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
붉은빛을 덮어씌운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인 호더 한복판. 다리아의 눈이 거미줄처럼 사방을 에워싸고 있을 이곳에서 들키지 않고 움직이려면 필요한 변장이었지만, 거울에 비친 붉은 머리가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싫다…….’
필요해서 한 염색이지만 싫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젖은 머리칼을 손끝으로 집어 들어 본 사이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모든 게 끝난다면 이런 염색도 필요 없어지겠지.
스털링에서의 일 이후로 다리아는 모든 신경을 이쪽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원래 세계에서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오스던을 지배하기 위한 물밑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작업 자체는 그도 잘 아는 방식이었다. 시기가 달라졌으니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중요한 줄기는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그 작은 오차만으로도 불안했다. 그는 스스로가 그 오차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생활감 없는 호텔 객실 한가운데의 소파에 기대앉은 사이러스는 정보상에게서 받은 자료들을 넘겨 보았다.
나인 호더 내의 정보상에 접근하기 힘들어진 이후에는 이 시기 다리아의 정보력이 닿지 않는 소도시로 우회해서 정보를 얻고 있었다. 이것도 곧 어려워지겠지만.
현재 나인 호더의 마도구 공방과 공장들을 살펴보면 이전과는 다른 사냥꾼들과 거래한 비율이 늘었다. 가죽 공방에서는 일반적인 가죽의 사용량이 줄어들었다. 목록에는 그가 이름을 아는 공방들이 대거 섞여 있었다. 미래에도 마도구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공방들이었다. 이곳에서도 발 빠르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몬스터 부산물의 유통은 대체로 합법적인 사냥꾼들을 매개로 하고 있으나, 그 뒤에 밀렵꾼들이나 얼터 지구의 폭력배들이 있을 확률이 높다. 명의를 세탁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을 테니까. 다만 그렇게 되면 추적이 어려워지는데, 에스페란사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예측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새로운 마도구를 사 간 사람들은……. 사이러스의 눈이 그들의 신상과 구매 목적을 훑었다.
귀족들의 호신과 과시 용도, 이건 당장은 큰 문제가 안 된다. 이게 아래로 내려올수록 다리아가 원하는 그림이 되겠지만.
공장주들의 원가 절감 용도. 이건 당장에 큰 문제다. 그리고 무기 대신 사용하려는 자들도 있는 것 같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다. 일일이 감정 이입할 게 아니라 이용해야 한다.
다만 그로서는 아직 이 정보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보는 에이번데일에게 넘기는 편이 좋겠다.
“뭐 더 알아낸 거 있어?”
세찬 바람이 머리칼을 부스스 흩어 놓았다.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창문을 열고 들어온 에스페란사가 반대쪽 소파에 걸터앉았다.
사이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 없는 뺨과 형형한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마치 그곳에 계속 앉아 있던 사람을 대하듯 대답했다.
“없습니다.”
에스페란사 역시 상대가 놀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듯이 태연했다. 처음 재회했을 때 보였던 적대감이 다소 옅어진 얼굴이었다.
사이러스가 넘겨준 정보를 받아든 에스페란사는 읽어보지도 않고 인벤토리에 대충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결국 두 가지야. 시공간 기계를 완성한다, 다리아한테서 황금 발톱을 빼앗는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거지.”
다짜고짜 본론이다. 사이러스는 가만히 경청했다.
“시공간 기계야 우리 소관이 아니지만, 다리아한테서 황금 발톱을 빼앗는 건 어떻게든 해 봐야지. 그러려면 일단 만나야 되잖아.”
“다리아가 순순히 만나 주지는 않을 테고요.”
당장 지금도 황금 발톱과 헤이븐리의 정보망을 십분 활용해 신출귀몰하는 상태였다. 다리아 입장에서야 이쪽을 피해서 자기 목표를 달성할 수만 있다면 그게 편하겠지.
“그래서 우리끼리 해 본 이야기인데, 템프턴 수상을 끌어들이면 어떨까?”
기별도 없이 찾아온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이러스는 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용건 없이 만날 이유도 신뢰도 없었다. 짧은 안부 인사조차 없다.
“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이쪽 일에 최대한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이라면 협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득할 수만 있다면 그만한 아군이 없겠지요.”
그들이 이 일과 관련해 오스던에서 얻을 수 있는 아군 중 가장 나은 것이 시더 클라이번이라면, 그다음은 템프턴 수상이다. 다리아도 두 사람을 먼저 설득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설득이 쉽지는 않겠네.”
“아마 그럴 겁니다.”
“아는 약점 같은 거 없어?”
사이러스는 눈을 껌벅거렸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약점…… 말입니까? 글쎄요.”
“수상이랑 몇 년이나 알고 지냈잖아. 우리보단 네가 더 아는 게 많을 거 아냐?”
“정치적으로는 워낙 빈틈이 없는 사람이고, 개인사도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록스포드 후작의 차남이지만 그쪽과도 거의 절연한 상태입니다. 약점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런 일에 도움이 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닐 겁니다.”
“괜한 짓을 했다가 오히려 뒤통수치는 꼴이 될 수도 있겠네. 아, 개인사 하니 생각났는데. 여왕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여왕에게 불리할 일은 잘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사이러스도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리아와 사이러스가 왕실과 처음 접촉했을 때는 이미 끝난 지 오래된 관계였지만.
여왕은 템프턴을 두려워했고, 템프턴은 최대한 여왕의 편의를 봐주는 행보를 보였다. 그렇기는 해도…….
“이 정도는 상관없을 겁니다.”
잠시 머릿속을 뒤져 본 사이러스가 이윽고 적당한 예시를 꺼내 들었다.
“재작년쯤에 사치세 부과 법령을 통과시키면서 왕실 비리를 같이 터트려 소식을 덮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아, 자기가 여유로울 때만 봐주는구나.
그 정도라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다리아에게 문제가 생긴다고 여왕이 위험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랬다면 여왕이 다리아를 죽이려고 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수상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다리아를 찾는 일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정보든 뭐든 우리보다야 낫겠지.”
에스페란사는 여전히 시더가 무슨 생각으로 수상과 접촉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수상의 정보망에 기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야 그렇지만…….”
사이러스는 여전히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눈을 찡그렸다.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가 자세한 것을 묻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됐고, 내일 에이번데일 저택으로 와.”
“채혈 때문입니까?”
“응. 굳이 널 부르라더라. 옆에 나도 있는데 말이지.”
불만스레 중얼거리자, 사이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시더 클라이번에겐 반대겠지. 그가 있는데 구태여 에스페란사를 다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그런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눈에 안 띄게 들어오는 거 잊지 말고.”
“걱정 마십시오.”
용건이 끝나자 에스페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커다란 방에 홀로 남은 사이러스가 뒤늦게 숨을 길게 뱉어냈다.
스털링에서부터였을까? 에스페란사는 예전처럼 분노하거나 그를 경멸하지 않았다. 적대감조차 희미해졌다. 마치 그들이 아직 동료였을 때처럼 담백한 태도라 아주 잠깐,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러나 그게 그를 용서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이러스는 애써 몸을 일으켰다.
오늘의 에스페란사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설령 두 사람 모두 안전하게 돌아간다고 해도, 그는 두 번 다시 에스페란사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온 세상에 둘뿐이라고 해도.
* * *
밝은 빛이 들어오는 집무실. 털이 노란 고양이가 기지개를 켰다. 고양이가 차지한 안락의자의 주인은 불편한 스툴에 앉아 종이를 넘겨 보았다.
손이 닿을 거리에 놓인 은쟁반에는 편지가 쌓여 있었다. 개중 읽어 볼 만한 상대가 보낸 것만 추렸는데도 쟁반이 넘칠 정도로 가득했다.
남자는 편지 더미의 중간을 툭 쳐서 헤쳐 놓았다. 그리고 발신인 이름이 눈에 띄는 몇몇 개를 추려 놓았다. 나머지는 전부 해머튼 비서관 선에서 처리될 것이다.
“에이번데일?”
짧은 고민 끝에 남자가 가장 먼저 집어 올린 편지는 에이번데일 백작에게서 온 편지였다.
발신인의 영향력만 따지자면 다른 편지들에 비해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더 고민하지 않았다.
내용은 간결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가 좋아하는 태도였다. 오만하고, 신중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용건도 제대로 적지 않은 편지 따위 불쏘시개로나 썼을 테지만, 대체로 그를 피해 다니는 시더 클라이번이 구태여 만남을 청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해머튼 비서관, 다음 달 첫 주에 로드 에이번데일을 만날 테니 일정을 비워 주십시오.”
“예, 각하.”
상관과는 달리 제대로 반듯이 책상 앞에 앉아 자기 일을 하고 있던 비서관이 대답했다.
“그리고…….”
“준비할 게 더 있을까요?”
“그때까지 나인 호더 내에 폐하의 차명계좌로 매입한 건물이 있으면 전부 확인해 주십시오.”
비서관이 입을 떡 벌렸다.
“예?”
“촉박하겠지만 되도록 전부 파악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시에 대해 좀처럼 질문이 없는 비서관이었지만, 이번에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도 수상은 여왕의 개인 비자금을 추적한 적이 있었다. 해적 건으로 수상의 정치적 입지가 예년만 못한 것도 신경이 쓰였다. 왕실은 이럴 때 쓰기 좋은 카드였다.
“혹시 왕실의 도덕적 문제를 공론화하시려는 겁니까?”
“아닙니다.”
“아, 아니군요.”
비서관으로서는 이런 정보를 쓸 곳이 달리 생각나지 않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 과묵함이 그를 이 자리까지 올린 것임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레이먼드 템프턴은 편지를 내려놓았다.
‘간섭하고 싶지 않았건만.’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은 질색이다. 이를테면 한계가 있는 자리에 태어나는 것. 난데없이 허공에서 괴물이 튀어나오는 재앙.
그런 건 어쩔 수 없다. 그저 인간의 선에서 대처할 뿐이다.
하지만 느닷없이 시더 클라이번의 편지라니.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잘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