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그쪽이 더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해.’
에스페란사는 이쪽에 정보망이 전혀 없다. 그때그때 정보상을 쓰기는 하지만, 갈리스턴 공작처럼 정보상을 손끝으로 부리며 남이 쓴 지폐를 모아오는 등의 신기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쪽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다분히 티를 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굳이 그런 짓을 한 이유는……. 지금 갈리스턴 공작을 떠나 다리아의 휘하로 들어갔다던 루크 헤이븐리가 구태여 이쪽에 존재감을 내비치는 것은, 아마 이쪽에도 한 발 걸쳐놓겠다는 뜻일 것이다.
이걸 영리하다고 해야 하나, 야비하다고 해야 하나. 치밀하다고 보는 게 옳을까? 하지만 다리아 같은 인물을 상대로 벌이기에는 상당히 무모한 짓이다.
“으음…….”
“무슨 일 있어요?”
콧등에 테가 엷은 안경을 걸치고 만년필로 숫자를 적어 내리던 시더가 종이 너머로 눈을 들었다. 에스페란사가 잭의 편지 이야기를 하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이 어지간히 무서운가 보군요.”
“다리아보다 더 무서운가?”
“어느 쪽이든, 자기 목숨은 하나란 걸 잘 인지하고 있는 거죠. 내버려 둬요. 나중에 자기 공로를 따지거든 목숨만 살려 주면 되는 것 아닌가요?”
“하긴, 우리한테 뭘 해 준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용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쪽에서도 이 이상 이쪽에 도움을 주는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겠지만,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었다.
“나인 호더로 돌아가면 헤이븐리를 한번 만나 보는 걸로 해야겠…….”
에스페란사가 말끝을 흐렸다. 시더가 ‘왜요?’ 하고 물으려던 순간, 누군가가 뛰어오는 듯한 발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문 앞에서 멈췄다.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선했다.
시더가 문을 향해 눈짓하자 에스페란사는 편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애니, 들어와.”
문을 열어젖힌 애니는 인사말 한마디 없이 대뜸 편지를 내밀었다.
“방금 우편 배달부한테서 받았어요. 글라일리 하우스에서 온 급보예요!”
그 말대로 편지에는 특급우편임을 뜻하는 커다란 물레바퀴 우표가 붙어 있었다. 주소는 분명 글라일리 하우스. 발신인은 밀런.
“밀런?”
“집사겠죠.”
“아, 맞다.”
이쪽 밀런의 아버지였나. 급하게 오느라고 얼굴만 겨우 봤더니 가물가물했다. 에스페란사는 급한 소식이라는데도 턱을 괸 채 마력 회로를 고치는 데 집중한 시더 대신 편지를 거침없이 뜯었다.
내용은 간략했다. 하지만 놀라웠다. 몇 줄 되지 않는 편지를 세 번이나 다시 읽어야 할 정도로.
“우리, 에이번데일로 가 봐야겠어요.”
그 말에 시더가 고개를 들었다.
“기껏해야 누가 죽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무튼, 그런 게 아니라.”
숨을 크게 들이쉰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저택 뒤편 숲에 화재가 났대요. 그래서 ‘그’ 창고가 전소됐다고 하네요.”
만년필 끝에서부터 잉크가 번졌다.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로 가만히 에스페란사의 눈을 바라보던 시더가 낮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에이번데일로 가야겠어요.”
* * *
리튼 주, 에이번데일 시.
한 쌍의 남녀가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상점가를 느긋이 걷고 있었다. 번화했다고는 해도 소도시인지라 그리 부산스럽지 않았다.
스털링 항구에서 일어난 사건이 오스던을 뒤흔들고 있는데도 이 작은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화로웠다. 아마 그 항구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작은 도시에도 한 차례 괴수들이 방문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저 남의 일이려니 그 재난을 넘겨버린 듯했다.
“백작은 여기 있는 내내 나와 보지도 않았나 본데? 몇 달을 있었다는데 어떻게 흔적이 하나도 없어?”
다리아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머리를 휙 쓸어 올렸다. 소도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긴 머리를 했는데도, 낯선 사람이라서인지 틈틈이 향하는 시선이 꽤나 따갑다.
“집에 뭐든지 다 있는데 나와 볼 이유가 뭐가 있겠어.”
사이러스가 비교적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 추운 날씨에 하루 종일 도시 전체를 쏘다니고도 얻은 게 하나도 없는데 그라고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아무래도 저 저택을 뒤져 봐야겠는데. 당시엔 고작 중학생 내지 고등학생이었을 테지만, 놈이 정말 ‘황금 발톱’의 제작자일 가능성이 없진 않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리아는 반 이상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그 위대한 발명을 재현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 그러니 그 빌어먹을 여자가 다리아의 보물을 빼앗으려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시공간 기계’에 대한 단서도 이 에이번데일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으로 왔는데, 도시를 내내 돌아다녀도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면 역시 백작의 거처, 저택을 뒤져 볼 수밖에.
“그런데 무슨 수로 저택을 뒤져? 잠입이라도 하게?”
“못할 건 없지. 어차피 주인 없는 저택이잖아. 게다가 관광지고.”
길을 잃은 관광객인 척 쏘다니는 방법이 제일 확실했다. 그러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도망치지, 뭐. 소득만 있다면 들켜도 상관없었다.
“그건 그렇지만…….”
남매 중 조금 더 일반적인 도덕 관념을 가진 사이러스 쪽은 그리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세계 사람들의 재산권을 존중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 말고는 없는 것 같네.”
“그렇다니까. 그럼 일단 식사나 하고 가자. 어차피 점심시간 때는 안 연다더라.”
기차역에서 받아온 팸플릿을 흔들어 보인 다리아가 가까운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식당은 적당히 먹을 만했다. 다리아는 김이 올라오는 그릇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좋은 것, 편한 것에 익숙해지기는 이토록 쉽다. 돌아가면 걸레짝 같은 빵을 오로지 살기 위해 씹어야 하는데, 여기선 속 편하게 고급 식당의 음식을 평가하고 있다니.
그러나 앞으론 더 익숙해질 것이다. 이런 생각조차 들지 않도록. 걸레짝을 씹고 구정물을 마시던 과거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도록.
다리아는 부드러운 흰 빵을 한입에 밀어 넣었다.
“가자.”
아직 식사 중이었던 사이러스가 한숨을 내쉬며 다리아를 따라 일어났다.
에이번데일 백작의 저택, 글라일리 하우스는 이 번화가 끝에 있었다. 그들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오랜만에 느긋하게 저택을 향해 걸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쓰러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건 혹독하고 비참하며 보상조차 없는 고난. 상실의 슬픔보다 다음 날 먹을 것을, 나약한 몸뚱이를 보호해 줄 알량한 권력을 찾아 헤매야 하는 삶.
그러나 이곳은 다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건강한 몸과 압도적인 힘, 마르지 않는 부를 가졌으며, 약간의 수고만으로도 큰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실로 사랑스러운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사이러스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밝았다. 눌러쓴 모자를 조금 위로 들었다.
“헌터 씨! 사이러스 헌터 씨 맞으시죠?”
그 때, 가까운 마차 근처에 서 있던 어린 숙녀가 단숨에 다가왔다. 분명히 초면이었는데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누구…… 윽.”
정직하게 누구냐고 물어보려던 사이러스는 별안간 옆구리가 비틀리는 통증에 말을 멈추었다. 숙녀, 루이즈 보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그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 음. 제가 기억나지 않으세요?”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오랜만이에요, 헌터 씨. 에이번데일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찾으신다는 것은 무사히 찾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어디서 묵고 계세요? 묵을 곳이 정해지지 않으셨으면 저희집은 어떠신가요? 아버지도 반가워하실 거예요. 헌터 씨가 가져오시는 기상천외한 발명품들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셨으니까요”
도통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다리아가 사이러스를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의구심을 애써 무표정으로 감추고 있는 동생의 얼굴에서는 거짓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확히 ‘사이러스’라고 말했다. 그런 이름에 이런 얼굴, 이런 체격을 가진 남자가 둘일 것 같진 않았다.
“헌터 씨?”
“……아. 네.”
“괜찮으신가요?”
“오늘 몸이 안 좋아서 그렇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다리아가 과장되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러스는 순간 역하다는 얼굴을 했다가 다리아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살이 빠지셨는지 체격이 좀 줄어든 것 같기도, 앗. 품평하려던 건 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네, 네. 그런데 누구시죠?”
루이즈 보일은 당혹스런 얼굴로 사이러스와 다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닮은 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사이러스가 ‘찾던 것’이에요.”
“예?”
이 여자는 그쪽 사이러스가 찾던 게 뭔지 모르는군. 뭘 찾고 있었을까……. 그걸 알면 그 사이러스란 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하필 이 에이번데일에, 사이러스와 외모도 이름도 똑같은 자가 나타난 것은.
그자에 대해서 더 캐내고 싶었는데, 마차 쪽에서 어머니로 추정되는 귀부인이 루이즈를 불렀다.
“루이즈! 거기서 뭐 하는 거니? 살 건 다 샀으니 이제 가자.”
“네, 네. 어머니! 만나 뵈어서 반가웠어요, 헌터 씨. 그리고…… 음.”
끝내 이름을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다리아를 향해 어설픈 미소를 지은 루이즈가 덧붙였다.
“아, 혹시 로드 에이번데일을 뵈러 오신 거라면 그분은 안 계세요.”
오호라, 무려 에이번데일 백작과도 아는 사이다?
“……그놈이 우리 편일 가능성은 적어 보이는데?”
루이즈가 탄 마차가 사라지고, 심기가 불편해진 다리아가 사이러스의 종아리를 툭 걷어찼다. 사이러스는 말없이 눈을 굴렸다. 그는 아무 짓도 안 했지만, 왠지 벌써부터 배신자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놈일까…….”
“나중에 생각해. 어차피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답도 없는 의문을 끌어안고 있는 것보다는 해가 지기 전에 글라일리 하우스에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시간이 늦어지면 관광객도 줄어들 테고, 그럼 외부인의 출입이 눈에 띌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