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시더 클라이번은 재가 된 오두막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숲은 꼬박 이틀을 탔다고 한다. 연기가 폐부를 찌르고 눈앞이 혼미해지는 거센 불꽃 앞에서는 바다와 하늘을 정복한 첨단 기술조차 무색해졌다.
“연구소는 그런대로 보전이 된 것 같습니다. 내부 기계들은 상당히 망가졌겠지만.”
시더가 아버지의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그저 서 있는 동안, 연구소 내부를 확인하고 온 밀런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불이 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화재가 잦은 곳은 아니니까요. 사실 수십 년간 한 번도 없었죠.”
하지만 확률은 숫자놀음일 뿐이다.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재난은 일어나면 그뿐. 시더는 쓴웃음을 지었다. 부주의했던 탓이니 할 말이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밀런은 말없이 반대편을 가리켰다. 에스페란사는 흔적 없이 전소한 폐건물의 잔해 위에 서 있었다.
조각난 건물의 뼈대와 시커멓게 타다 못해 녹은 문, 망가진 부품 조각들. 그리고 그 꼭대기, 마치 무너진 교회 위의 성물처럼 드리운 긴 그림자.
“왜 거기 있어요?”
“뭔가 이상해서요.”
“어떤 것이?”
에스페란사는 눈을 돌렸다. 긴 후드 자락과 탐스런 머리칼이 매서운 바람에 흩날렸다.
“잘은 모르지만, 이런 일이 원래도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랬다면 사이러스가 언급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두 사람이 화재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화재가 자주 일어나는 지역이 아닌데, 하필 시더의 연구소가 있는 숲에 이틀 동안 타오를 정도의 엄청난 불이 났다는 게 거슬렸다.
그러나 모든 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에스페란사의 이 의혹은 그저 비이성적인 감에 불과했다.
“누가 의도적으로 불을 질렀다고 생각해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불은 거셌고, 숲은 넓었다. 방화범은 혼란을 틈타 어디로든 도망갈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대륙 끝까지 달아났을지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긴 사유지예요.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죠.”
“총 들고도 들어오던데.”
그랬었지. 시더는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바꾸었다.
“외부인의 출입이 ‘조금’ 제한되어 있죠. 그거야 어떻게든 가능하다고 치고. 만약 누군가 그랬다면 둘 중 하나겠네요. 미쳤든지, 내가 아주 꼴 보기 싫든지.”
일단 미친놈의 소행일 가능성은 접어두고. 시더는 여전히 잔해 위에 서 있는 에스페란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에스페란사의 등 뒤로 밝게 비추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셨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당신이 여기 없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을 텐데.”
시더는 도망치듯이 조용히 스털링으로 향했지만, 그를 추적하러 나인 호더로 올라간 에스페란사의 행적은 꽤나 요란했다. 조금만 찾아본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연구소에 음침하게 숨어서 연구나 하려고 부재를 꾸며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아니면 내가 없는 틈에 내 연구를 훔쳐 가려고 했을 수도 있고.”
“내 편견이긴 하지만요.”
에스페란사는 잔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더가 눈살을 찌푸리자, 오히려 보란 듯이 더 방만한 자세로 고쳐 앉으며 시더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남의 연구를 훔쳐 갈 만큼 본격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불 지르고 숲을 가로질러 도망갈 만큼 체력이 좋진 않을 텐데요.”
“사람을 썼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건 넘어가도록 해요. 그리고 편견 맞아요.”
눈살을 찌푸린 시더가 그렇게 말하며 에스페란사가 앉은 잔해더미 근처로 다가왔다.
“여기 앉을래요?”
“아뇨.”
단칼에 거절한 그는 천천히 다음 말을 꺼냈다.
“여기에 연구소가 있는 건 비밀이지만, 일단 보기만 하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을 테니 그건 문제가 안 되겠죠.”
달리 어느 미친놈이 말도 없는 마구간에 공기 정화 설비를 갖춰놓고 있겠는가.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열심히 주억였다.
“하지만 아마 능력 부족으로 들어가 보진 못했을 테고. 당신도 알다시피…….”
“자기 자랑은 생략해 주세요.”
시더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내 대단한 발명품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외부 공격을 받으면 방어 태세를 갖추게 되어 있어요. 방어가 뚫리면 저택을 폭파하게 설계해 뒀죠. 그런데 정작 연구소는 멀쩡해요. 그럼 어딜 건드렸을까. 설마 죽은 아버지를 흠모하던 귀부인의 소행은 아니겠죠?”
오두막을 가리킨 시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간단한 소거법이다. 그러면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에스페란사가 발 딛고 서 있던 바로 이 건물……이었던 무언가.
“만약 방화라면 말이죠. 의도한 누군가가 있었다면 연구소를 노리는 게 가장 합리적이에요. 설령 이 폐건물에서 어떤 낡은 기계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가치가 없죠. 저기 진짜가 잔뜩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낡은 기계를 노리는 사람들도 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시더는 허리를 숙여 서슴없이 폐건물의 잔해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미쳤어요? 그러다 다쳐요!”
“자, 봐요.”
날카로운 파편에 긁힌 손등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에스페란사가 그 손에 들린 부품 조각을 응시했다.
“그게 왜요? 시공간 기계 부품 조각이잖아요.”
“내가 이 기계를 만든 지 벌써 10년이에요. 에스페란사, 마도 공학은 젊은 학문이고, 그 어느 분야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요. 자연히 부품의 규격도 10년 전의 것과는 상당히 달라졌죠.”
“부품 규격 같은 걸 확인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요?”
녹아서 엉겨 붙고 벽에 깔려서 납작해진 부품 조각을 보란 듯이 들고 있던 시더가 빙그레 웃었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합금의 질도 마력 투과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발전했어요. 그러니까 간단한 문제예요. 10년 전에 이것과 같은 합금을 쓴 부품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그걸 알아보겠다고?
“……는 경찰이 알아서 할 문제죠. 하지만 의문은 있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필요도 있겠네요. 당신이 맞아요.”
“그런데 불을 지르면서 굳이 가짜 부품 조각을 뿌려놨다는 건 말이에요, 진짜는…….”
누군가 가져갔겠지.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범인이 드러난다. 시더는 한 손으로 엉겨 붙은 금속 조각을 던졌다 받았다.
“불까지 낸 보람이 없네요, 딱하게도. 범인이 있다면 그건 우리의 적이고, 적은 시공간 기계의 시제품을 확보했어요. 개발 경쟁에 들어가겠군요.”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의 걱정도 없었다.
마주 본 미소는 같은 뜻을 담고 있었다.
* * *
그을린 문이 끽끽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이윽고 황동빛 파이프가 복잡하게 얽힌 연구소 내부가 드러났다. 화재의 여파로 일부는 무너졌고 일부는 너덜거렸다. 시더는 이 모든 것을 보수할 생각에 혀를 찼다.
“그냥 다 무너뜨려 버릴까?”
그게 차라리 편할 것 같기도 했다. 처음부터 다시 짓는 거다. 그러나 성큼성큼 앞서나가는 에스페란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에스페란사가 떠난 이후에나 가능할까. 그런 여유라면 영영 오지 않아도 좋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머리가 아프더라도 적당히 보수해서 쓰는 게 나았다.
[안녕하십니까, 숙녀분? 저는 변호사 브론즈입니다. 남편분의 살인사건은 무사히 해결하셨나요? 영지 상속은 상속법의 전문가, 저 브론즈에게 맡겨 주십시오!]에스페란사는 말없이 변호사 브론즈를 꺼 버렸다.
“얜 왜 저번부터 나한테 시비예요?”
“글쎄요. 브론즈 시리즈는 어릴 때 만든 것들이라 자유분방한 편이죠. 당신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오토마톤에 마음이 어디 있어요.”
에스페란사는 혀를 차며 똑같이 생긴 황동 토끼 오토마톤들을 지나쳤다. 레일에 매달린 청소부 오토마톤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투덜거리긴 했지만, 기계가 가득한 연구소에서 나는 익숙한 소음이 반가웠다.
에스페란사가 깨끗이 관리된 연구실 소파에 몸을 눕히자, 시더는 나직이 혀를 차며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 홀로그램으로 뜬 연구소 내부 구조도에 붉은빛이 깜박거렸다. 책상에 붙은 세피아빛 화면에는 알 수 없는 글자가 빽빽했다. 쿠션을 끌어안은 에스페란사가 고개만 들어 물었다.
“어때요?”
“화재 때문에 보안이 뚫린 곳이 몇 군데 있어요. 전체적으로 정비를 해야겠네요. 그리고 나인 호더에서 연구를 시작하려면 이쪽의 대형 장비를 몇 개 옮겨야 하는데.”
“그건 내가 하면 돼요.”
“물론 당신도 필요하지만, 사전 작업이 몇 가지 필요해요. 다 처리하려면 못해도 2주일은 걸릴 것 같네요. 그쯤이면 나인 호더 저택의 공사도 끝났을 테고.”
2주일이면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더 도울 건 없어요?”
“그때그때 필요하면 말할게요. 어차피 2주간은 하던 연구는 손도 못 댈 테니…….”
“잘됐다.”
“저런. 누구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소파에 길게 몸을 늘어뜨린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올려다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게요. 날 위해서 하는 일인데.”
“난 더 이상 환자도 아니고요.”
머리맡으로 다가온 시더가 허리를 굽혔다. 에스페란사는 그의 목을 끌어당겨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서도, 가라앉은 눈은 고민을 떨칠 수 없었다.
변명거리도 없는 이제는 이 갈등에 무슨 이름을 붙일 것인가?
* * *
2주는 답을 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1월이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지나갔다. 새해에 대한 기대감도, 연말에 벌어진 끔찍한 재난이 가져온 공포도 쌓인 눈이 녹듯이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에스페란사는 신문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다 됐어요?”
“끝났어요.”
보안 체계를 재점검하고, 가져가야 하는 대규모 기계를 분리해 인벤토리에 넣었다. 저택 앞에 세워둔 시더의 증기 마차에는 커다란 짐가방 다섯 개가 올라갔다. 장비와 책을 제외한 숫자였다.
커다란 손에 맞춘 듯한 가죽 장갑이 레버를 쥐었다. 묵직한 레버를 당기자, 그들이 서 있는 방을 중심으로 기계 부품이 돌아가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문을 나서는 뒤로 철문이 철컥철컥 내려왔다. 발명품들이 가득하던 창고가 완전히 닫히고, 연구소의 불이 꺼졌다.
칸마다 제복 입은 경비원이 선 기차가 나인 호더를 향해 달려갔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지나, 집이 듬성듬성 꽂힌 벌판을 지나, 바다처럼 넓은 강을 따라. 금과 매연이 가득한 시계탑의 도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