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폐감옥 던전. 도시마다 있는 초보자용 던전으로, 다른 던전과 달리 던전 공략을 끝내지 않아도 출입이 자유롭다는 특징이 있었다.
하지만 초보자용답게 몬스터 부산물도 전부 하급이라 다른 던전 공략이 가능한 수준이 되면 굳이 이곳을 찾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갱신되기는 해도, 던전 자체가 없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폐감옥 던전은 흔적도 없었다. 에스페란사가 닫아 버렸으니까.
그냥 화풀이에 가까웠는데, 아예 이렇게 된 거 남은 세 개도 전부 닫아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적어도 확실한 선전포고가 되겠지. 하급 가죽 공급에도 차질이 생길 테고…….
하급 가죽 공급책을 알아보려 했던 당초의 목적도 어느 정도는 이룰 수 있겠지.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에서 아까 베껴둔 지도를 꺼냈다. 붉은 점은 네 개. 나인 호더 중심으로부터 구시가지 외곽의 인적 드문 곳에 동서남북 네 군데.
그중 하나를 없앴으니 이제 남은 곳은 세 군데. 하룻밤 사이에 끝낼 수도 있겠는데.
에스페란사는 세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시선은 누군가가 버리고 간 증기 마차에 닿아 있었다.
“증기 마차 운전이라. 차랑 비슷하겠지?”
무슨 일이 생긴다 한들 설마 죽기야 하겠어?
* * *
흰 증기가 어두운 하늘을 메웠다. 낡은 증기 마차는 나인 호더 구시가지 동쪽, 남쪽을 거쳐 이제 마지막 던전이 있는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던전 보스, ‘슬라임 킹’을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이 적립됩니다.] [던전 보스,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이 적립됩니다.]네 개 중 세 개의 던전을 닫고, 마지막 던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폐감옥은 어디나 똑같이 으스스했다.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그 한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 태연했다. 도리어 지루해 보였다.
마지막 던전 앞에서 세검을 고쳐 쥔 순간이었다.
“그만두십시오.”
익숙한 목소리가 에스페란사를 가로막았다.
소식이 참 빠르기도 하지. 첫 번째 던전을 클리어한 때로부터 세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저 작자도 한 번 만나볼 필요가 있긴 했지.
“루크 헤이븐리.”
처음 봤을 때 쓰고 있던 낡은 후드 대신 두꺼운 울 코트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턱선 근처에서 흔들리던 머리칼은 어깨를 넘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왔다. 피차 좋은 기억이 없을 텐데도 그 미소에서 반가움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세검을 조금 더 바투 쥐었다.
허약해 보여도 그는 암살자 출신이다. 정면승부로는 택도 없겠지만, 무슨 수단을 준비해 두고 있을지 모르는 법이다.
남자는 미소를 지우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웃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팔을 크게 휘둘러 세검을 위로 던졌다. 정보상의 눈이 반사적으로 휘둥그레졌다.
곧게 뻗었던 팔을 내린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너 잘 만났다.”
세검이 사라진 손 안에 나타난 리볼버. 순식간이었다. 루크 헤이븐리는 등 근육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력으로 파랗게 달아오른 총구. 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스려 봐도, 바로 저 총구에 위협당했던 기억이 몸을 지배했다.
“다리아는 어디 있어?”
냉정한 물음에 그는 뻣뻣해진 입술에 힘을 주어 겨우 소리를 만들어 냈다.
“저도 모릅니다. 원할 때 찾아오고, 용건이 끝나면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전 시킨 일을 할 뿐입니다.”
“다리아가 여기 오라고 시키던? 아니면 잭한테 정보를 뜯어오라고 시켰어? 시간도 늦었는데 헛소리로 시간 낭비하진 말자.”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얇은 한 겹의 예의조차 벗어던진 어투였다. 공격성은 없는데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미소를 유지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잖아.”
하나로 질끈 묶은 곱슬머리가 휘날렸다. 한 걸음 다가오자 총구도 그만큼 가까워졌다. 루크 헤이븐리는 도망치지 않기 위해 온몸의 근육을 바짝 조여야 했다.
“먼저 네 패를 보여 봐.”
권유 같지만 협박이었다. 마치 다리아를 대할 때처럼, 그 협박에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에스페란사의 뒤를 가리켰다.
“‘던전’입니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던 에스페란사는 멈칫했다.
잠깐만. 물론 저건 던전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표현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리아의 영향을 받은 건가? 아니면.
“폐감옥이니까요.”
던전이란 본래 지하 감옥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러니까, 이건 단지 몬스터 부산물을 유통시키는 작업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플레이어와 NPC가 쓰는 표현이 다르면 불편하니까. 생각 이상으로 섬세했다.
“밀렵꾼들이 몬스터 사체 쪽에도 손을 대고 있다고 합니다. 정식 허가를 받은 사냥꾼들 중에도 비교적 안전한 던전을 출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뒷골목 폭력배들은 빚 많고 형편 어려운 노동력을 가져다 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만, 이쪽은 드러나는 편은 아닙니다. 일단 불법이라.”
사냥꾼들. 그래서 헌터……. 기초적인 토대는 이미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리아는 앞으로 어쩔 셈이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가 이쪽에 발을 걸쳐두는 건 어디까지나 목숨을 건지기 위한 보험일 뿐이었다. 웬만큼 큰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에스페란사는 그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대신 대단한 것을 줄 수도 없겠지.
다리아는 그가 배신하면 반드시 죽인다. 대신 충성하면 많은 것을 내려줄 것이다.
이런 선택지 두 개를 두고 고르라고 하는데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정보를 더 달라고 한다면?”
“제가 드리는 정보를 믿으실 수 있다면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아,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에스페란사는 신경질적으로 미소 지었다.
정보망이 없는 게 불편하기는 했다. 게다가 아무리 봐도 이 루크 헤이븐리 만한 인물도 없었다. 그러니 그 갈리스턴 공작이 데리고 있었겠지. 그러니 그 다리아가 친히 영입했겠지.
“다리아가 얼마나 대단한 걸 약속했길래 공작을 배신했어?”
루크 헤이븐리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물론 다리아는 대단한 걸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배신한 건 아니었다.
“그런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받은 것도 없다면 왜 배신했지? 목숨의 위협 때문인가? 만약 그거라면 같은 조건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에스페란사는 조금 뚱해져선 생각했다. 그 속내를 읽은 듯이 정보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암살자 출신이니까요. 암살자라는 직업에서 낭만을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실상은 경멸스러운 일이지요.”
암살자라 하면 세상을 호령하던 대단한 영웅들을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제거하는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루크 헤이븐리의 과거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추잡했다. 자본가의 의뢰를 받아 노동자 대표를 암살하고, 자본가의 경쟁자를 암살하고, 때로는 그 가족을 죽이고……. 심지어는 그 죽음을 전시해야 하는 일에 낭만 따위가 있겠는가.
사람다운 일을 하고 싶어 갈리스턴 공작의 아래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은 다시 손에 피를 묻혔고, 숨 쉬듯이 경멸을 느꼈다.
“갈리스턴 공작은 사람답지 못한 일을 하는 자에게 사람다운 대우는 가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 일을 시킨 게 공작이란 점은 여기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손을 더럽히는 자와 그럴 필요가 없는 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에스페란사는 그게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교사범이나 정범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그래서 다리아는 사람다운 대우를 해줬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곳 사람들 모두를 장난감으로 여기는 다리아가 루크 헤이븐리가 원하는 대우를 해줬을 리 없었다. 갈리스턴보다 더 혹독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갈리스턴이 아니라 다리아를 선택했을까.
“다리아 님께는 누구나 똑같으니까요. 공작도, 여왕도, 미천한 이 몸도 똑같이 대하니까……. 괜찮습니다.”
모두 똑같은 장난감이다. 어차피 올라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전부 내려와.’
그는 이 욕망에 죄책감이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작은 궁금증뿐이다.
과연 에스페란사 헌터는 뭐라고 할까? 다리아만큼이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그러나 다리아와 달리 연민을 가진 자. 어떤 대답을 할까.
에스페란사는 리볼버를 든 손을 내렸다. 깜깜한 폐감옥을 등지고 선 채 잠시 침묵했다.
“그걸로 만족한다면 별로 할 말은 없어. 내가 다리아보다 나은 대우를 약속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네 인생은 네가 구해야지, 네가 잭 같은 어린애도 아니고. 네 능력이 꼭 필요하지도 않고. 너한테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어.”
헤이븐리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새까만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을 게 분명한데, 그 대답으로 그는 무언가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지금 질문을 하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마치 아까의 대답으로 값을 치른 것 같은 기분. 에스페란사는 그 예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다리아는 자주 와?”
루크 헤이븐리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눈이 에스페란사의 어깨 너머, 이 나인 호더에서 유일하게 공략되지 않은 던전에 닿았다. 그는 길지 않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와는 자주 만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곳은 알고 있습니다.”
묻지 않은 것까지 대답해 줄 줄은 몰랐다. 순간적으로 의심이 차올랐지만, 대답을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딘데?”
“설리번 박사라는 자의 연구실입니다.”
시공간 기계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실?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았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더 캐묻고 싶었으나, 루크 헤이븐리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는 말로 일관했다.
붙잡아 놓고 추궁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가능한 방법 몇 가지가 스쳐 지나갔으나, 어느 것도 실천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루크 헤이븐리는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는 에스페란사의 앞에서 보란 듯이 등을 보였다. 그건 네가 공격하지 않을 줄 안다는 표시였다. 저걸 콱 쏴버려서 본때를 보여 줄까 하는 생각이 훅 치솟았다가 간신히 가라앉았다. 에스페란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돌아갈 시간이다.
“마지막 던전은 남겨 둬야겠네.”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었다면, 루크 헤이븐리는 성공한 셈이다.
* * *
방 세 개를 합쳐 놓은 듯한 거대한 공간. 천장 구석부터 벽면을 따라 설치된 거대한 기계장치가 천천히 굴러가고 있었다.
황동빛 톱니바퀴를 따라 마력이 움직이며 색색의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온 흰 증기가 환풍구를 통해 빠져나갔다.
부품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벽 앞에 선 시더 클라이번은 10년 전의 노트에 적힌 회로를 수정하며 새 부품을 끼워 넣었다. 작은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새로운 부품으로 제작을 시작한 시공간 기계는 반절도 채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완성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틀이 잡혀 있었다. 마력이 원하는 대로 순환하는 것을 확인한 그가 몸을 일으켰다.
“늦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