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급소를 찌르고 들어온다. 그의 입에서 ‘게임 속’이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말을 잃은 에스페란사가 손을 말아 쥐었다. 시더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에스페란사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톡, 톡. 천천히, 규칙적으로. 에스페란사는 숨을 급히 들이켜며 말했다.
“진짜예요. ……그런 것 갖고 거짓말한 적 없어요.”
“어느 쪽이라도 거짓말은 아니잖아요?”
다소 심술궂게 말하기는 했으나, 시더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조금 더 편안해졌다.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무릎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치맛자락 아래로 발끝이 조금 드러났다. 표정 없는 얼굴과 달리 둥글게 말린 발끝에서 생각이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그런 걸로 속인 적은 없어요.”
“그래요.”
믿지 않는 걸까? 그러나 늘 그렇듯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히는 초능력 따윈 없었다. 시더 클라이번은 남의 감정을 잘도 꿰뚫어 보지만.
그러니 이번에도 솔직해지는 것 말곤 다른 길이 없다.
“내 얘기를 할 때는, 언제나 정말 내 얘기였어요. 내 경험, 내 감정. 내가 어디에 있든. 진실하지는 않았지만,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없어요.”
시더는 몸을 조금 기울여 눈을 깊이 맞추었다. 미소를 머금은 입가가 살짝 뒤틀렸다.
어쩌면 오랜만에 다시 만난 날에, 괴물과 피와 땀으로 정신없이 지나간 날에 이런 대화를 하는 건 부적절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어영부영 넘어가면 또 엉켜 버린 채로 대충 묻어 두게 될 것이다. 그게 편하니까.
하지만 또 한 번 상처가 곪도록 둘 것인가? 그건 현명하지 못하다.
“그럼 당신이 하고 싶은 얘기 대신 당신 얘기를 해 볼까요.”
“……무슨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더는 답을 알고 있었다. 아주 많이 곱씹어 보았으니까. 그들이 이런 대화를 하게 될 그 언젠가를 기다리며.
“본질부터 얘기해야죠. 숙녀분, 이름이 뭐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멈칫했던 에스페란사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시더는 소리 없이 벌어지는 입술 모양을 따라 했다. 낯설었지만,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그 이름의 뜻을 따와서 지은 이름이에요. 가짜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난 당신이 그 이름을 불러 주는 게 좋았어요.”
그건 진심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7년이나 써서 그런지 진짜 이름과 다를 바 없이, 음과 음의 조합이라기보다는 그저 ‘내 이름’으로 들렸다. 하지만 시더가 부를 때는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보다도 그 은근한 어조와 약간 낮아지는 목소리, 매끄럽게 떨어지는 끝에 신경을 빼앗겼다.
단지 부르는 것만으로 이름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을 생에 몇 명이나 만날 수 있을까? 다음이 있기나 할까?
저울이 기운다. 삐걱대며 흔들리다가, 천천히…….
“좋아요, ‘에스페란사’.”
어깨가 조금 경직됐다. 에스페란사는 다급히 머릿속의 저울을 지워 냈다.
“일단 그런 걸로 하죠. 아직 물어볼 건 많으니까.”
“취조당하는 기분이에요.”
시더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한쪽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런 셈이네요. 이리 올래요?”
“내가 왜요?”
의자에 더 깊숙이 앉은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저었다.
“내 취조가 끝나면 당신도 얼마든지 날 취조하게 해 줄게요.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
“물론 많죠! 던바틴 공작 조카는 뭐예요?”
“아, 그것부터?”
“그것부터.”
시더는 난감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진지한 얼굴과는 달리 뱃속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겁한 에스페란사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당신 지금 환자예요! 그러다 상처 찢어진다고요!”
결국 에스페란사는 손바닥으로 시더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으로 주는 경고는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는 에스페란사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고 배에 뺨을 묻은 채로 못 참은 웃음을 마저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당신이 반가워서요.”
“……시끄러워요.”
시더는 그대로 에스페란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몸을 뒤로 눕혔다. 한 순간 중심을 잃은 에스페란사는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넘어가다가 가까스로 시더에게 닿지 않도록 양팔로 침대를 짚었다. 세상에, 환자를 깔고 누울 뻔했다.
“미쳤어요?”
“이대로 있겠다고 약속하면 던바틴 공작의 조카 이야기부터 할게요.”
“이대로 안 있으면요?”
“당신 이야기부터 끝내는 거죠. 운이 좋으면 해 뜨기 전에는 끝나겠네요.”
에스페란사는 잠시 망설였다. 이 뻔한 수작에 걸려드느냐 마느냐.
“……아픈 건 아니죠?”
“당신 무게도 못 견딜 것처럼 보여요?”
“견디기야 하겠죠. 배에 구멍이 없으면.”
“없어요. 병 하나를 통째로 들이부었잖아요.”
“그게 제대로 들었으면 그 붕대도 필요 없었어요. 괜히 잘못되느니…….”
“당신이 움직이지만 않으면 괜찮을걸요.”
시더는 손바닥으로 에스페란사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눌렀다. 셔츠 깃에 파묻힌 머리를 차마 힘줘서 들지도 못하고 끙끙대던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시더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 나으면 두고 봐요.”
대답도 없었다. 얄밉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시더 클라이번이 얄미운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얄밉지 않게 굴 때가 문제였지. 이를테면, ‘시공간 기계, 만들어 줄게요’ 하고 말했을 때라든지.
“던바틴 공작의 조카 얘기는 정말 별것 아니에요.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내 결백을 증명해 주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 일은…….”
싱거울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짐짓 늘여 말하던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콧등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졸려요?”
“조금?”
“그럼 이번엔 당신이 말해 볼래요? 이 예쁜 얼굴은 당신 건가요?”
도무지 방심할 틈이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조금 방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스페란사는 화풀이하듯 시더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다 진짜는 아니죠. 그게, 개인 정보 문제가 있어서.”
자세한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주 다르지는 않아요. 잘 바꾸는 것도 재능이 필요하니까…….”
“사실 별로 상관없어요.”
“아, 네.”
그럼 왜 물어본 거람. 에스페란사가 불만을 겨우 삼킨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웃고 있었는데. 빛이 고인 눈동자는 금세 냉소를 담고 기울어졌다.
“이름도 상관없고 얼굴도 상관없고…….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제일 큰 문제죠.”
손끝에 부드러운 머리칼을 감은 시더가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 소리가 날것 그대로 들렸다. 소리일 뿐인데, 에스페란사는 그 안에서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날 속여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 하루가 채 지나기 전부터, 난 나도 모르게 당신을 용서해도 괜찮을 이유를 찾고 있었단 말이에요. 끔찍하지 않아요?”
냉소는 에스페란사가 아니라 그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다 용서하고, 잊어버리고, 속 좋게 당신이 돌아갈 때까지 끌어안고 연애 놀음이나 할까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죠. 그러고 나면 뭐가 남겠어요? 당신이 짜 놓은 가당찮은 미래 계획?”
“그래서 여기로 온 건가요?”
대답이 없었지만, 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성공했어요?”
“아뇨.”
그 이후로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감은 눈꺼풀이 떨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기계를 만들어 주겠다고 한 거였어.’
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분명 그랬을 텐데, 조금도 기쁘지 않다. 오히려 속에 바위를 얹은 듯한 불편함만 더해졌다.
* * *
항구 일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 재난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화창한 아침. 애니는 에스페란사의 머리를 리본으로 묶어 주며 눈치를 살폈다.
“식사 자리엔 안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체할 것 같긴 해. 그래도 손님이 잔뜩 들어왔는데 한 명도 식사 자리에 안 나타나면 좀 그렇잖아.”
에스페란사는 느릿느릿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기가 죽을 만큼 화려한 식당에 공작과 알라스테어가 앉아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안내된 자리에 앉았다.
“숙녀분이 미스 헌터인가? 아들 녀석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간단히 나온 아침 식사를 입에 욱여넣기 시작한 에스페란사가 알라스테어를 흘끔 바라보았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걸 보니, 그냥 의례적인 말인 모양이다. 물론 공작은 에스페란사 헌터에 대해서 기본적인 조사를 끝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조카를 붙였겠지.
입술 끝이 비틀렸다.
‘내가 돌아간 다음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내가 있을 땐 내 거란 말이야.’
“그러셨겠죠.”
배를 두드리고 수염을 쓰다듬는 귀족 나리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익숙했다. 내막을 대충 알게 된 지금 생각하면 그리 자랑스러운 과거는 아니지만. 대화가 끊기도록 단답을 내놓은 에스페란사의 어조는 심드렁했다. 공작의 얼굴 근육이 조금 굳었다.
“파오룬 태생이라고 했던가? 혹여 그쪽 피가 섞인 것은 아닌가?”
무례하지만 예상 가능한 질문이었다. 여기서 굳이 그들의 오래된 설정을 들먹여 가며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면 식탁에서 내쫓으실 건가요? 밑에서 개밥그릇이나 핥으라고?”
나이프가 접시를 긁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공작부터 하인들까지, 십수 쌍의 시선이 에스페란사를 향했다. 알라스테어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미스 헌터는 폐하를 알현하고 인정받은 숙녀입니다.”
“잘 아는 모양이구나.”
“레이디 코델리아가 각별히 아끼는 친구분이니까요. 저와 레이디 코델리아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의미 없이 잔을 돌리던 공작이 알라스테어를 향해 눈을 찡그렸다.
“생명의 은인이라……. 이거 실례했군.”
그다지 믿는 것 같진 않았다. 공작은 자기 영지에서 재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전용 비행선을 띄워 찾아올 만큼 충실한 영주였지만, 사고방식은 고리타분 그 자체다. 이 시대에 혼인 동맹 따위를 고려하는 것부터가 그 방증이다.
알라스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공작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내일 아침 식사는 꼼짝없이 아버지와 둘만 하게 생겼다. 손님이 셋인데 그중 둘이 집주인 꼴을 보기 싫어서 식사를 거부한다니,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유일하게 내려온 손님까지 쫓아낼 판이다.
“마벨우드 일을 기억하시잖습니까.”
일부러 쐐기를 박는 말을 하자,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벨우드.”
공작은 이윽고 무언가 알아낸 것처럼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알아냈는지는 알려 주지 않고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