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9
19화
시더는 그의 테라스에 새까만 사신이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낫까지 들고 있었으면 완벽했을 것이나, 맨손으로도 충분히 스산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맣고, 후드 안쪽에는 눈알이 없는 해골이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백작의 저택에 느닷없이 나타날 법한 형상이 아니었다. 아니, 백작저에는 어떤 것도 느닷없이 나타날 수 없다. 아무리 꾸며 놓으면 그럴듯한 숙녀 같은 인물이라도 예의와 절차를 따라야 한다.
당혹에서 즐거움으로, 감정이 카드 뒤집듯 변했다.
“에스페란사, 멀쩡한 문 두고 그게 무슨 꼴인가요?”
시더가 허탈하게 웃으며 창문을 열어 주었다. 에스페란사는 새까만 후드를 휙 넘기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그가 잘 아는 얼굴이 드러났다. 태양 빛이 틀어 올린 머리 위를 하얗게 비추었다.
사신 같은 몸에 천사 같은 머리라니. 그 부조화가 썩 에스페란사와 닮았다.
“현관문 앞에 럭스 부인이 있었다고요!”
“그래서, 무서워서 다짜고짜 서재로 들어왔다고요?”
“안 들키고 들어올 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었어요.”
에스페란사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물론 시더 클라이번에게 들키는 건 상관없었다. 잔소리 좀 듣고 말지 뭐.
그러나 시더는 예의를 좀 지키라느니,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창문으로 들어오는 법이 어딨냐느니 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이고 짓궂게 말했다.
“당신에게 신사 계급의 예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죠.”
“지킬 땐 지키거든요?”
“그게 지금은 아니다?”
“아니죠.”
그러시다면야. 시더는 또다시 잘게 웃었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 새까만 후드부터 벗어요.”
“안 좋아할 텐데요?”
의아해했던 시더는 곧 그 의미를 깨달았다. 에스페란사의 후드가 발밑에 둥근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그러자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바지와 녹색 블라우스, 짧은 망토가 나타났다.
심미적으로는 상당히 훌륭하지만 역시 예술성 어쩌고 하기 전에 ‘망측하다’ 소리부터 나오는 옷이었다. 13년 후엔 정말 저런 걸 다들 입게 되나? 아직도 심적으로는 납득이 안 됐다.
“또 그 옷이군요?”
“몸을 움직이려면 이게 편해요. 눈에도 덜 띄고.”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사실 변명할 일은 아니지만.
“아, 로드 에이번데일. 잠깐 시간 있어요?”
“왜요?”
“이것 좀 봐 달라고요.”
인벤토리에서 꺼낸 수신기를 휙 던져 주자, 커다란 손으로 쉽게 잡는다. 대충 던졌는데 잘 잡네? 놀란 낯을 감추지 않자, 시더는 혀를 찼다.
“당신이 사격을 잘한다고 바보는 아니잖아요?”
뭔 소리야?
한참 후에야 이해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머리 쓰는 데 천재라고 몸도 못 쓰는 건 아니란 뜻인가? 맞게 이해했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눈치를 살폈지만, 시더는 자기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싹 잊어버린 듯 수신기만 살폈다. 대충 자기 잘났단 말이긴 하겠지.
“어디서 났어요?”
“위험한 거예요? 정보상이 줬어요.”
“아뇨, 위험한 건 아닌데. 위치 추적이 되네요.”
“……역시 그 작자 좀 수상해 보이더라니.”
“꺼 줘요?”
“이미 들켰을 텐데. 그래도 꺼 주세요.”
걱정되는 게 하나 있었다. 저 물건이 인벤토리에 있는 동안에도 위치 추적이 됐을까? 차라리 추적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에스페란사가 에이번데일 저택에 사는 건 알고 있었으니, 새삼 놀랄 것도 아니다. 그자도 이것이 백작의 손에 들어가면 낱낱이 까발려질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냥 알던 사실을 재확인하는 용도밖에는 안 되는데.
만약 인벤토리에 있는 동안 추적이 안 됐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당장 어쩔 수 있는 건 없었다. 시더가 능숙하게 스티뮬러로 수신기를 자극하고 정교하게 얽힌 초소형 파이프들 사이에서 위치 추적과 관련된 파이프를 떼어 내는 사이, 에스페란사는 정보상의 위험성에 대해 고민했다.
“로드 에이번데일. 당신 정보상에 대해 아는 것 없어요?”
“없어요.”
위치 추적 장치를 떼어 낸 시더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 왜?
“난 곱게 자란 귀족 도련님이잖아요. 당연히 없죠.”
저런 소릴 자기 입으로 태연하게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귀족 도련님이니까 더더욱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귀족들은 원래 다 뒷골목과 지저분한 커넥션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
나만 그렇게 생각해? 원래 공작 나리들은 뒷골목 정보 길드장과 모종의 친분이 있고 다 그런 거 아냐?
“사업가들은 있겠죠.”
“……사업가들도 귀족이잖아요?”
“그게, 그렇게 일반화시킬 수만은 없기도 하고.”
젠트리와 귀족 계급의 오묘한 경계라든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걸 줄줄이 설명할 만큼의 열정은 없었다.
“사교계에 당신을 소개라도 하려면, 기본 상식은 얘기를 해야겠네요.”
졸지에 기본 상식도 없는 애가 됐다. 귀족 사회가 처음인 것도 아닌데.
“그래도 13년 후엔 기사 작위도 있었는데요.”
“기껏해야 연금 받는 데 썼겠죠.”
너무 정곡이라 할 말이 없었다. 여왕에게 직접 수여 받은 훈장이 제복을 꽉 채울 때쯤 기사 작위를 받았고, 작위가 생기자 퀘스트 완료 시 받는 금액에 무려 30%가 추가됐다. 그게 정말 꿀이었는데.
“귀족이 뭔지 알아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깜박이다가 더듬거렸다.
“돈 많고,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지배 계층?”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단 ‘귀족’이란,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하지 않는 계층이라고 해 두죠.”
요컨대, 건물주란 말이다.
누구는 죽어라 몬스터 퇴치해서 돈을 모으는데 누구는 앉아서 돈이 쌓인단 말이지.
“마도 공학 연구도 노동 아니에요? 돈도 벌 거고.”
“그런 건 취미죠.”
“아아아, 취미…… 그러시구나.”
진짜 재수 없다.
“그, 그럼 의원직은요? 그것도 취미예요?”
미간이 확 좁혀지는 게, 어지간히 기분 나쁜 모양이다. 뭘 잘못 말했나? 눈을 데구루루 굴리자, 시더는 혀를 차며 말했다.
“돈 한 푼 안 주는 명예직이에요.”
“아, 돈을 안 주는구나. 그치만 돈 많잖아요.”
“많죠.”
그는 선뜻 대답했다. 아, 재수 없고 부럽다.
바람에 부드러운 금발이 푸스스 날린다. 곧은 이마가 드러나자, 눈매가 한층 더 또렷해 보였다. 가만히 앉아 있는 그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다 눈을 마주치고 빙그레 웃으면 그제야 살아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살아 있는 사람. 사람이라고?
사실 그렇다.
‘게임 시작도 전에 죽을 캐릭터를 이렇게까지 공들여 설정할 필요 있나?’
시더 클라이번은 게임 캐릭터보다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온 이후 만난 사람들은 다 그랬다. 그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황금 발톱’ 속 NPC들은 다 그랬으니까.
대체 얼마나 오래 준비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진짜 같은 디테일로 유명했던 게임이었다. 에스페란사가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은 채 거리를 둔 것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게임 속 세상에 과하게 몰입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게임 오픈 이후의 이야기다. 게임 오픈 시점에서 이미 죽은 인물까지 이렇게 진짜 같을 수가 있는가? 외양만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변화하고.
그러니까, 이곳이 정말로 가상 현실 게임 속이 아니라 실제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이야기다.
놀랍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분했다. 마음속으로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걸 깨달은 계기가 시더 클라이번의 웃음이라는 것이 조금 거슬릴 뿐이다.
한동안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가는 판타지 소설도 꽤 많지 않았던가? 그때도 ‘황금 발톱’을 하고 있었던 에스페란사는 금방 덮어 버렸었다.
‘혹시나 황금 발톱에 들어올까 봐…… 였지.’
근데 그게 진짜가 돼 버린 모양이다. 역시 평화롭고 재화 잘 주는 농장 게임을 했어야 했다. 아니면 프롤로그부터 남주들이 여주에게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연애 게임이나.
‘근데 난 왜 미쳐 버린 스팀펑크 몬스터 헌팅 게임이냐고.’
“에스페란사? 무슨 생각 해요?”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이게 설령 다른 차원이나 다른 세계라고 해도, 퀘스트 창이 있는 한 원래 세계와 연결돼 있으니까. 지금은 퀘스트 완료 보상인 ‘귀환증’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생각의 매듭을 묶었다. 그리고 태연히 말했다.
“거참 부러운 인생이란 생각이요.”
“다들 그러긴 하죠. 나름의 고난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남들이 하드모드로 인생을 깰 때 혼자 튜토리얼처럼 깨 온 양반이 쉽게도 말했다.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라고 생각하니, 시더 클라이번은 두 배로 재수 없어졌다.
“아, 의원직 하니 말인데, 내일 집에 손님이 올 거예요.”
원래 이런 집은 문지방이 닳도록 손님들이 드나들어야 하는데, 2주 동안 아무도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한 것이었다. 저 성격을 생각하면 놀랍진 않지만.
시더 클라이번이 응접실에서 티타임을 가진 것도 2주 동안 다섯 번을 넘기지 못했다. 딱 네 번.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라고요?”
“아뇨, 마주쳐야 하니까 변명할 거리가 필요하다고요.”
“변명?”
“장성한 숙녀분께서 외간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 머물게 된 경위.”
“혼자 사는 집은 아니잖아요?”
럭스 부인도 있고, 애니도 있고. 여자는 많다. 남자도 많고. 그들 모두 이 집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시선에서 고용인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렇게까지…… 대우가 나쁘진 않잖아요.”
그 정도로 고용인의 인권이 바닥을 치는 사회는 아닐 텐데? 성격 나쁜 주인들은 꽤 있고, 고용인에 대한 가혹 행위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보편적이거나 권장되는 사회는 결코 아니다. 특히 오래 일한 고용인은 아무리 주인이라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하워드나 럭스 부인처럼.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교양 없이 붙어먹더라도 그걸 제지할 수 있는 위치의 기혼, 중년 여성이 없다는 말이죠.”
“교양 없이… 붙어먹…… 아, 네.”
고상하신 백작님 체면에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안 이러던 사람이 이러는 걸 보니 어지간히 귀찮은 모양이다. 에스페란사가 은근히 눈치를 줬지만 시더는 거침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그는 묘한 어조로 단정했다.
“우리가 ‘진짜’ 그러지 않았다는 보증인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남이 붙어먹는 거 구경하는 데 미쳐 버린 세계관이네요.”
에스페란사도 결국 상스러운 단어를 내뱉고 말았다. 남이야 붙어먹었든 말았든.
“아무튼 이 사회도 어지간히 보수적이지만, 그래도 이런 일탈적인 행동이 허용되는 몇 가지 경우가 있어요.”
손을 곧게 펼쳐 내민 시더는 손가락을 차례차례 접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