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인공지능 시스템을 통해 들어오는 것과 그것 없이 바로 들어오는 것은 차이가 컸다.
다리아와 사이러스는 가상현실 게임의 태동기에 개발된 인공지능 시스템을 시공간 기계와 접목시키는 엄청난 방법으로 게임을 통제했다. 그 기술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마도 공학자들을 갈아 넣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절대적 우위가 보장된 전장, 단지 게임에 불과한 전장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곳에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다. 다리아는 자신이 벌레처럼 하찮게 여기는 이 세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강자를 맞닥뜨리면 죽을 수도 있는 몸이었다. 지금까지는 스스로의 강함을 믿고 있었겠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조심할 수밖에 없지.’
에스페란사는 입 안에 바람을 넣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물었다.
“잠깐만. 우리 시스템은?”
모든 걸 다 생략한 질문이었지만, 사이러스는 금방 이해했다.
그들의 시스템은 아직 작동 중이었다. 시야 한편에 반짝이는 상태창이 그 증거였다. 가끔 존재도 잊어버리긴 하지만. 인벤토리도 마찬가지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스템이 있는데 왜 진짜로 죽는 거지? 왜 어떤 기능은 쓸 수 없는 거지?
“그러니까…….”
설명이 어려웠다. 사이러스가 말을 흐리자, 시더는 눈썹을 치켜떴다. 말을 꾸미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손끝이 탁자를 두드리며 초를 셌다.
“제가 이쪽 전공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사실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릅니다. 설리번 박사라도 만난다면 모를까. 제가 아는 한에서만 설명하자면.”
사이러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아.”
탄성을 터뜨린 것은 에스페란사가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휙 돌렸다.
“왜 당신이 이해하고 그래요?”
“배경지식이 없다고 이해 못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직관적이잖아요.”
두 사람이 질린 듯 고개를 내저었다. 시더가 빙그레 웃었다.
“에스페란사. 이해했어요?”
“아, 했어요. 했어요.”
대충이지만. 이만하면 이해한 거겠지. 그러니까 시공간 기계를 통해 13년 후의 게임 속 세계로 돌아가면 아마 다시 시스템과 연결이 될 거고, 그러면 바로 게임 밖으로 나가는 것도 가능하단 뜻인 것 같았다.
“그럼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건 지뢰 찾기 정도인 건가…….”
인벤토리, 던전 알림창, 전투 모드와 몇 가지 정보 창, 지도 정도. 게임 속에서 쓸 수 있었던 기능들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빈약한 기능들로 잘해왔다. 그리고 상대는 이조차 없으니까,
생각을 마친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더는 다 식은 커피잔을 밀어놓았다. 한 모금 마시고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일단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보죠. 어차피 시공간 기계가 완성되지 않으면 다리아를 찾아도 소용없을 테니까.”
“다리아는 연말까지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 세계의 문제니까요. 그것만은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이러스가 씁쓸한 목소리로 확언했다.
연말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니 다리아의 행보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하려면 두 달은 있어야 할 것이다. 시간을 셈해보던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러스와 헤어지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시더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특별히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면 연말까지 스털링에 남아 있는 것도 괜찮겠군요.”
“스털링에요? 왜요?”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항구는 폐허가 되었고, 도시는 전에 없이 어수선했다. 이곳에서 뭘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던바틴 공작의 광산에서 좋은 마정석을 얻을 수도 있고, 최고의 제련공도 스털링에 있으니 멀리 찾아갈 이유가 없죠. 그리고…….”
“그리고?”
“12월엔 개회식이 있어요.”
의회에 참석하기 싫다는 건가? 이렇게 당당하게 땡땡이 선언을 하겠다고? 에스페란사가 말을 잃고 입만 뻐금거리자, 시더는 턱을 괴고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길 이유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마침 난 환자고.”
“멀쩡하잖아요.”
포션 덕에 다치기 전이랑 별반 다를 바 없을 텐데 환자 운운이라니 기도 안 찬다. 에스페란사도 시더가 그놈의 연구는 좀 미뤄두고 당분간은 쉬기를 바랐지만,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였다.
“그건 당신만 알죠. 당신은 내 편이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거렸다. 에스페란사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게요.”
애석하게도 사실은 사실이다. 다치는 것보다야 낫겠지. 마지못한 인정의 말이 떨어지자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웃었다. 거 보란 듯이.
에스페란사가 모든 이유를 다 알 필요는 없었다.
이 모든 계획은 저택 주인인 스털링 백작의 승인 없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알라스테어 렌프루는 그들이 매우 매우 필요한 상태였으므로, 허락을 받지 못할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그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예요?”
가시가 잔뜩 선 목소리가 체통도 모르고 터져 나왔다. 두꺼운 문 너머로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응접실로 들어가려던 에스페란사가 멈춰 섰다. 지금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두어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시더가 말했다.
“레이디 코델리아의 목소리군요.”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요. 갑자기 왜…….”
“뻔하지 않아요?”
시더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에스페란사는 재빨리 그의 겉옷 소매를 쥐고 벽에 밀치다시피 가두었다. 시더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빙그레 웃자, 에스페란사는 이마를 찡그리며 낮게 다그쳤다.
“그렇게 막 들어가려고 하면 어떡해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보다는 조금 더 둔탁했다. 짐작하건대 금속류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땅이나 벽에 내리꽂히는 소리였다.
응접실 바깥의 복도 벽에 기댄 시더와, 시더가 움직이지 못하게 바싹 붙어 막고 있던 에스페란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코델리아가 뭔가 비싼 걸 집어 던지는 소리다.
그 비싼 게 어디서 나왔을지는 뭐, 말 안 해도 뻔했다.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도 들어가는 건 안 돼요. 저기 끼어들어서 어쩌게요.”
“구경?”
“못됐어, 진짜.”
손등을 꾹 꼬집자, 그는 이제 멀쩡해진 팔로 에스페란사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품 안에서 싸한 파오란 향이 났다. 환자 주제에 또 언제 피운 거람. 에스페란사는 그놈의 궐련을 싹 가져다 숨겨둘 계획을 세웠다.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해진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레이디 코델리아, 이건 어디까지나 선물일 뿐이오.”
응접실 안에 던바틴 공작이 있는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그제야 낯익은 코델리아와 알라스테어의 기척 외에 남은 하나가 공작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응접실은 워낙 하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니 생각지도 못했다. 공작과 대치 중이라니, 큰 소리가 나올 만도 했다.
“그리고 전 필요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답니다! 던바틴 공작가의 보석함에서 나온 거라면 사금 한 조각도 싫다고요!”
“감정적이군.”
“아버지, 제발 그런 말씀은 그만…….”
중간에서 알라스테어가 얼마나 죽어나고 있을지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중재를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손톱만 한 사금이든,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든, 제게 주실 이유가 없으세요. 저도 각하의 선물을 받을 이유가 없고요.”
“내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답례라고 하면 어떻겠소?”
“각하의 답례를 받을 줄 알았다면 알라스테어 렌프루가 죽어버리도록 내버려 둘 걸 그랬네요.”
코델리아의 새파란 눈이 얼마나 차갑게 불타오르고 있을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에스페란사가 공작에 대한 사적인 악감정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시더가 이마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말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던바틴 공작한테 저 정도 말은 해도 되지 않아요? 그런다고 보복을 하겠어요, 어쩌겠어요.”
“그 말엔 동의하지만, 레이디 코델리아는 도무지 후진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렇단 말은.”
그렇단 말은. 그 말을 되뇌던 에스페란사의 얼굴이 흐려졌다.
화를 주체하지 못해 씨근덕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이건 한 번 더 터질 게 남았다는 소리다. 에스페란사는 그제야 시더를 가둔 팔을 내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그사이 공작이 또 쓸데없이 혀를 놀렸다. 코델리아가 꽉꽉 눌러 담은 분노를 터뜨렸다.
“파혼을 없던 걸로요? 설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시라면…….”
에스페란사가 조금 더 빨리 문을 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멈칫한 사이, 코델리아는 기어이 마지막 말을 세상에 꺼내놓았다.
“각하의 장례식에서나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죠!”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시더가 탄식을 터뜨렸다.
“대단하군요.”
감탄인가? 이 시점에?
문이 벌컥 열렸다. 코델리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에스페란사를 보지도 못한 건지 유령처럼 멀어졌다.
던바틴 공작은 붉은 기가 남은 수염을 푸르르 떨다가, 허리를 굽혀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목걸이를 주워들었다.
“가져가서 수리해 둬라. 네 어머니의 유품이 아니냐. 아, 손님들께 못 볼 꼴을 보여드렸군. 실례가 많았네.”
공작의 다리가 푹 꺾였다.
“아버지!”
알라스테어가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공작은 시종을 불러 몸을 맡기고는, 알라스테어에게 일갈했다.
“알라스테어, 나는 내일 탈마인으로 돌아가 볼 테니 손님 대접에 차질이 없도록 해라. 두 사람도 부디 원하는 만큼 머물다 가게.”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저런 대답이라니, 뻔뻔하기도 하지. 공작이 끌끌 혀를 차며 응접실을 나섰다.
“코델리아가…….”
“괜찮습니다. 아버지도 괜찮으시고요.”
상처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코델리아가 당한 일들과 불같은 성정을 고려해 봤을 때 그건 그냥 꾹꾹 담아두었던 본심이 폭발한 것에 불과했다. 아주 오랫동안 곱씹어 묵힌 원망. 그러니 그 정도 악담은 들을 각오를 했다. 아버지도 했을 것이다. 양심이 있다면.
“후회하고 있을걸요.”
“아마 그렇겠지요.”
진심이더라도, 그 진심을 말할 생각은 없었을 테니까. 특히 알라스테어에게 보이는 호의를 생각하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