지고 다쳤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고, 필사적인 총성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사이러스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다행히 중상자는 있어도 사망자는 없었던 순간. 그의 검이 피라미 같은 몬스터의 목을 툭 베어 버리고 끈적한 핏물을 떨어뜨렸다.
마차에서 멀리 가지 못한 사람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새파란 마력이 엉긴 검날이 무심히 검집으로 들어갔다.
애니도 거기에 있었다. 자기 아이도 아닌 어린아이를 보호하느라 다 찢긴 옷을 여미지도 못한 채, 우는 아이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사람들을 정물처럼 무심히 지켜보던 사이러스의 눈이 애니에게서 멎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에이번데일 저택에서 본 애니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에스페란사 님의 하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와 달리 이들을 진짜 사람을 대하듯 아꼈다. 측근인 하녀를 챙기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걱정을 조금 더해서 항구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해 놓았을 거라 짐작했기에 이곳에서 에스페란사의 측근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애니는 잠시 그가 누군지 재듯이 빨간 머리를 뚫어져라 보더니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사이러스는 그제야 자신이 다리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염색을 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피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던전에 갇혔어요. 아, 에스페란사 아가씨는 바다 쪽으로 가셨는데, 저희가 여기 있는 건 모르세요.”
“그렇군요. 에이번데일은 어디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중간에 엇갈린 건지, 아예 출발을 못 하신 건지. 아무래도 저희처럼 이 안에 갇히신 게 아닐까 해요.”
“찾아보겠습니다. 당신은…… 일행과 함께 벙커로 가십시오.”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애니가 몸을 일으켰다. 다친 다리를 절뚝이며 아이를 달래 손을 잡았다.
“자, 누나랑 같이 엄마한테 가자. 엄마 저기 있잖아.”
겉옷부터 블라우스까지 길게 찢겨 등이 훤히 드러난 줄은 꿈에도 모르는 듯했다. 사이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에스페란사나 그와 같은 사람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들을 너무나도 닮았다.
그는 결국 겉옷을 벗어 애니의 어깨 위에 올려주었다. 어떤 감사의 인사도 듣고 싶지 않아 빠르게 떠나는 그의 등 뒤로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발목을 휘감는 듯했다. 추를 매단 듯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충동적인 호의로 준 옷이 격렬한 전투 중에 터진 부분까지 깔끔하게 꿰매진 채로 그의 품에 돌아왔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하녀는 그가 자기 세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게임 출시 후엔, 그들이 한낱 유희 거리로 만들어 버린 세상 속에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인물이 보여 주는 순진한 호의가 속에 얹힌 것처럼 불편했다. 오직 선의로만 가득한 그 눈빛. 식용으로 키우는 개가 꼬리를 흔들면 이런 기분일까? 속이 울렁거렸다.
사이러스는 발밑에서 무너지는 커다란 건축물들, 고래 등 같은 선박들을 바라보았다. 그 영광 아래 묻힌 시체가 눈에 선했다. 이토록 미개하고 경멸스러운 세상이다.
그러나 그 하녀와 같은 눈빛들도 있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리아처럼 이 세계를 도구로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에 정을 붙이듯, 오래 가지고 논 장난감의 감정을 헤아리듯이 15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마음이 기울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리 다리아를 설득할 수 없었다 해도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시간 여행 따위에 뛰어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에스페란사에게는 미치광이 살인마라도 된 것처럼 말했지만…….
‘그건 진심은 아니었어.’
검을 고쳐 쥐며 그는 생각했다. 이 전투가 그에겐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저 연약한 점토 인형들에겐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구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단순한 이야기였다.
돌려받은 겉옷을 매만지며, 사이러스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보답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눈에 선한 이런 호의는 조금 부담스럽다. 이 세계에 더 정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에스페란사가 그러하듯 그가 이 세계의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여기게 되는 날이 온다면, 과거의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될 테니까.
사이러스는 그만 불편한 생각을 털어 냈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였다. 항구에 도착한 그는 완전히 실패로 끝난 이번 사건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가늠하며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처참하게 무너진 항구와 달리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했다. 항구를 내려다보는 그의 마음도 이윽고 잔잔해졌다.
* * *
에스페란사는 천천히, 발소리를 죽여 저택으로 돌아왔다. 해가 일찍 지는 계절에 밤 열 시의 하늘은 깜깜했고, 오늘은 모두에게 기나긴 하루였다. 복도는 고요했다.
시더가 머무는 곳은 백작과 알라스테어의 방 다음으로 좋은 방이었는데, 알라스테어가 밀런의 방을 따로 내준 덕에 에스페란사는 맘껏 시더의 침실을 드나들 수 있었다.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그걸 고려하고 방을 준 건 아니었겠지만.
잠든 시더가 깨지 않도록 응접실과 이어진 침실 문을 조심히 닫고 들어왔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순간, 눈을 의심했다.
“가까이 와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커프스단추를 채우고 있던 시더는 놀라기는커녕 태연히 말을 건넸다. 오히려 남의 방에 무단 침입한 에스페란사가 놀라 말을 잃었다. 깨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오랜만이잖아요.”
“……오랜만이라 어색한가 보죠.”
생각보다도 더 퉁명스러운 대답이 튀어 나오자, 에스페란사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시더는 매정한 대답에도 불쾌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긴, 그는 대체로 그랬다. 에스페란사가 정말 큰 거짓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날 이후로 관계가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만난 시더 클라이번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이건 좋은 징조일까?
“어색함도 이길 만큼 반갑다고 하면 안 될까요?”
여전히 에스페란사는 문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입술만 달싹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시더가 몸을 일으키려는 듯 움직였다.
“으윽!”
별안간, 외마디 신음성과 함께 고개가 푹 꺾였다. 이불 위로 금빛 머리칼이 늘어졌다. 순간 등줄기가 섬찟했다. 문에서 튕겨지듯 달려온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팔을 붙잡았다.
“아직도 아파요? 잠시만, 진통제, 진통제가…… 의사 부를까요?”
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바로 의사를 부르려 침대 옆의 설렁줄을 쥐는데, 커다란 손이 그 위를 덮었다.
잠깐만.
“……꾀병이에요?”
“이렇게 안 하면 밤새도록 안 와 줄 것 같아서요. 이왕 온 김에 앉을래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시더를 노려보던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대충 끌어와 앉았다. 정말이지 이길 수가 없다.
“많이 놀랐군요? 미안해요.”
“……됐어요, 그 정도 꾀병도 못 알아챈 내 탓이지.”
막상 앉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시더는 가만히 눈을 내리뜬 채 앉아 있었다.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설탕으로 빚은 것 같은 뺨과 목덜미를 흘끔거렸다. 목덜미 아래로 흘러내리는 한 줄기 땀방울과 가볍게 다문 입술. 속눈썹 그림자에 가려져 짙어 보이는 눈동자.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한없이 빠르게만 느껴지는 모든 것.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하죠.”
에스페란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 않자, 시더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다친 덴 괜찮아요?”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보시다시피’ 같은 소리를. 과장스럽게 눈을 찡그린 에스페란사가 붕대를 두껍게 감은 팔을 가리켰다.
“그럼 그건 뭔데요?”
“음, 별것 아닌데. 의사란 사람들이 워낙 유난스러운 데가 있어요.”
“우리 언니도 의산데, 별것 아닌데 유난 떠는 의사 본 적 없어요.”
있기야 하겠지만, 배에 구멍이 뚫렸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포션 한 병을 통째로 부었다지만, 중상은 여전히 중상이었다.
“우리는 그 포션이면 웬만한 상처는 순식간에 다 아무는데, 이쪽 사람들한텐 효과가 느리게 나타나는 것 같긴 해요. 그래도 뼈는 붙었을 텐데…….”
“그 언니는 진짜 언니인가요? 아니면 게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