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눈을 세모꼴로 뜬 에스페란사가 그를 노려보았다. 시더는 웃으며 에스페란사의 손에 분필을 넘겨 주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에스페란사는 시더보다 두 배는 빨랐다.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 베끼는데, 기호는 처음 보는 것이지만 몇 번 쓰다 보니 손에 익었다. 말 그대로 그린다고 생각하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쓰다 보니 시더가 왜 느렸는지는 알 것 같았다.
‘마도 공학이 아니잖아. 이게 뭐더라, 마도 물리학?’
사이러스도 그런 표현을 몇 번 쓴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시공간에 관련된 복잡하고 다소간 철학적인 논의들. 시더가 근 10년 동안 거들떠본 적도 없었던 분야였다. 어쩐지, 그답지 않게 책을 몇 번씩 들여다보는 이유가 있었다.
오히려 전혀 모르다 보니 베껴 쓰는 게 간편했다. 그냥 왼쪽 모서리부터 하나씩 그대로 그려 내려갔다. 좀 울퉁불퉁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볼만했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까보다 확연히 짧아진 분필을 든 에스페란사가 마지막 점을 경쾌하게 찍었다.
고개를 돌려 시더가 있는 쪽을 확인했다. 그는 에스페란사가 쓰는 칠판보다 더 큰 칠판을 알아볼 수 없는 기호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크기로 적어서 보이기는 하나 싶을 정도로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책 한 권 들춰 보지 않은 채로.
에스페란사는 심술궂은 얼굴로 시더의 칠판으로 다가갔다.
“다 끝냈어요?”
“네.”
흰 분필로 가득 적어 둔 수식을 멀뚱히 바라보던 에스페란사는 칠판 한 귀퉁이에 분필로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에스페란사. 나도 거기 써야 해요.”
“쓸 때 지워 줄게요.”
“아. 지울 거라고요? 그럴 거면 노트에 그리면 되잖아요.”
“난 여기에 그리고 싶어요.”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방해였다.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빨리 시작해야 성과가 날 텐데요.”
“날 그렇게 빨리 돌려보내고 싶어요?”
“투정 부리지 말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이 투정이 마음에 들었다. 빨리하면 하는 대로, 늦장 부리면 부리는 대로 아쉬울 수밖에 없는 거라면, 이쪽이 좋았다. 시더는 고개를 숙여 에스페란사의 콧방울에 입을 맞추었다. 콧잔등을 찡그린 에스페란사가 대꾸했다.
“투정이 아니라 걱정이에요.”
“그런 셈 치죠.”
시더는 지우개를 들어 에스페란사가 그린 그림을 휙 지워 버렸다.
“왜 지워요?”
에스페란사는 까치발을 들어 아까보다 조금 더 위에 낙서를 했다. 이번엔 시더도 낙서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며칠 전 편지 귀퉁이에 슥삭슥삭 그려 보낸 깜찍한 그림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시더는 그 그림을 지우는 대신 옆에 긴 곱슬머리의 여자를 그렸다. 키득거리던 에스페란사가 냉큼 지우개를 빼앗아서 지워 버렸다.
“너무 잘 그렸어요. 기분 나빠요.”
“아. 잘 그려도 문제예요?”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손이 안 닿는 높이에 다시 그림을 그렸다. 아까보다는 대충 그렸지만, 어쨌든 에스페란사가 얼렁뚱땅 그린 그림보단 나았다. 에스페란사가 지우개를 휘둘렀다.
“안 닿을걸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흰 마력이 발을 휘감았다. 에스페란사의 몸이 한 뼘 정도 떠올랐다. 시더는 기가 막혀 혀를 찼다.
“고작 이런 일에 마력을?”
“뭐 어때요?”
지우개를 휘두르려는 찰나 시더가 성한 팔로 에스페란사의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에스페란사가 버둥거려 봤지만, 시더는 놓아주지 않았다.
“진짜 밀어 버릴 수도 없고!”
결국 시더의 그림 옆에 얼렁뚱땅 그린 그림을 하나 추가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내려오고 나니, 가슴 아래에 커다란 손자국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짙은 블라우스 위, 몸의 반절을 차지한 흰 손자국. 온도 없는 자국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이런. 그 옷은 못 입겠네요.”
시더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페란사도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어쩔 수 없죠, 뭐.”
“마침 겨울옷을 장만할 때가 됐고.”
이번 겨울 한 철밖에 못 입을 텐데. 에스페란사의 눈에 그런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눈을 맞추고 있으면 서로 말하지 않은 생각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 날 동정해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손끝을 쥔 채 침묵을 지켰다.
“실속 없는 동정은 필요 없어요. 날 위해 여기 남아 줄 게 아니라면, 그냥 모르는 척해요.”
에이번데일 저택에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건 에둘러 말한 배려였고, 이번엔 꺾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는 애원하고 싶지 않았다. 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 매달리는 일 따윈…….
분필 가루가 묻은 손을 닦아 낸 시더가 짜증스레 혀를 찼다. 널찍한 방 안에 가득 찬 물건들이 불쾌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됐군요. 오늘 하루는 저것들 다 꼴도 보기 싫어졌으니, 나랑 놀아 줘야겠어요.”
일그러졌던 에스페란사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팔 안 쓰고 하는 거면 뭐라도 상관없어요.”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예요.”
이 정도 심술은 괜찮겠지. 시더는 입술을 비뚤게 올렸다.
* * *
만찬의 참석자는 또다시 네 명이었다.
“레이디 코델리아는?”
“아프시답니다.”
오후까지만 해도 커다란 피아노 앞에 앉아서 유려한 연주를 선보이던 레이디 코델리아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던바틴 공작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다음 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디 코델리아는?”
“아프시답니다.”
던바틴 공작이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 숙녀분은 내가 있을 때만 아프다더냐?”
“……그런가 봅니다.”
알라스테어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몇 번이고 돌아가겠다던 코델리아를 설득해서 남게 한 것은 그였다. 코델리아는 던바틴 공작과 마주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저택에 머무르기로 했다.
“알라스테어.”
“네, 아버지.”
“날 원망하느냐? 일이 이렇게 돼서 날 탓하고 싶으냐?”
“저는 아닙니다.”
코델리아는 맞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작도 할 말이 없다는 걸 알았다. 던전 속에서 코델리아를 만나는 일이 없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의 숙녀가 마치 전설 속의 요정처럼 용맹을 뽐낼 줄 알았겠는가? 불길하다 비웃었던 마벨우드의 사고가 스털링에도 일어나게 될 줄은 알았겠는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이 되돌아보니 그를 비웃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공작은 침음을 삼켰다. 이제 와서 다른 숙녀를 고른다 한들 눈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던바틴 공작의 후계자가 차선을 택하는 것도 안 될 말이다.
“알라스테어, 따라오너라.”
부자간의 갈등을 멀뚱히 구경하던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여 보인 알라스테어가 공작을 따라 식당을 벗어났다.
에스페란사는 뚱한 얼굴로 식어 빠진 식사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반도 먹지 않고 식기를 내려놓은 시더에게 물었다.
“어떻게 될까요?”
“두고 봐야 알겠죠.”
“사실 관심 없죠?”
“사실, 그렇죠.”
그럴 줄 알았다. 하기야, 저 두 부자간의 말다툼은 정말로 조금도 재미가 없었다. 알라스테어가 공작에게 뺨이나 맞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됐어요, 그럼. 오늘 할 일이나 해요.”
오늘은 사이러스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전에 오랜만에 거리를 둘러볼 계획도 있었다. 나들이 목적만은 아니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거리가 예전 같진 않겠죠?”
그러나 잠시 후, 달리는 증기 마차 안에서 본 거리는 더없이 예전 같았다. 던전 이전과 다름없는 활기가 느껴졌다. 발악 같은 활기였다.
“상황이 나쁘네요.”
턱을 괴고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시더가 중얼거렸다. 이 길은 던전의 영향권에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격이 느껴졌다. 묵직한 먹구름이 내려앉은 듯 공포와 불안이 넘실댔다. 검은 상장이 창문마다 달려 있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장례식장이 된 듯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범죄율이 두 배쯤 치솟았을 것만 같은 거리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 여론이 어떻게 번진 것인지, 시청과 기차역 근처의 거리에 시위대와 경관들이 살벌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손에 횃불과 연장을 들고 있었다.
마부는 요령 좋게 시위대가 집결한 위치를 빙 돌아 지나갔지만, 시뻘겋게 솟은 불기둥은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괴물이 사라졌다고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스털링이 그리 가난한 도시는 아니잖아요. 성당은 복구하지 못한다 해도 나머지는 그럭저럭 해결이 될 것 같았는데…….”
“스털링은 가난한 도시가 아니지만 해군 기지 재건에 들어갈 예산 규모가 있으니 중앙에서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죠. 무엇보다, 돈 나올 구석이 없으니까요.”
“기부금 얘기예요?”
“그래요. 기부금 얘기예요.”
시더는 창틀에 종이를 대고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렸다. 그 종이를 흘끔거리던 에스페란사가 탄성을 터뜨렸다. 그냥 종이가 아니라 수표책이었다.
“기부할 거예요?”
“당신이 원한다면?”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에스페란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체제 유지를 위한 귀족의 선행을 마냥 좋게만 보기는 어렵지만, 그조차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어쨌든 지금 스털링 시에는 한 푼의 기부금이라도 절실할 테니까.
“기왕 할 거면 구체적으로 해요.”
“구체적으로, 어디?”
“주거 지원이나, 재해보상금 지원이나. 고아원 쪽도 괜찮고요.”
시더는 망설임 없이 다 받아 적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에스페란사는 의문 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액수가 너무 많았다.
“이거 다 하면 당신 거덜 날 것 같은데.”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시더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종이를 편지 봉투에 넣은 후 봉했다.
“이런. 거덜 나기 전에 겨울옷을 장만해야겠네요.”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럼요. 저택을 팔아서 기부금을 충당하진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탤벗 부인의 무도회에서 낸 기부금도 비슷했어요.”
그 말에 안심한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를 뜯어먹는 데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마차가 거리 초입에 멈춰 섰다. 스털링 시 최고의 번화가인 이 거리는 에스페란사도 호텔에 머물면서 다녀간 적이 있었다. 이곳은 던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것 같이 부산스러웠다. 그러나 때때로 굳은 낯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상복 입은 무리를 볼 수 있었다.
“여기가 이 정도면, 다른 덴 정말 심각하겠네요.”
“던전이 꽤 컸었죠?”
내내 군함에 있다가 비행선으로 옮겨졌던 시더는 던전의 크기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었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굴리며 던전의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종단으로는 성당까지, 횡단으로는 항구 끝에서 해군 기지까지 영향권에 들어왔었어요. 상당히 컸죠. 그래도 여긴 영업도 멀쩡히 하고.”
알라스테어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재난 이후의 쓴 뒷맛을 떨쳐내고, 남은 시간을 이 쌀쌀한 거리에서 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