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89
189화
잠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기다려 보아도 코델리아의 얼굴은 여전히 단호했다.
“위험할 텐데요?”
시청 쪽은 이미 시위대가 점거한 상태였다. 불을 지르고, 부수고, 시장 나오라고 외치고, 난리도 아니다.
상황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집과 직장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구제 방안도, 가족과 친지를 잃은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위로도 없었다.
시장은 중앙 정부의 지원이 나올 때까지 버틸 생각인 것 같았고, 외부 여론은 괴물의 존재와 불가사의한 현상을 파헤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고 부유한 숙녀의 기차 여행은 결단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물론 마차 여행도 마찬가지.
“어차피 던바틴 공작도 없잖아요. 로드 스털링과는 화해한 것 아니었어요?”
코델리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과했어요. 어쨌든, 로드 스털링에겐 아버지니까. 로드 스털링도 내게 사과했고요.”
원흉은 탈마인으로 돌아갔지만, 공작이 남겨둔 상처는 그대로 벌어진 채였다. 코델리아는 몸을 파르르 떨며 양손을 감싸 쥐었다. 피차간에 사과만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사과는 로드 스털링에게만이에요.”
“던바틴 공작이 뭐라고 했어요?”
“다시 약혼하면 어떻겠냐고요. 원한다면 자기들이 굽히고 들어가는 그림으로 해 주겠다고……. 가당치 않은 말인데 난 그걸 듣고 있었어요. 잠깐은 솔깃하기도 했고요.”
화가 났던 건 단지 공작의 뻔뻔함에 분노해서만은 아니었다. 잠깐이나마 그 말에 솔깃했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 때문에 말이 더 거칠어졌다.
물론 던바틴 공작에게 그 말을 한 건 후회가 없었다. 한 번쯤은 쏘아붙여 주고 싶었다. 미신에 빠져서 사리분별 못하는 늙은이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 말을 아들인 알라스테어 앞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당황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황량한 정원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알라스테어가 뒤쫓아 왔다.
“레이디 코델리아!”
원망도 분노도 없는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코델리아의 분노도 반쯤은 녹아 버렸다. 알라스테어는 울먹이는 코델리아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면서 이해한다고 말했다. 솔직한 말로 달갑지는 않지만, 이해한다고.
그래서 코델리아도 물을 수 있었다.
“공작……각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 알고 있었어요?”
“예?”
“약혼 말이에요.”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었다. 전 약혼자라는 미지근한 꼬리표만 남아 걸리적거렸을 뿐.
그러나 그때로부터 다시 몇 달의 시간이 더 흘렀고,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처럼 미지근할 수만은 없었다.
“염두에 두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 실책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레이디 코델리아.”
“좋은 조건이긴 하죠.”
코델리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던바틴 공작가는 금으로 탑을 쌓을 수 있을 만큼 거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왕국만큼의 역사와 그만한 명예를 지녔고, 북부 사교계에서는 왕처럼 군림해왔다.
그야말로 쇠락하지 않는 영광이 보장된 자리. 그런 가문에서 굽히고 들어오는 모양새를 연출하면서까지 모셔가겠다는데, 심지어 작위 계승 전까지는 나인 호더에 주로 머물 수 있도록 편의도 봐 주겠다는데, 세상에 이런 조건으로 결혼하는 여자가 얼마나 될까?
코델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코델리아 마벨우드에게 원치 않는 가문과의 결혼을 택하게 할 정도로 좋은 조건은 아니다. 이 시대의 결혼에 필요한 조건도 아니었다. 세상이 변한 지가 언제인데,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나 이따위의 제안이라니.
그 제안에 모욕감을 느낀 건 상대가 던바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던바틴이기 때문에 더욱 역겨웠다. 코델리아는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알라스테어를 노려보았다. 던바틴 공작의 눈과 꼭 닮은, 청년의 선한 눈동자를.
“던바틴은 용서할 수 없어요. 전부 지긋지긋해요.”
“……이해합니다.”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실례일지 모르지만, 알라스테어는 진심이었다. 그런 모욕을 받고 쉽게 용서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코델리아의 분노는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시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주라도 토해낼 것처럼 노려보던 코델리아가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던바틴은 끔찍하지만, 당신은 싫어하지 않아요. 이제 내 친구잖아요. 안 그래요?”
알라스테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대답은 하지 못했다. 대답 대신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묵직하게 두 사람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코델리아는 말 없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하다가, 치맛자락을 꽉 쥔 채 입을 열었다.
“나는, 난 제법 인기가 많아요. 사교계에서의 평판도 좋은 편이고요.”
알라스테어는 느닷없는 말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가만히 경청했다.
“청혼도 여러 번 받았고, 전부 좋은 신사들이었어요.”
그 말에는 달갑지 않은 기색을 언뜻 드러내면서도 최대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며 말을 고르던 코델리아가 힘주어 말했다.
“난 그따위 사업 계획서 같은 청혼을 받고 결혼해야 할 만큼 절박하지 않아요. 그런 결혼은 안 해요.”
알라스테어의 그늘진 얼굴에 묘한 기색이 번졌다. 코델리아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를 묻기 전에 빠르게 말했다.
“어쨌든, 로드 스털링 앞에서 부친을 모욕한 건 미안해요. 그건 내 잘못이에요. 알겠지만, 로드 스털링에게 상처를 주려던 건 아니었어요.”
“전 괜찮습니다.”
알라스테어는 현명하게도 ‘아버지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와 같은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건 코델리아의 알 바는 전혀 아니었으므로. 대신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다음 시즌에…… 나인 호더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만나게 되겠네요. 우리가 아는 체를 하면 사교계가 한 번 뒤집어지겠지만, 인사해도 좋아요, 알라스테어 렌프루.”
“그때 제가 춤을 신청한다면.”
코델리아는 이마를 찡그렸다. 짐짓 ‘그건 곤란한데.’ 하는 얼굴로 애를 태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것도 좋아요.”
청년의 얼굴이 환해졌다. 묻지 않은 질문의 대답도 받은 것처럼. 코델리아도 조금 웃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런 대화를 해 놓고 다음 시즌이 오기 전까지 주구장창 얼굴을 맞대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단 말이에요.”
발간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한 코델리아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혼자서는 위험하니 안 되고, 나는…….”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흘끔거렸다. 시더 클라이번은 여기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럼 에스페란사도 움직일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같이 움직이는 건 무리예요. 그렇다고 사이러스를 붙여줄 수도 없고.”
“괜찮아요. 가는 길은 렌프루 소령 부부께서 동행해 주시기로 했어요. 어제저녁에 뵈었는데, 나인 호더까지 가실 일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도 군부 일일 것이다. 스털링이 통째로 뒤집히는 사건에 해군도 상당히 깊이 엮여 있으니까. 대표로 가서 건수를 제대로 잡은 의원들에게 주머니 속까지 털리고 오겠지.
“두 분과 소령님의 부관, 렌프루 부인의 하녀도 따라가니까 안전할 거예요.”
그 정도면 열차 내에 던전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안전할 것 같긴 했다. 에스페란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 스털링도 알아요?”
코델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응접실로 내려온 알라스테어가 정확히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나인 호더, 렌프루 소령, 기차……. 똑같은 대답이 이어졌다. 시더가 지겹다는 듯이 나직이 혀를 찼다.
* * *
코델리아가 떠난 뒤에도 시더와 에스페란사는 스털링에서 한 달을 더 머물렀다. 새해가 온 지도 벌써 2주가 더 지났다.
그사이 시더 클라이번의 귀환을 촉구하는 편지가 몇 장, 러스틴 준장에게서의 사과 편지와 선물도 몇 번 도착했다. 핀리의 마력학 교수와 주고받은 편지는 책으로 엮어도 될 정도였다.
마정석 제련공과의 회의도 두어 번 있어서, 그 김에 에스페란사는 제련을 주문했던 마정석을 돌려받아 시더의 옷깃에 달아주었다. 에스페란사의 마력을 가득 담은 마정석이 옷깃 위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시더의 연구도 나름대로 순조로운 듯했다. 문외한이 보기에는 뭐가 진행되긴 한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예전에 완성했던 것을 개조하는 것뿐이니 어렵지는 않아요. 시설이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거야 본인이 자초했으니 불평할 자격도 없었다. 시더는 원시적이라고 혹평한 마력 측정기로 마정석 몇 종을 더 측정하고 부품 샘플을 끼웠다 빼기를 반복했다.
그 옆에서 에스페란사는 비스듬히 앉아 편지 더미를 뒤졌다.
그간 나인 호더의 저택에 무사히 도착한 코델리아로부터의 발랄한 안부 편지가 왔었으나, 에스페란사에게 보낸 두 장뿐이어서 알라스테어를 조금 실망시킨 바 있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로서도 마벨우드 남작에게 혼쭐이 나서 근신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알라스테어에게 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은 다행히 알라스테어 앞으로 쓴 편지도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그 편지 봉투를 옆으로 밀어두고 자기 몫의 편지를 뜯었다.
편지는 총 두 장, 한 장은 코델리아의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비뚤빼뚤 쓴 잭의 편지였다.
코델리아의 일상 이야기를 순식간에 읽고 잭의 편지로 넘어간 에스페란사는 중간쯤에서 시선을 고정했다.
유독 딱딱한 문장, 힘을 준 글씨로 적힌 구절을 다시 한번 읽어내렸다.
이건 단순히 물어봤고 사실대로 대답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배신인데, 얼터 지구 출신 꼬마가 힘에 굴복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보고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협박당한 건가.’
루크 헤이븐리는 에스페란사에겐 한주먹거리였지만, 작고 나약한 잭에겐 그 자체로 상당한 위협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술술 불었겠지. 루크 헤이븐리도 에스페란사를 적으로 삼을 생각은 아니었을 테니 잭을 곱게 돌려보냈을 테고.
‘하지만 왜 굳이?’
그가 잭에게서 가져간 정보는 이제 와서는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정보였다. 그런 가치 없는 정보를 얻어가면서 자기가 정보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건 능숙한 정보상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완전히 고의다.
그러니 한 번 더 꼬아보면, 그는 자신이 정보를 모으고 있다고 알리려는 속셈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