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몇 번이고 뒤척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벽 너머의 거대한 기계가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시더가 작업용으로 쓰는 스툴 위에 앉아 그 기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완성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만큼 진행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한번 만들어 봤으니까요. 두 번째는 빠를 수밖에요.’
안정성을 강화하는 등의 개량이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몇 가지 부품이 생산 중단되어 수정해야 하는 부분이 생기지 않았다면 완성은 더 빨랐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나 빨리…….’
정말 돌아가길 원하기는 하는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기에, 관성에 못 이겨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야. 돌아가고 싶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부모님은 없어도 언니는 있고, 조카도 있고, 친구들도 직업도 있었다. 거기서 흠 없이 행복했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아도 거기가 에스페란사의 터전이었다.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면 여기도 괜찮겠지.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때때로 그리울 테고, 가끔은 내 자리가 아닌 듯 몸을 들썩이게 되겠지만. 돌아가더라도 여길 그리워하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하지만 이런 마음이라면, 가능한 한 오래 머물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이기적이다.
시더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힘들겠지만, 괜찮을 거라고. 에스페란사가 돌아가서 시더를 그리워하는 것과 시더가 이곳에 홀로 남는 건 같은 무게일 거라고.
멋대로 그렇게 생각해 버린 것 같다. 그편이 마음 편하니까.
아, 꼴사납다.
에스페란사는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화면을 바라보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벽난로 소리, 시계 초침 소리,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 고른 숨소리.
여기서 숨소리만 사라진 방을 상상해 보았다. 커다란 침대는 온기 없이 차갑고, 책이 쏟아질 것처럼 빽빽하게 꽂힌 서재가 고요한. 차를 끓여도 찻잔은 하나뿐이고, 고개를 들어도 마주칠 눈이 없는 방.
숨이 막힐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메운다고 생각하면, 뱃속까지 서늘해지는 듯했다. 에스페란사는 손톱을 박아넣은 팔이 따끔거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자학적인 생각에 빠졌다.
“이런 데 앉아 있으면서 나한테 잔소리할 자격이 있어요?”
고개를 퍼뜩 들자, 부드러운 미소가 에스페란사를 반겼다.
“……졸았어요.”
사실은 한순간도 잠든 적이 없었다.
“당신은 왜, 혹시 내가 깨웠어요?”
그럼 이런 꼴도 다 봤으려나.
시더는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했다.
“난 밤잠이 없는 편이잖아요.”
“몸을 그따위로 쓰니까 그렇죠. 내가 기껏 건강한 생활 습관을 만들어 놨는데.”
발끈했던 에스페란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돌아간단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한 말을 꺼냈다.
“숙녀분, 무슨 고민 중인지 뻔히 보이니까 그만 침대로 돌아오도록 해요.”
느리게 깜박이는 눈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어 버린 시더는 단호하게 말했다.
“답이 없는 고민은 시간 낭비일 뿐이에요.”
눈꺼풀에 닿은 체온이 뜨겁다. 에스페란사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늦잠 잘래요?”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었다. 에스페란사 스스로도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시더는 생략된 중간의 논리를 대강 이해했는지 빙그레 웃으며 스툴에 앉은 에스페란사를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죠. 어느 숙녀분이 아침부터 도망가지만 않는다면.”
“럭스 부인이 엄청 뭐라고 하겠네요.”
“럭스 부인은 들어와 보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안 들어오면 모르나…….”
그새 식은 침구가 등을 감쌌다. 그 옆에 나란히 누운 시더는 말없이 에스페란사의 눈을 바라보다가 지나가듯 말했다.
“동정하지 않기로 했죠.”
“걱정이라고요. 왜 계속 동정이라는 거야?”
“내 선택이에요.”
그러니 책임도 그의 것이라고. 에스페란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감아 버린 눈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을 거라고는 하지 않았다. 끝까지 단 한 마디도.
* * *
약속대로 두 사람은 늦잠을 잤다. 다만 둘끼리만 한 약속이라 고용인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평소대로 깨우러 올라왔던 밀런만 두 번 일을 하는 꼴이 되었다.
에스페란사 몫의 아침은 고용인들 몫으로 돌아갔고, 애니는 정오까지 잠깐의 휴식 시간을 얻어 외출을 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시더의 연구실 소파에 기대앉은 에스페란사는 총을 꺼내 닦기 시작했다. 새로운 부품을 조립하던 시더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죠.”
“우리 무슨 얘기 하는 건데요?”
“아, 거기부터?”
시더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바꾸었다.
“어제 당신이 본 것 말이에요. 초보자용 던전이면 일반인도 그럭저럭 드나들 만한 수준이라고 했죠.”
“무장을 하면 그렇죠. 물론 보스급을 만나면 죽겠지만요. 하지만 그밖엔 별로 위험하지도 않고. 거긴 음, 대체로 몬스터도 좀 귀여운 편이니까요.”
그거야 순전히 플레이어의 시선이었다. 먹잇감에 불과할 일반인들은 달리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 수준이었을 초보 플레이어들이 던전에 익숙해질 때까지 훈련하는 곳이 바로 이 초보자용 던전이었다. 마력을 가진 그들은 금방 성장했으므로 그곳에 오래 머무는 법이 거의 없었다.
“사실 그런 게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워낙 외진 곳에 있는 데다가, 나인 호더 건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내가 마지막으로 초보자용 던전에 가 본 건 7년 전이기도 하고…. 하지만 게임을 만든다면 역시 이것부터 만드는 게 맞겠죠. 아마도.”
똑같은 과일 세 개가 모이면 터지는 퍼즐 게임이나 하다가 처음으로 시작한 가상현실 게임이 이것이었다. 게임이 보통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누구나 처음 시작할 땐 초보자다. 초보자가 적응할 공간이 가장 먼저 필요할 것이다. 겸사겸사 지금은 몬스터 부산물을 유통시키는 용도로도 쓰고.
“그런 용도라면 그걸로 다른 일을 벌일 가능성은 없겠네요.”
“그렇지 않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나인 호더에 초보자용 던전이 네 개였던 건 맞는 것 같고……. 이것도 사이러스에게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일단은 맞다고 치고.
“한번 시스템을 만들어 뒀으니 더 이상 그쪽으로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요. 역시 다리아를 찾으려면 설리번 박사의 연구실을 급습하는 방법이 맞을 것 같은데…….”
“위험해요.”
시더는 단호하게 그 방안을 각하했다.
“일단은 보류하도록 하죠.”
에스페란사는 뚱한 얼굴로 총구를 박박 닦았다. 그럼 다시 원점 아닌가? 불만이야 있었지만 시더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럼 다른 생각 있어요?”
“조력자가……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 잠시 끊겼다. 뭔가 잘 안 풀리는지 종이에 수식을 썼다 펜으로 덮기를 반복하던 시더가 탄성과 함께 새로운 종이를 꺼내 뭔가 쓰기 시작했다.
에스페란사는 탄창 부분에 마력을 장전했다가 빼기를 반복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장전 속도가 좀 떨어졌나?’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나, 하고 있을 때쯤 시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났어요?”
“일단은요.”
시더는 책상 끄트머리에 있던 타자기를 끌어당겼다. 무언가를 입력하고 나니 타자기에서 구멍이 잔뜩 뚫린 카드가 출력됐다. 그 카드를 다시 다른 기계에 넣자, 끝에 공구가 붙은 철제 팔이 시공간 기계를 향해 움직였다.
“정보전이 된다면 불리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겠죠. 새로운 정보는 모르니까. 스털링에 가기 전에 새로 뚫은 정보상이 나쁘진 않았지만, 헤이븐리만은 못할 테고요.”
“지금쯤 그 정보상도 매수당했을지 모르지만요.”
그들이 가진 이전 세계의 정보는 스털링 항구 사건으로 인해 뒤틀릴 것이다. 그중 몇 가지 정도는 쓸만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확인이 필요했다. 잘못된 정보는 없느니만 못했다.
“그러니 잘 꾸민 함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환경이 만들어지면 당신은 잘하겠죠.”
“아마도요. 반드시 이길 거라고 확신은 못 하겠지만. 하지만 다리아를 함정에 빠뜨리려면…….”
“미끼가 아주 커야겠죠?”
“왠지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수상하다. 뭔가 본인에게 아주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티가 났다. 에스페란사는 얼른 못을 박았다.
“안 해요.”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는데도?”
“싫어요. 안 할 거예요.”
“어쩔 수 없죠. 그럼 수상 각하를 만나러 갈까요?”
갑자기? 지금? 왜?
“당연히 지금은 아니죠. 연락을 넣고 초대장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수상은 왜요? 설마 아까 말한 조력자가 수상이에요?”
“조력자로서는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걸요. 정보를 대 줄 사람, 적당한 무대를 꾸밀 수 있게 도와줄 사람.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숨겨야겠지만.”
레이먼드 템프턴은 개인으로서도 유능한 인물이고, 그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협력을 얻을 수만 있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쪽이 왕실을 업고 벌이고 있는 이런저런 일들을 방해하거나 이용할 수도 있을 테고.
정치적으로도 템프턴과 다리아는 적이다. 스털링 사건도 결국은 템프턴의 권력을 꺾으려는 목적으로 벌인 일이었고, 수상을 적대하는 여왕을 돕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에스페란사가 기억하는 템프턴 수상이라면 자기 나라가 몬스터 밭이 되기를 바라진 않을 것이다. 다리아가 완전히 승리한 후라면 모를까, 지금은 수상이 타협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이야기고……. 수상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부딪혀 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시더가 왜 하필 그런 어려운 상대를 골랐는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생각해 둔 계획이 있는 걸까?
“수상한테 시키고 싶은 일이 있어요?”
“구체적으로?”
“구체적으로.”
“글쎄요…….”
시더가 말을 흐렸다. 분명 염두에 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알다시피 난 암투엔 능하지 못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네요.”
“아, 네에.”
진심인지 농담인지 꾸준한 주장이다. 할 말이 없었다.
“일단 각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해야 되겠지만요. 그건 당신이 해 줄 거고.”
“뭘 시키려고요?”
시더는 복잡한 회로 구조가 그려진 종이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당신이 잘하는 거예요. 조금 유치하지만.”
“힘 자랑?”
“비슷해요.”
머릿속에 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적당히 요란하지만 상대가 경계하진 않을 정도로. 굴종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 총신을 천으로 문지르며 수상 관저의 구조를 떠올려 보았다.
“있잖아요, 수상의 서재에서 제일 귀한 게 뭘까요?”
막 새로운 부품을 찾아 끼우려던 시더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에스페란사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