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왜요?”
“만나서 물어볼 것도 있고, 원래는 어제 이야기하려고 불렀는데 당신이 안 깨서 그냥 보냈어요. 연구도 중요하지만, 일이 너무 크게 터졌잖아요.”
스털링 시를 움직이는 중역들, 시장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해군 기지의 장성들, 공작과 구 귀족들, 사업가들은 분명 입을 맞춰 둘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큰 규모의 재난에서 말이 새어 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던전이란 것의 존재는 어쨌든 금방 알려질 테고, 운이 나쁘면 사이러스나 당신을 본 사람들도 있겠죠.”
다리아는 이 모든 것을 단계적으로 진행할 생각이었겠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모든 것이 틀어졌다. 그 말은, 그들이 가진 미래에 대한 정보들도 대부분 힘을 잃었다는 뜻이었다.
“해적들도 본인들이 다리아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고 있을 테고, 오스던 군함을 끌고 어디로든 갔을 테니 정계가 뒤숭숭해지겠네요.”
13년 후의 세계에서처럼 해적들이 전멸했다면 오스던의 군함 축조 기술도 유출되지 않았겠지만, 그들은 절반 이상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오스던 군부가 애지중지 아껴 왔던 기술들은 적국에 비싼 값으로 팔려나갔을 것이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난데없이 이런 재난이 발생했으니, 국내외로 난감한 상황이다.
“다리아가 이번 일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관건일 텐데. 전혀 예상이 안 가요.”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신중해지지 않겠어요?”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가?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켰다.
“로드 스털링, 편지지 어디 있어요?”
대강 사이러스에게 보낼 편지를 적어 심부름꾼 손에 들려 보냈다.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꼴 보기 싫은 놈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 체스 보드 쪽으로 향했다. 코델리아와 알라스테어가 각각 1승 1패씩을 올린 상태로, 이번 판은 승부를 결정지을 마지막 한 판이었다.
“체크메이트!”
코델리아가 명랑하게 외쳤다. 편지를 심부름꾼 소년에게 넘기던 에스페란사도 고개를 돌렸다.
“뭐예요? 이겼어요?”
까치발을 들어 시더의 어깨 뒤로 고개를 내밀었는데, 생각 외로 체스판의 상황은 게임이 진행 중인 것 같았다.
“아닐 텐데요.”
“맞아요.”
“아닙니다.”
“맞다니까요?”
코델리아의 눈이 불을 뿜었다. 알라스테어는 흠칫했지만, 체스보드를 다시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하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금 전에 코델리아가 옮긴 말을 비숍으로 잡은 알라스테어는 꽤나 의기양양해 보였다. 코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 여기서 어떻게 하려고 했더라? 잠깐만요. 분명 생각을 해 뒀었는데.”
시더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스페란사가 귓가에 속삭여 물었다.
“누가 이긴 거예요?”
“음…….”
시더는 판을 가만히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에스페란사의 손을 감싸 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승자를 짐작할 수 있었다.
‘코델리아구나.’
과연, 잠시 후 코델리아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체스 말을 옮겼다.
“이거다!”
이젠 문외한인 에스페란사의 눈에도 알라스테어의 흰 킹이 완전히 포위된 게 보였다. 알라스테어가 침음을 삼켰다.
“졌죠?”
“졌습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코델리아가 눈을 반짝이자, 알라스테어도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때, 마치 안쪽의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처럼 시기 맞춰 응접실 문이 열렸다. 푸근한 인상의 중년 부인이 독특하게 생긴 과자가 가득한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백작님, 간식을 가져왔습니다.”
에이번데일 저택에서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구성이었다. 건과일과 견과류가 들어간 프루트케이크를 페이스트리로 감싼 블랙 번, 쿠키 위에 설탕에 절인 과일을 장식한 바닐라 쿠키가 화려했다.
“백작님께서 손님분들을 위해 특별히 북부 전통 간식으로 준비하라고 당부하셨답니다.”
에스페란사는 탈마인의 던바틴 공작가에서 이런 간식을 대접받은 기억이 있었다. 능숙하게 블랙 번을 잘라 먹던 손이 우뚝 멎었다. 그때의 공작이 알라스테어 렌프루였던가?
공작이야 나이가 많으니 10년 안에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때 만났던 공작은 지금의 총명하고 고지식하지만 배려 깊은 알라스테어 렌프루와는 다른 인물 같았다. 피로한 얼굴이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곳의 알라스테어는 몬스터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던전을 겪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나인 호더로 가는 길에 갈리스턴 공작의 수하들을 조우한 것, 그리하여 습격을 받고 마벨우드의 숲에 버려진 것도 전부 에스페란사의 등장으로 인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알라스테어는 아무 일 없이 나인 호더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 그는, 에스페란사가 아는 지금의 이 청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겠지.
“미스 헌터. 블랙 번을 드셔 보셨습니까?”
“네.”
무심코 대답했던 에스페란사는 주변 사람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고 당황했다.
“왜요?”
“……캐묻는 건 아닙니다만, 파오룬에서 오셨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맞다. 너무 편하게 있었다. 긴장을 너무 풀어 버린 모양이다. 호텔에서는 한 번도 이러지 않았는데. 호텔에서와 지금이 다른 점이라곤 하나뿐이다.
에스페란사는 입맛이 뚝 떨어져 포크를 내려놓았다. 변명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게, 음.”
“저택에 던바틴 출신 하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또 몰래 하녀들과 어울렸군요?”
시더가 불쑥 말했다. 에스페란사는 그게 방금 추가된 설정이란 걸 깨닫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알라스테어가 믿어 줄진 모르지만 표면적으로 말만 맞으면 되는 것이다.
“아, 그랬던 거군요. 나인 호더에서도 잘 먹지 않는 음식이라 어디서 접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알라스테어 렌프루, 너무 캐물었어요. 추궁하는 것 같았다고요.”
덩달아 긴장했던 코델리아가 투덜거렸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팔에 몸을 기댔다. 차라리 그냥 솔직히 말할 걸 그랬나? 어차피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그 사실을 어디다 팔아먹을 것도 아니고. 두 번의 던전을 거치며, 나름대로의 신뢰를 쌓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던전의 존재가 온 세상에 밝혀지게 됐으니,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이 알게 된다고 문제될 건 없을 것이다.
에스페란사가 사실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때,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밀런이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한 그는 예의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구실 정리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밀런의 시선이 알라스테어를 힐끔거린 것은 아주 찰나였다. 에스페란사만 그 시선을 알아챌 수 있었다. 뭐지?
연구실에 올라가 보고 나서야 그 시선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문틀에 멈춰 선 시더의 등 너머로 어떤 물체가 보였다.
“칠판…….”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마도 공학자들이 쓰는 연구 장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상식적인 선에서 과학자들이 쓸 법한 연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상당히 큰 이동식 칠판이 연구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에이번데일 저택이나 글라일리 하우스의 연구소, 왕립 마도 공학 대학의 강의실처럼 연구에 돈을 쓸 것도 아닌데 급하게 마련한 연구실에 제대로 된 화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연구가 그리 드문 것도 아니었다. 화면이 없다고 연구를 못 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스털링까지 오지도 않았다. 도노반 중령의 사택이나 마벨우드 저택에서 연구할 때, 시더는 그냥 노트를 썼고, 그런대로 괜찮은 결과를 냈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그 연구들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난이도도 높았다. 시공간 기계는 무려 창고 하나를 꽉 채우는 거대한 기계 장치였다.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계속 전체적인 구조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화면이든 칠판이든 그런 것이 필요하기는 한데, 다른 때와는 달리 시더는 왼팔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게 문제였다. 아주 불편하게 되었다.
두꺼운 붕대로 감은 전완을 내려다보던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사이러스한테 포션 받아 올게요.”
시더는 골이 아프다는 듯 연구실을 둘러보다 이윽고 낮게 대답했다.
“그래 주면 좋겠군요.”
어쨌든 기초적인 것만 갖춰진 이 연구실에서 위대한 시공간 기계 연구의 첫발을 내디뎌야 하는 상황이다. 작은 오두막에서 위대한 발명을 해내는 사람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시더 클라이번은 돈도 시설도 재료도 넘치도록 갖고 있는 그 자신이 그런 꼴에 처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포션 받아 올 때까지만이라도 쉬면 되잖아요.”
에스페란사의 머릿속 저울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적어도 일주일 일찍 돌아가는 것보단 그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다정하기도 하지. 시더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싫어요.”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건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한숨을 크게 내쉰 시더가 제일 처음 한 일은 성서 낭독대를 가져와 칠판 옆에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책을 펼쳐 두고 뭔가를 베껴 적기 시작했다.
“뭘 쓰는 거예요?”
“기본적인 마력 구조를 잡기 위한 수식이에요. 그리고 이쪽이 기본 마력 회로인데…… 옛날 기계는 벌써 10년 된 거라 같은 부품을 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수식도 개량이 필요하겠죠.”
낭독대 한쪽에는 예전의 시공간 기계가 있던 폐건물에서 가져온 연구 노트가 있었다. 시더는 책장을 유심히 보더니, 내용을 그대로 베껴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속이 긁히는 것 같았다. 시더가 이 연구를 시작한 건, 에스페란사를 위해서였다. 에스페란사가 원한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막상 완전히 집중한 모습을 보니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백묵이 묻은 손으로 책을 넘기려던 시더가 어두운 얼굴로 보고만 있는 에스페란사를 불렀다.
“페이지 좀 넘겨 줄래요?”
낭독대에 기대 서 있던 에스페란사가 뚱한 얼굴로 책장을 넘겼다. 복잡한 개념도와 수식이 가득했다.
“이거 다 그대로 쓰는 거예요? 그럼 끝나요?”
“그대로 쓰는 거예요. 안 끝나요.”
“칠판 꽉 찼는데요?”
시더는 칠판 위에서 눈을 떼고 턱짓으로 벽 한편에 서 있는 다른 칠판을 가리켰다.
칠판 두 개를 쓴다고?
“……저기다가는 뭘 쓰는데요? 저기다가도 베껴 쓰는 거예요?”
“아뇨. 저기에 쓸 건 다른 거예요.”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그려 놓은 회로를 바라보았다. 이런 걸 하나 더 한다고? 한쪽 팔이 성치 않아서 남이 종이를 넘겨 줘야 하는 상태로? 하루 종일 매달려도 못할 것 같은데.
보다 못한 에스페란사가 몸을 일으켰다.
“내가 할게요. 이거 다 베껴 쓰면 되죠?”
시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로 바라보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쓰다니. 그리는 거겠죠.”
저 인간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