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템프턴 수상의 답신은 수상의 측근 중 하나인 티드웰 경의 이름으로 도착했다.
3월 초라니, 이쪽의 용건이 급한 것이면 어쩌려고.
편지지를 협탁에 내려놓은 시더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수상은 그들의 용건이 시급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면 일부러 일정을 느긋이 잡아서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수 싸움에서 노회한 수상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이럴 때는 머리를 쓸 게 아니라 그저 흐름에 따라가면 된다.
편지지 위를 헤매던 시선이 벽면의 기계장치를 향했다. 생각 이상으로 진행이 빨랐다. 복잡한 작업들은 얼추 끝났으니 3월 초에는 반절쯤 완성될지도 모른다.
‘너무 빨라.’
이렇게까지 빨리 완성시킬 생각은 없었다. 일부러 시간을 끌겠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면 기계에 완전히 파묻히다시피 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우스운 노릇이다. 이 기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데, 습관처럼 몰입했다. 결과물은 결코 좋아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고삐를 놓친 것만 같다.
원하지 않는데 끝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팔다리에 실이 달려 스스로의 의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등을 떠미는 것 같은 기분.
그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힌 부품들을 노려보았다. 집중하지 않아도 그는 금방 이 구조를 파악하고 만다. 무엇이 더 필요한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이 날아가듯 결론까지 치닫는다.
기본적인 구조가 잡힌 시공간 기계. 10년 전의 것을 바탕으로 안정성을 개량하고 부품을 교체한 것뿐이었으므로 형태는 동일했다. 황금 발톱이 들어갈 중앙 장치만 제외하면 완성에 가까웠다.
며칠 전에 사이러스가 콸콸 쏟아놓고 간 피를 사용해서 멀쩡히 작동이 되는지도 확인했다.
‘중앙부가 생각보다 복잡할 것 같은데.’
문제는 이전에 만든 시공간 기계와는 달리, 새로운 기계로는 정확히 지정한 시공간에 목표물을 이동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다리아의 시공간 기계를 얻으면 해금되는 귀환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시더는 턱을 괸 채 설계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마력 회로를 수정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한참 후, 연구실에서 나온 그가 문턱에 멈춰 섰다.
에이번데일 저택의 서재는 널찍했고 바닥은 부드러운 카펫으로 덮여 있다. 그렇다.
하지만 카펫은 밟는 곳이지 눕는 곳은 아닐 텐데.
서재 한가운데 팔다리를 펼치고 누워 있던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였다. 그게 나름의 인사였다. 시더는 기가 막혀 고개를 내저었다.
“기본적인 품위가……. 아니, 이게 품위 문제이기나 한가요?”
에스페란사는 누운 채로 대답했다.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훈련 끝나면 매일 이런 꼴이었는데 새삼스럽게.”
“그래도 되는 곳과 안 되는 곳이 있죠. 서재는 확실히 안 되는 곳이고. 숙녀분, 인격을 지켜 줬으면 좋겠네요.”
그 말과 동시에 몸을 숙인 시더가 땀에 젖은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진심 어린 조언이었는데, 에스페란사는 흘려들은 듯 입꼬리를 늘어뜨려 웃었다.
“피곤해요. 그놈의 던전, 아무리 없애도 죽어라고 만들어 대.”
헤이븐리를 만났던 날 나인 호더에 분포하던 초보자용 던전 네 개 중 세 개를 없앴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비슷한 던전이 생겨났다. 다시 없앴더니 또 생겨났다. 요즈음은 없애고 생겨나고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나 오고가는데도 우연으로라도 다리아와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그만 내버려둬도 되잖아요. 어차피 계속 만들어 낼 텐데.”
“압박을 주는 거예요. 쫓기는 기분, 아주 불쾌하거든요. 실수하기 딱 좋죠.”
“압박이 들어가고 있는지는 모르겠고, 쫓는 쪽은 지쳐서 쓰러질 것 같네요.”
“그 정도까진 아니거든요……. 사실 화풀이가 반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게 다일 리가 없다. 에스페란사는 고작 초보적인 던전 한두 개를 처리했다고 이렇게 지치지 않는다. 시더가 웃는 얼굴로 추궁했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굴렸다.
“설리번 박사의 연구소에 잠깐 다녀왔어요.”
“……우리 약속이 다르지 않나요?”
“들어가 보진 않았어요!”
재빨리 변명한 에스페란사가 일어나 앉았다. 머리칼이 팔을 감싸고 쏟아졌다.
시더가 고개를 기울였다.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하게 가까이. 에스페란사는 몸을 조금 뒤로 젖히며 덧붙였다.
“진짜 안 들어가 봤어요. 그냥 밖에서 거기가 진짜 연구소가 맞는지 확인만 한 거예요. 뭐, 운이 좋으면 다리아를 찾을 수도 있을 거고.”
잘못 들어갔다가 침입의 흔적이 남으면 저쪽도 경계할 테고, 그러면 뭐라도 해 보기도 전에 끝나는 것이다.
아쉽게도 다리아는 없었다. 설리번 박사가 나오는 것만 봤다.
“확인으로 끝이에요?”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한 어투였다. 시더는 나무라듯 덧붙였다.
“연구소 근처에서 잠복하다가 기습? 정말 시도할 생각인가요? 위험하니 보류하자고 했었는데.”
에스페란사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이해는 가지만, 시더는 처음부터 이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 때 에스페란사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 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면 어떨까요? 기껏 만들어놓은 시공간 기계가 부서지면 제대로 불이 붙을 것 같은데.”
그것만큼 다리아를 확실히 도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쪽은 제대로 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처음부터 다시 하거나, 지름길을 택하겠지.
바로 이 기계를 빼앗는 것 말이다. 굳이 찾아다닐 필요도 없이 이쪽에 유리한 장소로 불러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한 번 기각했던 방법이지만, 위험하다는 것만 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위험하다는 것만 빼면.
“안 돼요. 부수다가 잘못해서 기계를 작동시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물론 생각해 뒀다.
“다리아가 없을 때 부수면 되잖아요. 황금 발톱은 다리아가 가지고 있고, 그게 없으면 어차피 기계는 작동이 안 될 테니까. 들어가서 먼저 확인해 보고 만약에 이미 황금 발톱을 설치해둔 상태라면 도망치든지, 빼 오든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맞는 말이다. 이건 그의 기우일 뿐이었다. 지나친 불안감이 만들어낸 과도한 걱정. 애초에 그런 게 걱정이 된다면 그의 연구실에 드나드는 것도 막아야 했다.
언제부터 이런 겁쟁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약간의 위험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스털링 해적 문제에서는 위험이 없었나? 그때는 무려 에스페란사가 다리아와 사이러스를 단신으로 상대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막연했던 그때와 달리 시공간 기계의 완성이 가까워진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 불안정했다.
시더는 시공간 기계가 있는 연구실을 잠시 돌아보았다. 눈앞이 잠시 흐릿하게 바랬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혼탁했던 머릿속이 조금 깨끗해졌다.
그래. 때를 잘 고르기만 한다면 도발 계획은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다리아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기계에 귀한 황금 발톱을 희생시키는 도박은 하지 않을 테니 위험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을 것이다. 이쪽이 설리번 박사의 연구소 위치를 안다는 걸 모르는 만큼, 기습을 예상했을 가능성도 낮았다.
“그래서, 어때요?”
“……나쁘지 않아요. 지금은 안 되겠지만, 괜찮은 때를 기다려 보죠.”
저쪽 연구의 성과를 전부 부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연구자로서든, 적으로서든. 물론 시더는 자기 연구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와 별개로 보험은 들어두는 편이 좋다.
그러나 보험은 어디까지나 보험일 뿐이다. 보험을 부순다고 해서 그의 연구가 성공할 것이라는 결론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격한 계획이지만, 시기만 잘 조율하면 의외로 괜찮은 효과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심정적으로 여전히 에스페란사의 안위가 불안한 것과는 별개로.
“그럼 이건 찬성한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팔을 힘주어 끌어당겼다. 아차 한 사이 카펫 위에 누운 꼴이 되었다. 금빛 머리칼이 짙은 카펫 위를 수놓았다.
시더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에스페란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이제 나보고 카펫에 눕는다고 뭐라고 할 자격 없어요.”
“그걸 맘에 담아두고 있었어요?”
시더는 구태여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카펫에 눕는 건 흙바닥에 눕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평생 단 한 번도 이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옆에 똑같이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에스페란사가 있으니 그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풀밭에 누워 본 적도 있었지.’
그렇게 따지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천장에 눈을 고정한 채 손등을 간질이는 손끝을 찾아 쥐자, 옆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더는 그 상태로 에스페란사가 돌아오면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상 각하께 편지가 왔어요. 3월 초에 약속을 잡았으니, 그때까지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죠.”
“나가지 말란 거죠?”
“나랑 놀아주면 좋겠어요.”
마치 놀기나 할 것처럼. 에스페란사는 나직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가 하루 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걸 알면서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래요, 그럼. 당분간은 아무것도 안 할게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별수 없었다.
손가락 사이를 벌리고 들어오는 손끝이 식어 있는 게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움츠리자 시더가 낮게 웃었다. 그러더니 문득 침묵을 메우듯 말을 꺼냈다.
“여름이 오기 전에 기계를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조금 아쉽네요.”
왜냐고는 물을 수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가만히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선물한 여름 모자를 쓴 당신과 소풍이라도 다녀오면 좋을 텐데.”
목소리에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듣는 쪽은 웃을 수가 없었다. 거칠게 고개를 돌리자, 시더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꼭 여름이 아니어도 소풍은 갈 수 있잖아요.”
그런 말이 아니었으면서. 다가오는 끝을 느끼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추울걸요.”
맘에도 없는 투덜거림과 함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시더는 품에 안긴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바깥바람을 머금고 이슬에 젖은 듯 차가운 머리칼.
“춥고, 할 일도 없을 테고, 음식은 금방 식겠지만, 카펫에 누워 있는 것보단 훨씬 고상하죠.”
“아, 네에.”
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나와 같았다. 이럴 때면 영영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착각이지만.
마주한 시선 속에서는 초침 소리가 한 박자씩 밀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다음 한 초가 영원히 오지 않는 순간에 이르면, 그땐 정말로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다음 한 초가 오지 않는 일은 결코 없다. 3월이 오고, 5월이 오고, 여름이 오기 전에 에스페란사는 돌아갈 것이다. 시더는 다시 한번 그 사실을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