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03
203화
“꼭 이런 식의 등장이 필요해요?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불만스레 입을 내민 에스페란사가 후드를 젖혔다. 분명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나타날 생각이 아니었는데, 멋대로 바꾸는 게 어디 있담! 그러나 시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유치한 게 효과적이잖아요. 그리고 앞으로는 더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할 테니까요. 각하, 여기 증명입니다.”
에스페란사의 손에서 전리품을 받아든 시더는 불경하게도 그것을 수상에게 그대로 던졌다. 손바닥을 찌르는 딱딱하고 차가운 것을 쥔 수상이 손을 펼쳤다.
솔몬 기사의 훈장.
‘서재에 두었던 걸 가져왔나.’
솔몬 기사의 훈장은 오스던의 군주가 왕족, 고위 귀족, 공적을 세운 신민에게 내리는 명예의 상징이었다. 역대 수상들은 빠르나 늦으나 군주로부터 이 훈장을 받았다.
여왕이 지독히 경계하는 레이먼드 템프턴이 젊은 나이에 훈장을 받은 것은 수훈을 결정한 군주가 해리엇 2세가 아니라 선왕인 길버트 3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버트는 급사했고, 젊은 해리엇은 자기 손으로 옛 애인에게 솔몬 기사의 훈장을 내렸다.
‘이 정체 모를 숙녀가 그 의미를 알고 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수상은 서재에 있는 수많은 물건들 중에 하필 이것을 가져온 함의를 읽어내는 대신, 촘촘한 경비를 뚫고 아무도 모르게 훈장을 가져온 능력에 주목했다.
“들어나 볼까.”
수상이 커다란 몸을 일으키며 에스페란사의 앞을 막아섰다.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에스페란사는 수상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기의 레이먼드 템프턴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가지런히 내린 검은 머리칼과 호선을 그린 입술, 벌어진 어깨와 곧게 선 등에서 자신감이 드러났다. 그러나 사람을 불쾌하지 않게 하는 자신감이었다. 첫눈에 누구나 호감을 느낄 법한 인물이다.
머리가 희끗해지기 시작한 50대의 그도 그랬지만 이제 막 40줄에 들어선, 정치인으로서는 새파랗게 어린 지금의 템프턴에게서도 무시할 수 없는 관록이 엿보였다.
그러나 에스페란사가 레이먼드 템프턴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여왕도 갈리스턴도 처음부터 별로였는데.’
여왕이 제국의 정점에 선 수혜자라면, 수상은 그 제국을 자기 손으로 만든 사람이다. 템프턴이 젊은 나이에 정계를 휘어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당시 거의 불가능하다고 점쳐졌던 파오룬 합병을 성사시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능적인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단지 그가 현재 아군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런 걸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 갑작스레 사랑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이 아니라, 호감도의 영점을 약간 오른쪽으로 옮겨둔 것 같은 느낌. 의식적으로 그의 업적을 되뇌어야 할 정도였다.
몸을 굽혀 손등에 입을 맞추는 동작은 산뜻하면서도 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말하자면, 시더 클라이번과 닮았다.
그는 에스페란사의 생각을 읽은 듯 빙그레 웃었다.
“생각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같은 스승에게 배웠으니까요. 선대 에이번데일 백작께선 신사로서 모범적인 분이셨지요.”
“적당히 하시죠. 에스페란사, 이쪽으로 와요.”
수상을 떼어낸 시더는 에스페란사를 이끌어 그의 옆자리에 앉혔다. 수상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등을 찌르는 듯하던 경계가 사라졌다. 인기척은 여전했지만.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걱정할 것 없어요.’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에도 에스페란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들으란 듯이 말했다.
“사람은 물려주시는 게 좋겠어요. 한둘이면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지금은 너무 많네요.”
“그렇습니까?”
템프턴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짧은 지시만으로 인기척이 전부 사라졌다. 에스페란사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크지도 않은 방인데 열 명은 너무했어요.”
“대단하군요, 에스페란사 양. 그리고 에이번데일…… 유치하구나.”
수상은 여전히 에스페란사의 손등을 덮은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시더는 손을 떼어내는 대신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 더 유치해질 겁니다. 괴물과 마법사, 시간여행? 어떤가요.”
“멋지군. 유치하기도 하고.”
“안타깝지만 현실입니다. 전부 원래대로 돌릴 순 없지만, 제어할 수 있는 정도로 둘 수는 있습니다. 아니면 통제권을 빼앗길 수도 있죠.”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긴 이야기였다. 하지만 수상은 적당히 행간을 읽어낸 듯했다.
이윽고 바닥을 보인 찻잔을 내려다본 수상이 침음을 삼켰다.
선택지가 하나뿐인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여왕은 정말로 그의 정적이고, 그는 위험한 싸움터에 몸을 던져야 한다. 이 나라를 걸고.
하지만 그 전에.
“만약 반대라면? 괴물이 나타나는 것까지가 자연적인 현상이고, 괴물을 처치해 줄 세력의 등장을 네 쪽에서 막고 있는 것뿐이라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나?”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상대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기는 했다. 상대가 시더 클라이번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말이지.
심기가 뒤틀린 건가, 아니면 신중을 기하는 것뿐인가. 이유에 따라 답도 달라진다.
침묵이 길어지자 에스페란사는 불안한 듯 시더를 흘끔거렸다. 수상이 갈리스턴도 아니고, 때려서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는데요?”
결국 침묵에 지친 에스페란사가 대뜸 물었다. 침묵으로 주고받은 수 싸움을 전부 무력화하는 한마디였다.
“증명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은데, 그냥 의문을 가진 채로 결정하시는 게 낫겠어요. 원래 결정에 그 정도 불확실성은 따르는 거잖아요?”
“불쾌하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그럼 에스페란사 양, 다른 걸 묻지요.”
“저한테요?”
템프턴 수상은 눈가가 접히도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더를 곁눈질로 돌아보니 그 역시 무언가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수상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별수 없었다.
“말하세요.”
“만약 제가 거절하면, 죽이실 겁니까?”
“아뇨.”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거절할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더가 된다고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수상을 설득하지 못할 경우의 수는 배제됐다.
“그럼 거절해도 손해는 없는 거군요.”
설마 진짜 거절할 생각인가? 에스페란사는 재빨리 덧붙였다.
“한 대쯤 때릴 수도 있고…….”
“저런.”
들으란 듯이 혀를 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맞고 싶지 않으니 수락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에이번데일,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임시회에는 출석하겠지?”
그 말과 동시에 괘종시계가 오후 4시를 알리며 묵직한 종 소리를 냈다.
수상은 미련 없이 방문을 열었다. 나무문이 반쯤 열리고, 노란 털을 가진 고양이가 수상의 발치로 다가왔다.
“케이트. 목에 매달아준 방울은 어디 갔니?”
고양이는 그저 불만스레 야옹거리기만 했다. 수상이 줄줄 늘어지는 고양이를 한 품에 들어 올렸다.
“가자, 케이트. 에스페란사 양,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에이번데일.”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덧붙였다.
“네가 날 쓸 수 있는 건 한 번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박하시군요.”
“궁금한 게 있다면 어쉬닝 가 5번지의 런더포드 양께 편지를 보내도록.”
수상의 긴 그림자가 성큼성큼 멀어졌다. 끝인가? 싶었는데 정말 끝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에스페란사가 뒤늦게 물었다.
“성공인가요?”
“그럭저럭 성공적이네요.”
“……그럼 이제 기계 부술까요?”
3월. 그의 기계는 중앙부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상태였다. 설리번의 기계가 얼마나 완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그보다 빠를 것 같지는 않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요.”
* * *
어두운 방에 증기가 가득 찼다. 설리번 박사는 기침을 토해냈다.
‘역시 저번 연구소가 좋았는데.’
갑자기 옮기게 된 연구소는 위치도 좋았고 시설도 훨씬 깨끗했지만, 커다란 창고 건물 하나를 꽉 채우던 기계를 두기에는 조금 좁았다.
박사는 얼른 창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창문으로 증기가 빠져나가고, 숨 쉴 틈이 생기자 황금빛 윤곽이 드러났다.
벽을 빼곡하게 메운 기계장치. 망가진 것을 복구한 터라 중간중간 합금의 색이 달랐다.
“중간에 마력이 새는 건 아니겠지?”
파이프를 툭툭 건드려 본 여자가 물었다. 설리번 박사는 이를 악물고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몇 번씩 확인했습니다!”
“그래. 그래야 할 거야.”
“기계 구조를 추측만으로 복구해야 해서 시간은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필요한 게 뭐야? 사람? 돈?”
시간이라고. 박사는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바짓자락에 문질렀다. 말대답을 하면 죽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디의 백작님과는 달리.
“연구 인력을 조금만 더…….”
“뭐야, 핀리 쪽 연구소의 반을 털었는데 아직도 부족해? 네가 내 생각보다 무능한가?”
“존재한 줄도 몰랐던 기계를 복구하는 일이잖습니까! 누굴 데려와도 비슷할 겁니다.”
“목소리 낮춰. 어딜.”
다리아가 한 번 으르렁거리자 설리번 박사는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혀를 찬 다리아가 설리번 박사를 내보냈다. 이래 봬도 나름대로 대우해 주며 다루고 있었다.
바닥을 치는 윤리의식, 딴 주머니를 찰 잔머리의 부재, 적어도 30년을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젊은 나이, 밑바닥 출신이라 자존심도 없다는 점까지. 마도공학은 엘리트 학문이다. 이런 인재를 또 구할 수는 없었다. 설리번 박사는 모르고 있겠지만.
다시 고개를 든 다리아가 기계를 바라보았다.
아름답지 않다. 억지로 이어붙인 티가 났다. 마치 신이 빚은 것을 인간이 억지로 기운 듯이.
욕심이 났다. 이 불완전한 피조물을 보니 가라앉은 줄 알았던 욕심이 끓어 올랐다. 고작 열여섯의 나이에 진짜를 빚어낸, 자신을 이 세계로 인도한 그 손.
‘운 좋은 계집애 같으니라고.’
그런 부류와는 영영 상종할 수 없을 것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라 적당히 견딜 수 있는 시련만 겪으며 자란 인간.
시더 클라이번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 끌고 온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견디지 못하고 죽여 버릴지도 모르지.
그렇다 하더라도 남의 손에서 살려두어야 할 이유는 없다. 빠른 발걸음으로 연구실에서 빠져나온 다리아가 응접실 문을 벌컥 열었다.
“헤이븐리!”
마침 다리아에겐 기회가 있었다. 마른 입술을 할짝인 다리아가 눈을 번뜩였다.
“이 자식은 또 어딜 간 거야? 바쁘다고 했잖아. 한 번에 하자고, 한 번에.”
“여기 있습니다.”
루크 헤이븐리가 허리를 숙였다. 과장된 궁정식 절이다. 다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리아는 한 번도 상류층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재력은 원했지만,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예의는 다리아를 불쾌하게 만들 뿐이다.
“집어치워. 됐고, 저번에 했던 얘기, 다시 한번 말해 봐.”
아무런 설명도 없었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한 번에 알아들었다. 루크 헤이븐리는 검은 머리칼을 넘기며 대답했다.
“그보다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템프턴 내각이 ‘헌터 등록제’를 논의 중입니다.”
“그렇게 빨리?”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 급격한 변화이니만큼 저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이렇게 되면 이쪽이 헌터 협회를 설립하기 전에 국가 관할로 넘어가게 된다. 그건 곤란하지.
“담당자 처리해. 논의 속도만 늦춰 봐. 그건 그렇게 하면 되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헤이븐리는 편리하다. 갈리스턴이 왜 이런 걸 곁에 뒀는지 알겠는걸. 다리아는 설리번의 연구소 응접실에 둔 고급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 이 값비싼 편안함.
그리고 이어진 헤이븐리의 이야기는 한번 들었던 적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흘려들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흥미가 있었다.
당분간 돌아갈 생각은 접어야겠다. 다리아는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