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레이디 코델리아는 아직이냐?”
“아프시답니다.”
물론 코델리아 마벨우드는 멀쩡하다 못해 쌩쌩했다.
“얼굴 한 번 못 보고 돌아가겠군.”
“아버지께서 워낙 공사다망하시니, 숙녀분도 이해하실 겁니다.”
마상용 랜스가 부딪히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렸다. 식기를 내려놓았을 때, 멀리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팡이 짚는 소리. 발을 끄는 듯 느리지만, 단단한 구두를 신은 발소리가 지팡이 소리와 엇갈렸다. 에스페란사는 몸을 일으켰다.
“왜 그러십니까?”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식당 문이 열렸다. 서 있는 에스페란사와 눈이 마주친 시더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눈만 접어 웃었다.
“좋은 아침이죠?”
“당신이 여기 내려오는 걸 보기 전까진 좋은 아침이었어요.”
환자면 얌전히 하인들이 가져다주는 환자식이나 먹을 것이지!
“에이번데일. 여기서 보는군.”
공작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서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번 던전으로 해적들의 피해도 만만찮을 테고, 결국 광산 국유화 계획도 백지화될 것이니만큼 시더는 최소한의 예의만 차리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자,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에나 보겠구나, 알라스테어.”
“시청에 가십니까?”
“이런 재난엔 후원금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던바틴에 후원금 나올 데가 달리 어디 있겠어.”
공작이 몸을 휙 돌려 나갔다. 꼬장꼬장한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집주인이 사라지자 모두가 편해졌다. 알라스테어는 반도 못 먹고 식어 버린 음식들을 다시 해치우기 시작했다. 에스페란사는 험악한 얼굴로 시더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 느글거리는 걸 먹겠다고요? 미쳤나 봐. 당신 어제 배에 구멍 뚫렸던 사람이라고요.”
“지금은 멀쩡해요.”
“아, 멀쩡한지 아닌지는 봐야 아는 거고!”
포션이 제대로 들었다면 멀쩡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붕대를 감은 시더의 팔을 가리키며 물었다.
“팔은 그 꼴인데 몸은 멀쩡할 거라고 누가 그래요?”
“어느 숙녀분이 날 너무 걱정한 나머지 포션을 좀 잘못 쏟은 모양이에요.”
시더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며 뜨거운 차를 마셨다.
잠깐만. 그러니까 그때, 벌벌 떠는 손으로 포션 병을 열어서, 보이는 대로 상처가 난 몸 위에 쏟았다. 한 병을 탈탈 털었으니 아무리 포션이 안 듣는 인간이라도 회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구멍이 뚫리다시피 한 배가 시선을 강탈한 나머지 팔도 부러진 상태였다는 건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에스페란사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던전을 전부 처리한 이후의 일이었다.
“……포션 하나 더 뜯을까요?”
“한 개밖에 안 남았었다면서요.”
사이러스가 많이 갖고 있겠지! 에스페란사와는 달리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넘어왔을 테니까. 에스페란사가 그렇게 대답하려던 찰나, 시더는 그 대답을 꿰뚫어 본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이 팔도 반쯤 아물었다더군요.”
“누가 그래요?”
“이 저택 주치의가요.”
시더가 알라스테어를 향해 턱짓했다.
“아, 맞습니다. 어제 저택으로 옮겨오자마자 로드 에이번데일의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배의 상처는 전부 아물었고 팔도 아물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다 나았다니까요.”
“요양이 필요하다고도 했습니다만.”
시더는 못 들은 척했다. 알라스테어는 그 무시가 익숙하단 듯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두 분이 오셨으니 말인데, 적어도 며칠간은 여기에 머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요양 때문에요?”
장거리 여행이 안 될 정도인가? 에스페란사는 당장이라도 시더를 올려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교통 상황이 정말 안 좋습니다. 바깥이 워낙 어수선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지금 돌아가시면 의회로 소환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회 입장에서는 먼 스털링에 있는 노회한 정치가들 대신 마침 그곳에서 나인 호더로 돌아온 상원 의원 클라이번을 소환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공식 발표가 나오기 전에 증언을 확보하면 더 좋겠지. 의회로 소환되면 이 거대한 재난에 대한 마도 공학자의 의견 청취부터 시작해서, 왜 스털링에 갔는지까지 탈탈 털릴 것이다.
시더는 그 말만으로도 질색했다. 알라스테어는 군부와 스털링 시청, 던바틴 공작가가 말을 맞출 때까지 몸을 사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게 얼마나 걸릴까요?”
“일주일이면 얼추 끝날 겁니다.”
“일주일…….”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시더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이쪽의 동의에는 사감이 좀 섞인 것 같았다.
“스털링, 부탁할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급히 시작해야 할 연구가 있는데 연구실로 쓸 방 하나 내줘요.”
연구? 알라스테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마벨우드에서도 시더 클라이번은 방에 틀어박혀서 뚝딱거리느라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후 내로 마련하겠습니다.”
“고맙군요.”
식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시더는 침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에스페란사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따라 들어왔다.
“벌써 연구를 시작하려고요?”
“이미 하겠다고 정했으니 미룰 필요 없죠.”
“필요가 없긴 왜 없어요?”
붕대도 못 풀고 있으면서. 어차피 일주일만 있으면 붕대도 풀고, 나인 호더로든 에이번데일로든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왜 당장 연구를 시작해야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누더기 같은 팔로 무슨 연구를 하겠다는 거예요?”
“어차피 시작 단계에서는 계산과 설계만 할 거라 손이 두 개나 필요하진 않아요. 책은 필요하겠지만, 이 저택의 누추한 서재에도 기본적인 건 있겠죠.”
숨 쉬듯 스털링 저택의 장서 규모를 깎아내린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스페란사는 듣고 있지도 않았다. 대신 탁자에 놓인 약병을 들어 손에 털어놓았다.
“시끄러워요. 착한 어린이답게 약이나 먹어요.”
약과 물잔을 받아 든 시더가 물었다.
“다 먹으면 사탕도 주나요?”
“없어요. 이 썩으니까.”
시더는 웃으며 허리를 숙여 에스페란사의 뺨에 자기 뺨을 가져다 댔다. 성한 팔이 한쪽뿐이라 자세는 다소 어정쩡했지만, 화가 잔뜩 나 있던 얼굴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에스페란사는 결코 무른 성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번 눈 밖에 난 상대에겐 가혹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그러니 이렇게 무르게 녹는 표정을 볼 수 있는 것은 흔치 않은 특권이었다. 팔꿈치를 엄지로 부드럽게 쓸며 달래자, 에스페란사가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이렇듯 그에게는 예외적으로 무르고 관대한 에스페란사지만, 그를 위해서 이 세계에 남아 주진 않겠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마음을 정했으니 미적대지 않는 것이 좋았다. 혹시라도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에스페란사. 부탁 하나 할게요.”
“해요.”
“도노반 중령의 사택에 내 연구 자료와 장비들이 있는데, 그걸 가져와 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은요? 같이 안 가고?”
“난 내 할 일을 해야죠. 이 저택의 서재에서 필요한 책을 골라내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밀런을 같이 보낼게요.”
“그러니까 벌써부터 시작할 필요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날 위해서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더를 상처입히지 않고 끝낼 방법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면 이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에스페란사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무리할 만큼 할 일도 없으니 걱정 말아요.”
이 부분에 대해선 조금의 신뢰도 없다.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떼어 냈다.
“다녀올게요.”
이런, 이렇게 바로 가는 건가? 시더는 아쉬운 기분으로 서늘해진 빈 팔을 내려다보았다. 에스페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방으로 올라왔다.
“미스 헌터께서 로드 에이번데일을 감시하라고 하시더군요. 응접실에서 못 나가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 * *
밀런이 도노반 중령의 사택 문을 열었다. 사택은 옅게 깔린 먼지 말고는 깨끗했다. 아직 하녀가 다녀가지 않아 생활감이 남은 사택 내부를 둘러보던 에스페란사는 응접실에서 비워지지 않은 재떨이를 발견했다.
“엄청나게 피웠네……. 못 끊는 건가?”
“안 끊으시는 겁니다.”
응접실로부터 서재로 이어지는 통로의 문을 열던 밀런이 대답했다. 에스페란사는 재떨이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입니다.”
“애니, 턱 있으니까 조심하고.”
“네.”
서재로 들어온 애니는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혔다. 에스페란사는 팔짱을 낀 채 책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시더의 책은 아닐 것이다. 이 중 몇 권이나 읽었을지도 의문이다.
“여기서 뭘 가져가야 되는 거지?”
“백작님께서 쓰시던 자료는 이쪽입니다. 장비는 2층에 있는데, 양이 좀 많습니다.”
“그래? 애니, 책이랑 자료들 좀 꺼내 둘래? 난 2층에 다녀올게.”
우뚝 서 있는 밀런을 잡아끈 에스페란사는 2층의 연구실로 올라갔다 밀런은 연구실 서랍에서 장비들을 꺼냈다. 공구 상자, 마력 측정기, 변환기, 마정석 보관함……. 산더미처럼 쏟아졌다.
“그런데 이 많은 장비들이 대체 어디서 난 거야? 가방 두 개 갖고 도망친 주제에.”
‘도망친’ 쪽에 있었던 밀런은 반사적으로 등을 움츠렸다. 에스페란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으며 쌓인 물건들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해군에서 지원받은 겁니다. 질은 떨어지지만 급한 대로 쓸 만하다고 합니다.”
“시더가?”
“네. 실제로는 이것도 해군에서 꽤 신경 써서 보급한 겁니다만.”
그래도 시더 클라이번의 하늘 위에 붙은 안목에는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이해가 간다. 장인에겐 도구가 중요한 법이니까. 에스페란사는 커다란 공구 상자를 들어 올려 허공에 던져 넣었다.
“……이젠 숨기지도 않으시는군요.”
“내가? 숨겨야 해? 너한테?”
밀런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는 스털링에 있던 에스페란사의 지인 중 유일하게 던전을 피한 인물이었지만, 비상한 눈치로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숨기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아가씨, 책 다 꺼내 뒀어요! 도와드릴 것 없을까요?”
“없어, 없어, 다 끝났어. 밀런, 뭐 해? 그거 안 집어넣고.”
반사적으로 장비를 던져 넣은 밀런이 사라지는 구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스페란사는 손을 탈탈 털고는 앞서서 1층으로 내려갔다. 뒤따라오던 밀런은 2층에 올라온 애니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테이트 양, 아셨습니까?”
“아가씨요? 당연하죠.”
애니는 짐짓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정작 자기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위험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능력은 얼마든지 악용이 가능하잖습니까?”
그 말에 뾰로통해진 애니가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밀런 씨처럼 건방지게 굴어도 봐주시잖아요.”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밀런은 걸음을 멈춰 섰다. 애니는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다가 쾌활한 발걸음으로 앞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