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애니가 꺼내 놓은 책과 연구 자료를 한 권씩 인벤토리 안에 던져 넣던 에스페란사는 문득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인벤토리 안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아가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흠. 고개를 뺀 에스페란사는 기겁하는 애니를 뒤로한 채 예전에 시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인벤토리 안을 액체로 채울 수 있을까?
저건 대체 어떤 공간일까?
이게 게임이었다면 이런 건 고민거리도 안 됐겠지. 하지만 실제로는 실존하는 세계 사이를 시공간 기계로 이동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 ‘인벤토리’는 무슨 원리지? ‘상태 창’은?
‘사이러스에게 물어봐야겠어.’
물어보는 김에 포션도 한 병 얻어 오면 좋을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쓰던 책상에서 편지지를 한 장 꺼내 사이러스에게 간단한 편지를 썼다. 에스페란사에게 왔던 편지지와 같은 것이었다.
“편지지가 엄청 많네. 군인들이 원래 편지 쓸 일이 많은가?”
“제가 사 온 겁니다.”
그 말에 에스페란사는 광택이 흐르는 편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두껍고 표면이 매끄러운 고급 편지지가 손안에 감겼다. 잠시 편지지를 만져 보던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에게 쓴 편지를 구겨 버렸다. 다시 쓰지, 뭐.
“가자.”
* * *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충실한 시종처럼 에스페란사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그 말인즉슨, 시더는 단 1분도 응접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응접실에는 하인들이 대신 옮겨 준 책뿐, 연구 장비도, 재료도, 마정석도 없었다. 그러니 얌전히 앉아서 책이나 읽을 수밖에.
“스털링, 거기 서서 지켜보는 대신 와서 일이라도 해요.”
“제가 할 일이 있습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감시는 하고 있었지만, 하인처럼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지루했던 알라스테어가 냉큼 물었다. 시더는 턱짓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필요한 자료만 분류하는 거니까 비전공자라도 어렵진 않겠죠.”
시더는 메모지에 키워드 몇 개와 학자들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
“이 학자들이나 이런 내용이 나온 책들만 따로 분류하면 됩니다.”
“이…… 책을 다 뒤져서 말입니까?”
“그건 알아서 해야죠.”
물론 시더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대신 책 뒤의 색인만 대충 확인했다. 색인에 등장하지도 않을 분량이면 쓸 만한 내용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고지식한 알라스테어 렌프루에게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겠지.
한참 동안 응접실에선 책장 넘기는 소리만 났다. 다른 소음이 끼어든 것은 그로부터 30분여가 지난 후였다.
“학구열이 넘치는 분위기네요. 다들 뭐 해요?”
공작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냉큼 쾌차한 코델리아였다.
“어? 에스페란사는요?”
“내 부탁으로 잠깐 나갔어요. 레이디 코델리아, 남의 책 밟지 말고 돌아서 들어오도록 하세요.”
“……누구 책인데요?”
“집주인이죠.”
그 순간 심술궂은 얼굴로 발을 들어 올리던 코델리아는 알라스테어가 부스스 고개를 들자 발을 내려놓았다.
‘알라스테어 렌프루에겐 죄가 없지.’
뒤늦게 무슨 마음의 발로인지 개연성 없는 호의를 보내는 그 부친과는 달리 말이다.
“그래서, 이게 뭐예요?”
시더는 다시 책을 뒤적이느라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알라스테어가 책을 덮으며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코델리아도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난 뭐 하고 놀지?”
“……같이 하시겠습니까?”
“누구 좋으라고요. 싫어요.”
시더를 흘겨보며 들으란 듯이 말한 코델리아는 소파로 향했다.
“할 일이 없네. 음…….”
응접실을 살피던 시선이 움직였다. 체스 보드, 당구대, 수북하게 쌓인 책과 관심 없는 신사 둘, 창밖으로 보이는 왠지 음침하고 기분 나쁜 정원. 코델리아의 시선은 이윽고 아무도 쓰지 않는 것 같은 피아노에 닿았다.
“조율은 돼 있어요?”
“글쎄요. 그래도 관리는 하지 않았을까요? 저도 쓴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이라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페달을 몇 번 밟아 보고 놀리듯이 쾅쾅 불협화음을 연주해 보다가, 손을 뗐다. 소리가 쓸 만했다. 코델리아는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첫 곡은 유명한 찬송가였다. 알라스테어는 느릿느릿 책을 덮어 엉뚱한 자리에 내려놓았다. 바로 어제 들었던 곡이었다. 비록 한 소절뿐이었지만. 거대한 성당의 수백 년 된 파이프 오르간이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곡. 비록 진공관도 전부 부서지고 성당은 무너져 버리고 말았지만, 아찔했던 순간 그를 구했던 한 마디의 음악만은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스털링, 안 할 거면 내려가요.”
찬송가가 끝날 때까지 책장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앉아 있는 알라스테어가 성가셔진 시더가 턱짓으로 그를 쫓아냈다.
“아, 아닙니다.”
“도움이 안 되고 있단 말을 하는 겁니다.”
결국 알라스테어는 미적미적 자리를 떴다. 시더는 코델리아의 유려한 연주를 한 귀로 흘리며 책장을 넘겼다.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몇 권 남지 않았으니 오후에 연구실이 준비되면 바로 몇 가지 가설을 실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만들었던 시공간 기계의 설계도는 가지고 있지만, 그때 만든 것을 재현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건 완벽해야 한다. 적어도 완벽하게 안전해야 한다. 에스페란사가 써야 하니까. 비록 완벽에 도달하는 길이 속을 박박 긁어내는 과정이라 해도.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엔 시더도 고개를 들었다. 아는 발소리였다.
“다 가져왔어요. 그런데 군부에서 준 걸 이렇게 빼돌려도 되는 거예요?”
알라스테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에스페란사가 대뜸 물었다.
“그런 사소한 걸 챙길 틈은 없을걸요.”
에스페란사는 쌓여 있는 책 중 하나를 들어 색인을 펼쳤다. 시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앞에 놓인 메모지와 대조하여 책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아. 그리고 그 집 재떨이를 아직 안 비웠던데. 줄일 생각은 없어요?”
“글쎄요.”
궐련을 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파오란 따위가 아니라 그 매캐한 연기라도 필요로 하게 되는 이 상황이었다. 붙잡기는커녕 자기 손으로 보내줘야 하는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 불쑥 치솟는 심술을 내리누른 시더가 책을 덮었다.
“이쪽 건 다 됐어요.”
“어, 나도. 나도. 잠시만요.”
마지막 두 권을 마저 해치운 에스페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침 코델리아의 현란한 연주가 끝을 맺었다. 건반에서 손을 뗀 코델리아가 에스페란사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언제 왔어요?”
“한 10분 됐어요.”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이끌어 소파 쪽으로 향했다. 피아노 의자에 앉은 코델리아가 알라스테어에게 악보를 넘겼다.
“로드 스털링도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웠대요.”
“레이디 코델리아의 실력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만.”
“틀리는 쪽이 더 재밌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그 말에 더 불안해진 알라스테어가 응접실의 남은 두 관객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도 똑같은 얼굴이었다.
‘이럴 땐 왜 단합하는 거야.’
덕분에 부담감은 덜었다. 잘하면 감상을 하고 잘 못 하면 구경을 하게 되겠지. 어느 쪽이든 손님 대접은 됐을 테니.
코델리아가 알라스테어에게 골라 준 곡은 어렵지 않은 민요였다. 에스페란사의 귀에도 익은 유명한 곡이었다.
“당신도 알아요?”
시더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찡그리듯 웃었다. 입동 축제에서 종종 들은 노래라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알라스테어는 그 짧은 곡을 연주하는 동안 두 번 삐끗했다. 하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애당초 틀리는 편이 더 만족스러웠으니까.
에스페란사가 등을 떠밀자, 시더도 간단한 곡을 두어 개 연주했다. 그 보답으로 에스페란사는 끔찍한 연주를 돌려주었다.
“못 한다고 했잖아요?”
틀리는 편이 좋은 연주회라 뻔뻔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코델리아가 다시 피아노를 차지했다. 시더는 분류해 놓은 책 중 한 권을 가져와 펼쳤고, 에스페란사는 서재에서 다른 책을 가져와 시더의 팔에 기대앉았다.
오랜만의 평화였다. 그러나 결코 완전한 평화는 아니었다. 모래 폭풍이 불어오기 전, 사막의 티타임. 벽면을 채운 창문으로부터 들어온 흰 햇빛이 응접실을 넓게 덮었다.
창문 바깥, 네 명의 신사 숙녀들이 나른한 오후를 즐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공작이 말없이 몸을 돌렸다.
* * *
어제 이 시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오후였다.
숙녀 하나는 낮잠에 빠졌고, 피아노에 모여 있던 두 사람은 체스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시더는 그의 무릎에 비스듬히 누운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눈으로 페이지 끝을 훑었다.
책장을 넘기고, 새 페이지를 바라보다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뒤에서 목소리를 잔뜩 낮춘 대화가 들려왔다.
“에스페란사도 피곤했나 봐요. 그럴 만도 하죠.”
“로드 에이번데일도 다쳐 오셨고 말입니다. 많이 놀라셨던 것 같습니다.”
체스 말을 놓는 소리 뒤로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소리였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귓가를 손끝으로 쓸며 그 소리를 흘려들었다.
“어머. 하긴, 예상을 못 했을 테니까요.”
“큰 부상이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의사가 확인했을 때는 거의 다 나아 있더군요.”
시더는 붕대를 감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포션을 들이부었던 배는 약간의 통증을 빼면 다 나은 상태였고, 팔도 이만하면 일주일 내에 붕대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머리를 맞대고 속닥대는 두 사람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 에스페란사를 비롯하여 던전, 괴물들과 재난까지 전부 하나의 예외 현상으로 묶어 둔 것 같았다. 바람직한 일이었다. 구태여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에스페란사가 그걸 설명하느라 머리를 굴리기를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에스페란사의 속눈썹이 무릎을 간질였다.
“쉿.”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려 시선을 맞춘 에스페란사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몇 시예요?”
“음. 3시 20분이네요.”
“오래 잤네…….”
“누구 말마따나 피곤했나 보죠.”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슬쩍 흘겼다. 그 피곤이 어디 전투 때문이겠는가? 남의 정신을 쏙 빼놓고는!
“그러고 보니까요, 러스틴 준장인가 그 사람은 왜 사과하러 안 와요?”
“바쁘겠죠. 지금 한창 말 맞추고 있을 텐데.”
“그게 먼전가, 이게 먼저지.”
다분히 객관성을 잃어버린 말이었지만 시더는 지적하는 대신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기분은 다음 말에 바로 곤두박질쳤다.
“아, 맞다. 사이러스한테 편지도 써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