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94
194화
“어쩐지 피곤해 보이네요.”
“……그래도 난 잤어요.”
누구랑은 다르게. 에스페란사는 괜히 속내를 들킨 기분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퉁명스레 대답했다. 약간 초췌한 얼굴을 손끝으로 쓸어내린 시더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인 호더로 돌아온 밤이다. 생각이 많았던 건 피차일반이다. 다만 에스페란사는 애써 잠을 청했고, 시더는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잠이 안 오는데 누워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밤에 자고 낮에 하면 되잖아요.”
“그게 말처럼 돼야 말이죠.”
결국 연구실에 숨어 들어가서 밤을 샜단 소리다. 참 고맙지 않은 열정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신문을 뒤적이던 손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맙지 않은 입을 과일을 찔러넣은 포크로 대충 막아버렸다. 시더가 눈을 흘기자 보란 듯이 웃었다.
“스털링 일은 해군 쪽에서 누구 하나가 책임지고 옷을 벗은 모양이고, 복구 사업에 예산 배정도 된 것 같고, 구호 단체들도 활동을 시작했고.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늦은 거죠.”
포크를 내려 둔 시더가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연구실 벽면의 커다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단 건 템프턴 내각의 지배력이 약해졌단 뜻이네요. 그거, 여왕이 원하던 거잖아요? 다리아가 아직도 여왕이랑 손을 잡고 있는 건가?”
“아마도요.”
시더는 대답을 잊지 않았으나 집중하느라 그 대답은 다소 단답에 가까웠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스로 고민해 보았다.
‘내가 여왕이라도 저쪽 손 못 놓지.’
괘씸한 것과는 별개로 납득 가는 결론이다. 그리고 에스페란사가 다리아의 입장이었더라도, 왕실이라는 끈을 놓을 이유가 없었다. 다소 강제적으로라도 묶어두는 게 나았다.
상황이 대충 이러하다면, 다리아는 현재 왕실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어제 본 그 지팡이 같은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만드는 쪽에 재료를 대고 있든지.
목표가 모자 가게 때와 같다면, 다리아는 여전히 ‘게임 속 세상’을 빚어내기 위한 행보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이미 한 번의 강렬한 실패로 던전도 몬스터도 당초의 예정보다 일찍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고작 몇 달 차이일 뿐이기도 했다. 이미 준비해 놓은 계획이 있었겠지. 당황했겠지만, 대처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다리아는 아예 이 일을 기회로 상류층부터 마도구에 몬스터 부산물을 쓰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관련된 업계를 키우고, 양지화시킨다. 그래야 몇 년 후에 이 세계에 방문할 헌터들이 몬스터를 사냥하고 그 부산물을 팔면서 이 세계를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역시 마법 용품 가게에 들러보는 게 좋겠다.
“빨리 다녀와야겠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당신도 같이 가요?”
그 말에 시더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에도 부품 몇 개의 위치가 바뀌었다.
“그럼 날 버려두고 가려고 했나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뭘 버렸다고.”
어디서 못된 말만 배워 갖곤. 작게 투덜거리자, 시더가 심술 섞인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오래 같이 있는 게 좋으니까요.”
“……그래요. 혼자 두면 위험하기도 하고.”
모든 감정을 빼놓고 최대한 사실만을 건조하게 기술하자면, 이쪽은 시더가 죽으면 끝이다. 시공간 기계 제작 자체가 불가능해질 테니까.
다수의 수재들을 갈아 넣고 있을 다리아와 달리 이쪽은 오직 시더 클라이번의 천재성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다리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에스페란사를 건드릴 필요도 없다. 시더만 없으면 단번에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에스페란사보다 시더를 건드리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에스페란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시더는 혀를 찼다.
“그건 괜한 걱정이에요.”
“……죽을 뻔했던 건 사실이고요.”
다리아가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미 한 번 죽을 뻔했다. 심장이 발끝까지 추락하던 그때의 기분을 에스페란사는 방금 전의 일처럼 똑똑히 기억했다.
“글쎄요. 내가 그 사람들이라면 날 죽이는 대신 기계를 완성하도록 둘 것 같은데.”
시더가 다독이듯 말했다. 에스페란사는 이마를 찡그렸다. 그것도 말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잠깐만, 그럼 같이 안 가도 되는 것 아니에요?”
“같이 가고 싶은 건 내 안전 때문이 아니었잖아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시더는 다시 스크린에 눈을 고정한 채로 회로 몇 개를 고쳤다.
레버를 당기자, 기계 부품들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면 전체가 울리는 듯했다. 황동빛 파이프라인이 아까와는 다른 구조로 연결됐다.
시더는 그 모습을 잠시 노려보다가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갑을 벗었다. 수건으로 손을 닦아 낸 그는 에스페란사의 찡그린 코끝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보다, 혼자 가서는 그 가게에서 뭘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걸요. 원래 그런 가게는 사람을 가리니까.”
오래 거래해 온 사람, 좀 더 믿을 수 있는 손님에게만 주는 정보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물론 묶어놓고 때리면 어련히 불겠지만서도, 죄 없는 가게 주인에게 몹쓸 짓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더는 빙그레 웃었다. 묘하게 얄미웠다.
던바틴에서 사 온 옷은 나인 호더에서 입기에는 무거운 감이 있었지만 오늘 날씨에는 적당히 어울렸다. 먼저 준비하고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시더는 에스페란사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털모자는 어디 갔어요?”
“그걸 쓰면 더워 죽을걸요.”
“잘 어울렸는데.”
시더는 은근히 몇 번 더 권유했지만, 에스페란사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복슬복슬한 털모자 대신 뻣뻣하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묵직한 코트를 걸치는 것만으로도 겨울옷에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증기 마차에 올라탔다. 간밤에 온 눈이 녹아 시커먼 물이 고였다. 시더는 질척거리는 바닥에서 슬쩍 지팡이 끝을 뗐다.
“외출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네요.”
“그래도 오랜만이잖아요.”
스털링에서의 외출이 마지막이었다. 에스페란사도 시더도 본래 의식주가 갖추어지기만 하면 바깥으로 나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데다가, 에이번데일로 돌아온 후부터는 한가로이 외출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네요.”
시더는 창밖으로 밤송이 같은 모자를 쓴 어린아이들이 지나가는 모습, 청소부 오토마톤이 쌓인 눈을 쓸어내는 모습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이 너무나 빨랐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추억 따위를 쌓아 두는 것은 별로 현명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건 이 세상, 에스페란사가 잔뜩 흔적을 남겨 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몸도 이름도 가짜, 그저 기억밖에 남지 않을 에스페란사는 되새길 추억이라도 가득 안고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에스페란사가 그를 잊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추억이라도 한 아름 안겨 보낼 수 있다면 그편이 좋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이것대로 심술이 났다.
“어? 저기 저 건물! 봤어요?”
“……못 봤어요.”
생각에 빠져 있던 시더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켜켜이 쌓여 가던 심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에스페란사가 걱정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멍하더라니. 아픈 건 아니에요?”
“멀쩡해요. 그보다 무슨 건물이었는데요?”
“원래 뭐 하던 곳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내가 아는 마법약 상점으로 바뀐 것 같아요.”
“마법약 상점?”
품목조차 낯설었다. 마법약이라고? 그런 걸 시판 제품으로 판매한단 말인가? 시더는 사이러스의 인벤토리에서 끝없이 나오던 포션을 떠올렸다. 대량생산이 되는 모양이지.
“아직 간판을 달지는 않았지만, 꾸며놓은 걸 보면 대충 알잖아요.”
진열장의 모양과 외벽의 색깔 같은 것들이 눈에 익었다. 쉼 없이 짐을 옮기는 젊은 주인과 귀엽게 생긴 오토마톤도. 에스페란사의 기억 속 마법약 상점은 이보다 더 낡고 허름했고 주인도 지금보다 열 살은 더 많았지만,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마법약 상점이 끝이 아니었다. 해터의 모자 가게, 윈드밀 서점, 하나하나 이름을 댈 필요도 없었다. 캐틀릭 스트리트의 절반은 공사 중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에스페란사도 이미 아는 모습이었다.
“저번에 나인 호더에 왔을 때도 이랬는데, 더 비슷해졌어요.”
시청 부지에 세워질 헌터 협회 건물처럼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 하는 것을 제외하면, 게임 속에서 수없이 거닐었던 번화가의 모습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생각보다 더 빨라요.”
모든 게 그랬다. 적이 속도를 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도.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겠지만.”
“조금 더 빨리할 순 있겠죠.”
시더가 대답했다. 어렵지 않다는 듯이.
“우리도 속도를 내면 되잖아요?”
“……싫어요.”
그건 또 다른 얘기지. 에스페란사는 검은 구두 앞코를 한 발로 쿡쿡 찌르며 불만스레 대답했다. 누구 좋자고 속도를 내? 그래 봐야 돌아가는 날이 빨라지기밖에 더 하냐고.
시더는 발을 뒤로 빼는 대신 에스페란사의 두 발 사이로 밀어 넣었다. 다리가 벌어졌다. 에스페란사는 기겁하며 발을 물렸다. 그러다 뒤꿈치가 의자 아래에 툭 부딪혀 멈추자, 시더는 보란 듯이 에스페란사의 발 앞코를 가볍게 건드렸다.
지금 이걸 복수라고 한 건가? 헛웃음이 터졌다. 어린애 같은 장난이었는데,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모퉁이를 몇 번 더 꺾은 마차는 아까보다 더 허름한 길에 멈춰 섰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얼터 지구로 바로 이어지는 곳에 마법 용품 상점이 있었다.
시더는 그런대로 그럴듯하게 생긴 상점의 문을 지팡이로 밀었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서오…… 아니, 백작님 아니십니까? 숙녀분도 같이 오셨군요.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나인 호더엔 언제 오셨습니까?”
상점 주인은 에스페란사까지 호들갑스레 맞이했다. 에스페란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시더를 주인에게 버려두고 가게 구경에 나섰다. 뒤에서 시더가 불만스런 눈길을 보냈지만 개의치 않았다. 처음 왔을 때도 똑같이 이렇게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