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
2화
“진짜잖아. 아까는 분명 풀이 무릎까지 자라 있었는데.”
아직도 옷에 풀이 붙어 있었다. 무릎 위는 깨끗하고 그 아래는 엉망이었다. 아까 지나온 정원이 환상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이. 그렇다고 앞문과 뒷문인가 하면, 구조상 그럴 리가 없는 데다, 아까 열고 들어온 녹슨 대문이 저렇게…….
하나도 안 녹슨 채로…….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겠지요, 침입자. 정원 구경은 잘 하셨습니까?”
목덜미에 닿은 총구가 서늘했다. 혹시나 실수할까, 목을 확실히 날려 버릴 수 있게 살갗에 바짝 닿은 총구, 기다란 총신 끝에 늘씬한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살기는 없었지만, 위협은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쓰는 건지는 대충 알겠더군요. 총이란 게, 생긴 게 특이해 보여도 사용법은 뻔하죠. 선진 마도 기술이 사용된 듯한데, 최근까지 이런 기술을 발표한 곳이 없다는 게 참 이상하지만. 분명 떼돈을 벌 텐데 왜 그랬을까요?”
이유를 알지 않냐는 듯이, 총구가 지그시 눌린다. 쏘지 않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목의 여린 살에 총구가 닿는 감각은 소름이 끼쳤다.
“으윽.”
“어디의 지하 조직에서 개발한 기술인지, 왜 하필 이 저택을 노렸는지는 차차 듣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협조해 주시길.”
“그거, 진짜 몰라요?”
그 총은, 레벨을 끝까지 올리고 이런저런 부가 속성을 달아 놓기는 했지만 게임 오픈 때부터 주어졌던 기본 아이템이나 다름없었다. 진작 신식 장비로 옮겨 가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이 총에 애정을 가지고 키웠던지라 다른 무기를 쓰면서도 여태 팔지 않고 있었다.
아무튼 이 총의 형태만은 여왕부터 뒷골목 앵벌이 꼬마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헌터의 무기’를 대표하는 형태였으니까.
그런데 이걸 모른다고? 거대한 저택에 살면서 이 정도 규모의 서재를 가진 사람이? 발표된 기술이라면 전부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불길한 예감이 불길처럼 스쳐 지나간다.
“지금 몇 년이에요?”
“1837년입니다.”
글렀다. 어차피 가상 시대 기반인 게임의 배경이 몇 년도인지 외우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숫자를 들어도 그게 맞는지 감도 오지 않는다. 백의 자리는 맞는 것 같은데.
“저기, 해리엇 여왕이 몇 살이었죠?”
여전히 총구를 겨누고 있기 때문인지, 남자는 쉽게 대답해 주었다.
“폐하께선 올해 서른일곱 번째 생일을 지내셨죠.”
여왕의 쉰 번째 생일을 기념한 연회와 온 세상에서 온 축하 사절들, 그리고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이웃 나라 왕자와 공주가 던전에 휩쓸려 사라진 사건과, 여왕의 생일이라는 대규모 이벤트에 맞추어 벌어진 온갖 말썽들. 바로 한 달 전의 퀘스트라 기억하고 있었다.
“13년 전이구나. 그럼 당신이 에이번데일 백작이겠네요?”
‘죽었다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살갗에 닿은 총구가 아프지 않게 비틀렸다.
“로드 에이번데일. 그렇게 부르도록 해요.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귀족의 호칭은 꽤 복잡하지만, 이미 ‘황금 발톱’을 7년이나 해 왔으니 그 정도는 훤했다. 고증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드 에이번데일.”
“좋아요. 에스페란사. 13년 전?”
13년 전.
나인 호더에 던전이 생기고 몬스터가 쏟아지던 재앙의 날로부터 1년 전.
방금까지 머물러 있던 게임 ‘황금 발톱’의 시간으로부터 13년 전.
지금 인구 600만의 도시, 세계의 배꼽, 나인 호더에 몬스터는 없다. 헌터도 없다.
졸지에 세계 최강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 진짜 망할 골든포 놈들. 나한테 왜 이래……!”
* * *
목을 겨눈 장총은 그대로였으나 자리는 소파로 옮겨 왔다. 언제든 발포할 수 있으니 얌전히 움직이라는 말이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로드 에이번데일’은 모르겠지만, 헌터들은 언제든지 인벤토리를 열어 새 무기를 꺼낼 수 있고, 이런 장총은 총구를 슬쩍 밀어 버리기만 해도 금방 무력화된다는 허점이 있다. 그러니까 사정거리가 긴 대몬스터 전투에서는 유용하지만.
“그러니까, 13년 후엔 여기가 폐가가 되고, 나는 내년에 죽는다? 그게 당신의 주장인가요? 내 사인은 뭐라던가요? 급성 심장마비? 교통사고? 파오란 중독?”
“그게 뭐였더라…….”
‘잭, 지금까지 널 소중히 하지 않아서 미안해.’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12년 전에 죽었다고 했으니,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몬스터 사태다. 그렇게 말해도 썩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파오란 피우세요? 그거 별로 몸에 안 좋은데.”
“알아요.”
“아, 알면서 피우시는 거구나. 그렇구나…….”
“날 굉장히 쓰레기처럼 만드는 화법이군요.”
목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비난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1년 뒤면 죽을 목숨, 피울 만큼 피우다 죽는다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니고.
“아뇨. 많이 피우세요.”
“어차피 죽을 거니까? 쓰레기는 그쪽이었군요.”
“귀하신 분이 계속 쓰레기, 쓰레기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내 화법이 고상하지 못하다는 건가요? 사실이긴 해요. 당신은 옷차림이 고상하지 못하지만.”
난데없이 저격을 당했다. 옷차림이 뭐. 게임인데 이렇게 입으면 좀 어때.
“에스페란사, 빈민이라도 그렇게 다리에 달라붙는 바지를 입는 법은 없어요.”
“아, 1년 뒤면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될걸요. 질질 끌리는 치마 입고 몬스터한테서 어떻게 도망치시려고.”
몬스터는 포식자였다. 마도 문명의 끝이자 꽃을 이루었다고 자부하던 인간들을 한낱 피식자로 전락시켰다. 그들의 위대한 건축물, 바다 건너편의 식민지에서 건너오는 사치품들, 쌓아 놓은 금괴는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당신 말대로라면 그렇겠군요. 이런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에게 옷차림을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죠. 하지만 그 차림으로 이런 걸 들고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요. 경관들이 붙잡아 갈 테니까.”
그는 마음에 든다는 듯이 장총의 긴 총신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이 곧고 길었다. 힘줄이 불거진 손등이 총신을 감싸 쥐었다. 여전히 총구를 겨눈 채로.
“당신이 처음 만난 사람이 나라는 것은 아주 행운이에요. 난 신고할 생각이 없으니까. 경관에게든, 정신 병원에든.”
둥근 총구가 목선을 타고 움직였다. 총신이 살짝 턱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기 좋은 각도였다. 로드 에이번데일의 눈동자는 회색이다. 전통적으로 ‘지혜로운 자’의 눈. 물론 그런 건 다 편견이지만, 게임 속 세상에서 눈이나 머리 색은 캐릭터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
회색 눈은 정말 예쁘구나.
“에스페란사, 갈 곳은 있나요?”
“……없죠.”
돈은 있지만, 신분이 없으니 집을 구할 수 없었다. 튜토리얼만 마치면 발급되는 헌터 신분증이 있긴 했으나, 몇 년 후의 날짜가 찍혀 있어서 쓸모는 없었다.
“이런 것, 혹시 더 가지고 있나요? 그럼 내가 재워 줄 수 있는데.”
괴짜라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믿든 안 믿든, 장총 들고 자기 집에 불쑥 나타난 여자를 데리고 살겠다고? 놀라울 정도의 안전불감증이다. 연구를 위해서는 좀 위험해져도 좋다는 생각이든지.
어쨌든 에스페란사에게는 잘된 일이다. 믿든 안 믿든, 당장 머물 곳이 생긴 것이니까. 대문을 나가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메뉴 창이 없어.’
서재의 붉은 나무 색에 가려져, 똑같은 색의 메뉴 창이 사라진 것도 알지 못했다. 메뉴 창이 없다는 것은 로그아웃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더 번쩍거리고 눈에 띄는 색이었다면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원래의 시간이고 뭐고, 당장 이 게임에서 나갈 수도 없는 상태. 완전히 길을 잃었다. 뭘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아직 퀘스트도 받지 못했으니까. 지금은 로드 에이번데일의 수상한 호의가 절실하다.
“제가 그런 걸 더 드리면……?”
“손님으로 대우하죠.”
드디어 목에서 총구가 떨어져 나갔다. 로드 에이번데일은 당연하다는 듯이 장총을 챙겼다. 원래부터 자기 것이었대도 그만큼 자연스러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 좋은 걸 드릴 테니까 그건 저 주시면 안 될까요? 제 첫 무기라서.”
“먼저 무기를 꺼내서 보여 줘요.”
백작씩이나 되는 양반이 의심도 많지. 인벤토리에서 적당히 제일 싸고 레벨도 낮은 것을 골랐다. 어차피 기능이야 제대로 써 보기 전엔 모르는 거다.
“이건 낫이군요. 총을 쓰면서 낫도 쓴다, 라.”
“그냥 낫이 아니라 마도구예요. 대몬스터 마도구.”
업적 달성용으로 모았던 거라 레벨은 구리지만 연구용으로는 괜찮을 것이다.
“독특하네요. 좋아요, 이것으로 하죠.”
원래의 장총은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로드 에이번데일은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 지나가듯 물었다.
“마법 가방인가요? 10년쯤 후에는 그런 것들도 보급되나 봐요.”
“비슷해요. 그치만 이것까지 드리긴 좀.”
“필요 없어요.”
“아, 네.”
마법 가방 정도는 NPC들도 들고 다녔었으니, 13년 전에도 기술은 있었던 모양이다. 인벤토리와는 다르지만, 굳이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
“일단은 이것들로 하고. 밀런이 늦는군요.”
“그야 이상한 걸 가져오라고 시키셨잖아요.”
“스티뮬러? 에스페란사, 마도 공학자를 처음 보나요?”
“처음은 아니지만…….”
에스페란사가 만났던 NPC 중에도 마도 공학자가 있기는 했다. 설리번 박사라고, 아인슈타인 머리를 한, 연구에 반쯤 회까닥 돈 양반이었다. 말을 걸어도 안 통하고 제대로 된 정보를 주는 법도 없었다. 원형으로 된 거대한 서재나, 비커에서 이상한 용액이 부글거리는 연구실에 앉아서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좋은 재료를 가져다주면 큰돈과 좋은 장비로 보답한다는 면에서는 꽤나 유용했지.
“대화가 통하는 타입은 아니었거든요.”
설리번 박사가 13년 전에도 박사였을지는 모르겠다. 대학원생일지도. 그럼 다른 의미로 돌아있으려나?
“우리 직업에는 편견이 많죠. 뭐, 사람을 잡아 해부한다든가.”
로드 에이번데일이 눈을 휘며 웃었다. 낫과 총을 한 손에 각각 든 살벌한 꼴에도 그는 본연의 화사함을 제법 잘 이용했다. 그런 덕에 그 말은 굉장히 우스운 농담처럼 들렸으나.
“사실이잖아요!”
“죽은 사람만, 합법적으로요.”
그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눈이 낫에 고정되어 있어 ‘아직 안 죽었다면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서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 네.”
“편견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할 시간이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