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0
20화
“하나, 친척 관계.”
그건 아니지. 닮지도 않았고, 백작쯤 되면 다른 가문들과 혼인 관계로 촘촘히 얽혀 있어 금방 들통날 것이다.
“둘, 약혼 관계.”
“그건 좀…….”
물론 안 될 건 없지만.
마음을 읽은 듯이 시더가 말했다.
“안 될 건 없죠. 그렇지만 이 경우, 어쨌든 신원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건 똑같아요.”
“그러네요? 그럼 그 안은 폐기인가요?”
“일단 세 번째까지 들어 봐요.”
시더는 왠지 조금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어어, 알았어요. 말해요.”
“세 번째, 후견 관계. 그러니까 성년의 작위 있는 귀족인 내가 모종의 사유로 갈 곳이 없게 된 가까운 관계의 숙녀를 거두어서 후견 관계를 맺었다…… 이런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게 더 불건전하게 느껴지는데.”
“사실 불건전하게 쓰이니까요.”
그럼 그렇지. 정말이지, 이 사회고 저 사회고 갈데없는 어린 여자애들을 등쳐 먹는 건 똑같다.
“당신이고 나고 평판은 바닥 치는 것 아닌가요?”
“내 평판은 상관없어요. 당신은?”
에스페란사도 상관없긴 했다. 어차피 여기서 평판 잘 쌓아 봤자 가지고 갈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숙녀’의 평판은 움직일 때 방해만 된다. 차라리 괴짜, 이상한 여자로 찍히는 게 낫다. 하지만 시더는 신경을 좀 쓰는 게 나을 텐데.
“친척 빼고, 어느 걸로 하든 일단은 그 신원이라는 걸 좀 생각해 봐야겠네요.”
신분을 뭘로 증명할 수 있을까? 에스페란사가 가진 건 날짜가 몇 년 뒤로 찍힌 헌터증과 작위 수여 증서 같은 것뿐이다. 그때는 헌터 등록만 하면, 즉 게임에 로그인만 하면 신분은 알아서 해결됐으니까.
“신분을 증명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사교계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그럴듯한 이야기면 돼요. 출신은… 식민지에서 태어난 걸로 하고요. 그쪽은 출생 등록을 안 하니까.”
이야기가 꽤 길어졌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남들을 속일 만한 가짜 신분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어내고 아버지와 클라이번 가문의 관계도 만들어 내고, 시더 클라이번이 에스페란사를 알게 될 만한 이유도 짜냈다.
“그런데 말이에요.”
“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의 후견인이 될 수도 있어요?”
시더가 잠깐 멈칫했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거의 없는 일이죠……?”
기계적으로 대답하면서, 회색 눈동자는 에스페란사의 얼굴 주위를 맴돌았다. 설마, 설마, 하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을 내리뜨다가, 결국 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에스페란사. 몇 살이에요?”
“스물일곱이요.”
“네 살 낮춰요.”
시더는 마른세수를 하며 마지못해 말했다. 손가락 사이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원래도 거짓말이었지만, 이쯤 되면 대국민 사기극이다.
* *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인벤토리에 넣어 둔 종이를 꺼낸 에스페란사는 신상 정보를 외우기 시작했다.
“에스페란사 헌터, 23세, 식민령 파오룬에서 태어난 마이클 헌터와 알레한드라 로드리게즈-헌터 사이에서 태어남. 어머님 이름이 어렵네. 알레한드라, 알레한드라. 쉬운 걸로 지을걸.”
어머니 이름에서라도 지역색이 드러나야 에스페란사의 독특한 이름도 납득이 간다는 시더의 주장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건대, 지역색이 드러나면서 짧은 이름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 같다.
어머니는 에스페란사가 세 살 때, 아버지는 두 달 전에 돌아가시면서 에이번데일 백작가에 에스페란사를 맡겼다는 이야기였다. 후견 서류 등록은 시더가 알아서 하기로 했다.
식민령 파오룬에 살던 헌터 씨가 갑자기 왜 오스던 본토의 에이번데일 백작에게 딸을 맡기게 됐느냐. 이것도 또 한 바닥짜리 이야기였다.
‘요점은 사업상 관계라는 거지.’
마이클 헌터는 시더 클라이번이 특허 낸 마도 공학 기술과 발명품들을 파오룬에서 팔고 있는 사업가라는 설정이다. 그런 이유로 백작과 인연이 있었고, 나름대로 친분을 쌓았는데 딸이 나이도 있는 만큼 본국에 돌려보내 결혼시키고 싶어 했다…… 그런데 돌연 풍토병을 얻어 죽게 되어 에이번데일 백작에게 딸을 보냈다는 설정이다.
이것 때문에 에스페란사는 파오룬 말도 몇 마디 외워야 했다. 그냥 오스던의 무인도에 살던 시골 처녀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메뉴 창이 있으면 그냥 언어를 바꾸면 되는데, 메뉴 창이 싹 사라져 버린 바람에 사서 고생이었다. 물론 메뉴 창이 있었다면 지금 여기서 이런 걸 외우고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가씨, 머리 해 드릴까요?”
애니가 눈을 반짝이며 들어왔다. 에스페란사와 여자 외모에 대한 취향이 많이 겹치는 하녀는 자기 취향의 드레스를 가지고 나왔다.
“오늘은 이거!”
“그, 그래? 그거 하자.”
전 백작 부인의 옷을 다루던 시녀라 센스 자체가 좋은 편이었다. 흰 드레스에 짙은 남색 줄무늬가 있는 리본을 장식했다. 단순하지만 겹겹이 쌓은 얇은 밑단이 제법 화려했다. 외출할 계획은 없는데도 굳이굳이 장갑을 끼워 준 애니가 눈을 빛냈다.
“보석만 있으면 완벽한데.”
있긴 하지만 솔직히 거추장스러웠다. 실내에서 하기엔 과했다. 노부인도 아니고.
“사실 아가씨한텐 보석보단 화환이 더 잘 어울릴 텐데, 이 집안엔 제대로 된 꽃이 없단 말이에요.”
애니가 투덜거렸다. 이 하녀는 자기 취향의 얼굴이 자기 취향의 치장을 한 걸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주인의 화원에서 무단으로 꽃을 꺾고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노동을 할 수 있는 탐미주의자였다.
“아쉽지만 이대로도 너무 예쁘니까요. 진짜 왜 백작님은 아직도 멀쩡하시지? 나 같으면 무릎 꿇었다.”
“안 꿇었잖아?”
에스페란사가 웃으며 말하자, 애니는 보란 듯 무릎을 꿇었다.
“이제 꿇었어요!”
“됐으니까 일어나. 오늘 할 일 많아?”
“다른 때랑 똑같죠. 아가씨 안 계시면 제 낙도 없고……. 아가씨, 백작님이 모시고 오는 손님이 젊은 남자래요. 절대 넘어가시면 안 돼요. 넘어가실 거면 절 데리고 가셔야 돼요.”
“응, 관심 없어.”
“그 남자가 아가씨한테 관심이 있을 테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에스페란사는 거울로 애니를 힐끔거리며 대꾸했다.
“글쎄, 이 얼굴이 그 정도로 대단한 절세미녀는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게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그래서 에스페란사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에스페란사에게 반할 남자보다 취향과 보수적인 사회 통념의 벽을 뚫고 시더 클라이번에게 반할 남자가 더 많을…… 이 얘기 하면 싫어하겠지?
그럼 해야지.
“에스페란사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애니에 비해 훨씬 침착한 애니의 단짝 매들린이다. 에스페란사는 몸을 일으켰다. 애니가 호들갑을 떨며 숄을 걸쳐 주자, 매들린이 슬쩍 애니의 옆구리를 쳤다.
“아, 왜.”
“우린 빠져야 돼.”
“그런 거야? 아가씨, 제가 차 내올게요.”
“응접실에 이미 지원자 줄 섰어.”
“벌써? 히잉, 아가씨. 제가 하면 안 돼요?”
“대체 누가 오는데 그래?”
사교계 동향을 전혀 모르는 에스페란사는 대단한 인기인이 오나 보다, 하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아,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치만 아가씨를 보고 넋을 잃는 백작님의 모습을 꼭 보고야 말…….”
“그런 일 없어. 매들린, 애니 데리고 가.”
“아가씨이이이, 네?”
“없어, 없어. 가.”
애니와 함께 있다 보면 정말 경국지색이라도 되는 기분이다. 단짝인 매들린은 눈 하나 깜짝 안 하는데 말이다.
“나 없을 때 쉬고 좋잖아. 그치?”
그렇게 달래자 애니가 입을 삐죽이며 매들린의 팔짱을 끼고 자리를 벗어났다. 홀로 남은 에스페란사는 1층 홀로 내려갔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중앙 계단은 에스페란사가 처음 ‘폐가’에 들어올 때까지는 낡고 관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서재를 나왔을 때는 백작 저택의 이름에 걸맞은 화려함을 갖추고 있었다.
‘결국 그 서재에 들어가면서 13년 전으로 온 거겠지.’
어둡고 스산하던 폐가를 떠올리며, 에스페란사는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펄즈베리 자작이오.”
오만한 남자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남자가 내민 명함을 하워드가 받아 들었다.
“환영합니다, 자작님. 에이번데일 저택의 집사인 하워드라고 합니다.”
“안내는 내가 할 테니 자넨 들어가 봐.”
시더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도 명함을 주는 게 예의인가? 정말 귀찮은 일이다. 방문객은 늘 명함을 챙기고 다녀야 하고, 받는 집사는 명함을 보관할 데가 부족해질 테고.
‘아, 이런 집에선 자리가 부족할 일은 없겠지.’
방문객이 있어야지 말이지.
“에스페란사? 뭐 하러 벌써 나와 있어요?”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요.”
에스페란사는 가볍게 대꾸했다. 시더는 다가와 에스페란사를 에스코트했다. 그가 손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팔을 내밀자, 팔 위에 맨손을 얹었다.
“장갑이 없네요?”
“집 안에서 무슨 장갑을 껴요? 자기도 맨손이면서.”
“…….”
시더는 묘한 눈으로 에스페란사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뭐가 묻었나 싶어 내려다본 손등은 점 하나 없이 깨끗했다. 뭐지.
“펄즈베리, 이쪽은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 지금은 내 피후견인으로 저택에 머물고 있지.”
펄즈베리 자작은 새빨간 머리에, 상당한 장신인 시더보다도 머리 반 개 가까이 크고, 체격은 에스페란사의 두 배는 될 정도로 거대했다. 사람보다는 곰에 가까운 체격에 준수하지만 무뚝뚝한 얼굴. 그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일그러졌다.
자작이 덜덜 떨면서 에스페란사의 오른손을 쥐었다. 고장 난 오토마톤처럼 덜컹거리던 자작이 천천히 그 입술을 에스페란사의 손등에 댔다. 온몸에 진동이 전해질 정도로 덜덜거린다.
에스페란사가 눈짓으로 시더에게 물었다.
‘이 사람 어디 아파요?’
‘방금까진 멀쩡했어요.’
고개를 든 자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와아.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 시뻘게진 건 처음 본다. 머리 색과 구분이 안 될 정도다.
“펄즈베리. 소개.”
보다 못한 시더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자작은 에스페란사의 손을 붙든 자기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펄즈베리 자작, 켄드릭 그림스턴-행어입니다. 부디 켄드릭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초면부터 이름을?
이 사람 정말 어디 고장 났나 봐. 에스페란사는 빠지지 않는 손을 ‘일반적인 숙녀 수준’의 힘으로 잡아당기며 생각했다.
“손 좀 놔주세요.”
“죄, 죄송합니다, 미스 헌터. 제가 실수를!”
그런데 손을 안 놔준다.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이 남자의 정강이를 갈겨야 이 미친놈이 정신을 차릴까 싶어졌다. 아니, 손 좀 놔달라니까?
“에스페란사, 응접실로 가죠.”
시더는 지팡이 끝으로 켄드릭을 밀어냈다. 저 멀리까지 밀쳐진 켄드릭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뒤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