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쇼윈도에 걸린, 에이번데일이나 나인 호더에 비해 확연히 두꺼운 겨울옷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여긴 털모자를 파네요.”
잠시 후, 에스페란사는 멀뚱히 머리 위를 장식한 털모자를 만지작거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쩌다 이걸 산 거야?
대체로 별것 아닌 잡화들이었다. 무엇보다 시더가 아주 즐거워 보였으므로, 에스페란사는 그가 넘쳐나는 돈을 멋대로 쓰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비록 몇 번 쓰지도 않을 모자가 열두 개, 신발과 장갑이 종류별로 스무 개씩 늘어나긴 했지만.
“이거 살래요.”
물론 가끔은 에스페란사도 혹하는 게 있었다.
“귀엽지 않아요?”
“솔직한 대답을 원해요?”
“아뇨.”
“아주 귀여워요.”
얄밉기는. 에스페란사는 집어 들었던 물건을 내려놓고, 대신 시더의 손에 새까만 가죽 장갑을 끼웠다. 검은 장갑은 흔한 물건이지만 이건 왠지…….
“갈리스턴 공작이 하던 거랑 똑같네요.”
“방금 굉장히 모욕적인 발언을 들은 것 같은데.”
윤곽이 드러나도록 딱 맞는 새까만 가죽을 휘감은 손끝이 에스페란사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모자 그림자가 드리운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키득대던 에스페란사의 입가에서 조금씩 웃음기가 가셨다.
방금 그 농담, 별로였나? 그럴 리가 없는데.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자니 입술이 조금 마르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여긴 공공장소예요.”
에스페란사는 장소에 적합하지 않은 말이나 행동이 먼저 나오기 전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그와 동시에 시더의 손에서 장갑을 벗기고는 냉큼 계산해버렸다.
한발 늦은 시더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에스페란사는 장갑을 그의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
“시더 클라이번, 갈리스턴 공작 에디션.”
“……진심이에요?”
“진심이에요.”
가끔 이렇게 엉뚱할 때가 있었지. 시더는 혀를 차며 장갑을 받아들었다. 고맙다고 말하긴 싫었다. 그 대신 두 종류의 모자와 신발을 더하는 것으로 답례를 하기로 했다. 이쯤 되면 선물이라기보다는 심술 섞인 장난에 가까웠다.
가게에서 나온 에스페란사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다 드레스룸이 터지겠어요.”
“당신 드레스룸은 고작 이거 갖고 안 터져요. 옷이 몇 벌이나 있다고.”
“충분히 많아요. 애니가 그랬는데, 자기 부모님은 엄청나게 엄해서 밝고 예쁜 옷은 못 입게 했대요. 여자애가 예쁜 옷을 좋아하면 타락한다나 뭐라나. 그 기준이면 난 악마예요.”
그 말을 들은 시더는 낮게 웃더니 에스페란사를 잡아끌었다.
“어? 왜요?”
“당신이 고작 악마라니. 마왕으로 만들어줄게요.”
요점을 잘못 잡은 것 같은데.
다행히 마왕이 되는 데는 가게 하나를 톡 털어올 정도의 사치는 필요하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털 코트 두 벌과 벨벳으로 된 겨울 드레스 열 벌을 얻었다. 기성복 두 벌을 제하면 나머지는 전부 맞춤복으로, 완성되는 대로 나인 호더의 에이번데일 저택으로 배송될 것이다.
“왠지 좀 지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 남아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붉은 차양을 내린 고풍스런 카페 건물로 들어섰다.
내부에는 적당한 소음이 있었다. 비밀스런 얘기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눈에 띄지 않고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스털링에 연고가 없는 그들이 이보다 더 비밀스런 장소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냥 스털링 저택으로 부를 걸 그랬나.’
하지만 굳이 장소를 여기로 한 걸 보면 저택으로 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이러스.”
던바틴에서는 흔히 보이는 붉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손을 들어 보였다.
“빨간 머리 진짜 안 어울린다.”
그를 보자마자 그 말부터 튀어나왔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다소 무례했다. 사이러스가 뺨을 붉혔다. 그러나 본인도 잘 아는 사실이어서인지 기분이 나빠 보이는 않았다.
“다리아의 추적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이번 던전을 공략하면서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본 사람이 적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붉은 머리의 덩치 큰 남자’라는 증언에서 원래의 사이러스를 연상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에이번데일, 다친 곳은 괜찮습니까?”
“보시다시피.”
시더는 메뉴판에 차가 없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불평하는 대신 용량이 작은 커피를 시켰다.
“커피 안 좋아해요?”
“기호식품으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밤새 연구할 때는 유용하다고 생각해요.”
싫어한단 뜻이다. 에스페란사는 혀를 차며 오랜만에 크림을 잔뜩 넣은 커피를 주문했다.
“아, 맞다. 사이러스, 포션 얼마나 가지고 있어?”
“최대한 넉넉히 마련해서 왔습니다. 정확히는, 830병입니다.”
정말 징하게 모아왔군. 에스페란사는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다 얼마짜리람.
“넉넉히 좀 줘.”
당연히 대가를 지급할 생각은 없었다. 사이러스도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는 선뜻 30병을 꺼내 주었다. 그건 모두 에스페란사의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나머지는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스털링 저택에서 만나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사이러스는 따로 한 병을 더 꺼내 시더의 앞에 놓았다.
“마시면 팔은 금방 아물 겁니다. 이 세계 사람들에겐 낫는 과정이 제법 아프다고 하지만, 부러진 팔로 다니는 것보단 낫겠지요.”
시더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포션 병을 들었다. 유리병 안에 형광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에스페란사가 떨리는 손길로 그의 상처에 들이부을 때는 차마 말하지 못했는데, 맹독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이 생겼다. 정말 먹어도 되는 것 맞나?
“먹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거 먹고 죽으면 사이러스가 범인이에요.”
포션을 주고도 느닷없이 범인 취급을 받은 사이러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시더는 보란 듯이 빙그레 웃으며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손에 쥐었다.
에스페란사가 그런 시더의 손을 붙들었다.
“아프면 내 손이라도 깨물면…….”
“싫어요.”
이윽고 시더가 포션 뚜껑을 열려던 찰나, 웨이터가 트레이를 들고 다가왔다.
“손님, 저희 매장은 외부 음식 반입 금지입니다.”
긴장이 다 풀려버렸다. 시더의 손을 꽉 붙잡고 있던 에스페란사의 손에서도 힘이 풀렸다. 고개가 테이블 위로 푹 꺾였다. 이게 뭐람.
웨이터가 의아한 얼굴로 지나갈 때까지, 테이블 아래로 토해내는 웃음소리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더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대로 포션을 들이켰다.
고통은 견딜 만했다. 웃다가 고개를 든 에스페란사가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더욱.
“붕대는 의사 참관하에 푸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의사라면 날 실험실로 끌고 가고 싶을 것 같네요.”
이 엄청난 회복력이라니. 이미 붕대 안의 팔이 깔끔하게 아물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은 제조법도 알고 있겠죠?”
“……넘겨드리겠습니다.”
사이러스는 군말 않고 제조법을 적어 내밀었다. 이 또한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갔다. 입 무겁고 마법약학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가 누가 있더라. 이름 몇 개를 떠올려 본 시더는 목록을 머리 한 귀퉁이에 밀어두었다.
잡담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사이러스는 한숨과 함께 카페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붉은 의자와 자수가 놓인 긴 베이지색 소파, 명화와 낮은 조명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적당한 소음이 찼다. 그러나 앞으로 이어질 대화를 충분히 덮어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들어오던 손님들이 이쪽을 간혹 힐끔거리긴 했지만 그건 8할은 저 젊은 백작의 번드르르한 외모 때문이었으므로,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냥 스털링 저택으로 갈 걸 그랬나.’
그러나 역시 불편하다. 저택에서 에스페란사를 만난다고 하면, 에스페란사의 하녀와도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런 호의 가득한 눈은…… 가급적 보고 싶지 않았다. 사이러스는 그냥 목소리를 낮추기로 했다.
“이제 이쪽의 전력도 어느 정도 밝혀진 셈입니다. 적어도 두 명의 헌터가 있다는 것을 다리아도 알게 됐겠지요. 심지어 에스페란사 님은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실 수도 있으니, 황금 발톱을 고려하더라도 이쪽의 전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이 세 사람 중 가장 오랫동안 황금 발톱의 위력을 보아온 사람이다. 그 기계가 게임이 오픈한 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이 세계로 불러들이고, 수없이 많은 던전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그런 그가 그 기계를 쥐고 있는 다리아를 상대로, 황금 발톱을 고려해도 이쪽이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황금 발톱이든 뭐든, 결국 사람이 쓰는 거니까.”
에스페란사 역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공간 기계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다리아의 손목을 노려 던전의 통제를 잃게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사람을 노리면 된다.
“이제 그들도 대비를 할 테니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대비라. 가만히 듣고 있던 시더가 말했다.
“나라면 그냥 안 나타나겠어요. 그게 가장 확실한 대비 아닌가요?”
두 쌍의 시선이 그를 휙 돌아보았다. 시더는 빙그레 웃었다. 물론 에스페란사를 향해서.
“다리아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말이지만.”
사이러스는 탁자 위에 괸 팔에 이마를 올리고 침음을 삼켰다. 그래……. 피하는 방법도 있다. 그 생각은 전혀 못 했다.
아예 나타나지 않으면 이쪽에선 방법이 없었다. 외모를 자유자재로 바꾸고 마법을 아낌없이 펑펑 써대며 권력자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이들을 무슨 수로 찾아내겠는가? 그나마 미래의 일을 토대로 그들의 행보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점이었는데, 그 이점은 이번 일로 전부 사라진 셈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에스페란사가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방식은 아니잖아요, 아예 꼬리 말고 숨어버리는 건. 어쨌든 다리아는 여기에 목표가 있기도 하니 움직일 필요가 있을 거고요.”
“에스페란사 님, 예전에 우리가 쉽게 싸울 수 있었던 건 절대적 우위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는, 절대 죽지 않는 전장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여긴 다릅니다. 다리아도…… 아직은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