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05
205화
“자. 그럼 이 일은 해결됐네요.”
그 말을 축객령으로 잘못 이해한 사이러스가 몸을 일으켰다.
“사이러스. 당분간은 여기 살아.”
에스페란사가 그런 그를 만류하며 재빨리 말했다. 사이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기서 살라고? 진심인가?
물론 에이번데일 저택은 손님을 위한 방도 잘 마련되어 있으니 웬만한 호텔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시더 클라이번의 연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고. 무슨 일이 생겨도 지금까지처럼 번거롭게 오가는 대신 빠르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시더의 셔츠 소매를 쥔 에스페란사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굳이 그래야 됩니까?”
“굳이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이번 계획 때문이기도 하고.”
사이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다리아의 일에 휘말린 피해자 두 사람이 사는 곳. 이 불편한 자리에 얼마나 더 끼어 있어야 하는 걸까. 마지못해 승낙했지만,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했다. 게다가.
“에스페란사 님.”
“왜?”
“아닙니다.”
에스페란사의 말투가 점점 시더 클라이번을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배로 불편해졌다.
* * *
사이러스를 저택에 머물게 한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연구에 필요한 마력을 구하기도 쉬워졌고.’
시더는 병 안에서 찰랑이는 혈액에 짧게 눈길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뭐, 소소하게는 심심한 에스페란사의 훈련 상대가 되어줄 수도 있었다.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에스페란사가 외출할 때 시더의 호위를 맡기는 것이었다. 시더는 늘 연구실에 있으니 한 번에 시공간 기계도 지킬 수 있었다.
“지금 가요?”
“금방 올게요.”
시더는 바꿔 끼운 톱니바퀴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작업용 장갑 때문에 안아줄 수는 없는 상태였다. 보란 듯이 손을 들어 올리자, 에스페란사는 푹 눌러썼던 후드를 젖혔다. 약간 상기된 뺨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시더의 목을 끌어안고 양 뺨에 입을 맞췄다. 시더가 손을 들어 올린 채로 멈칫했다.
“됐죠?”
“여기서 부족하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죠?”
“아, 안 돼요. 런더포드 양과는 1시에 만나기로 했어요. 공짜로 부려먹는데 시간은 맞춰가야 하잖아요.”
“난 돈 내고 늦는 쪽이 좋아요.”
그게 됐으면 진작 그렇게 했지. 에스페란사는 발끝으로 카펫을 툭툭 두드렸다. 시더는 난간으로 향하는 에스페란사를 불만스레 바라보다가,
“에스페란사.”
“왜요?”
어느덧 후드를 눌러쓴 에스페란사가 발코니에 서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몰래 나가는 거 이 저택 사람들 다 알아요. 럭스 부인도, 하워드도.”
“……그럼 나 왜 여기로 나가요?”
“글쎄요. 그건 당신이 알겠죠. 난 거기로 나가라고 한 적 없어요.”
이 인간이 진짜? 발끈한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이 꼴로 정문을 통과하는 것보다는 그냥 몰래 나가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이걸 몰래 나가는 거라고 할 수 있나? 입을 삐죽거리던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내쉬며 난간 위에 올라탔다.
“됐어요, 창문이나 열어놔요.”
시더는 잠시 빈 난간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럼 에스페란사가 수상의 정보원에게서 어떤 정보를 얻어 올지 기다려 보도록 하고…….
장갑을 벗은 그는 서랍에서 몇 번이고 다시 계산한 흔적이 담긴 종이를 꺼냈다.
장장 열세 장에 달하는 시더의 풀이 과정. 그리고 그보다 정확히 세 배 긴 해석기관의 풀이 과정. 그러나 풀이의 마지막 줄, 부정하듯 꾹꾹 눌러쓴 값은 타자기가 무심하게 출력한 값과 소수점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거대한 기계를 바라보았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형태였다. 그러나 일순간 눈앞에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괴물이 보이는 듯했다. 기계 팔이 목을 틀어쥔 것 같은 기분이다. 손안의 종이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사이러스를 불러 기계의 시험작동을 해봤던 날, 그는 무려 열 자리에 달하는 숫자를 보았다. 10억 토트. 기계 전체를 작동시키고, 원래 세계의 위치를 계산해 이동까지 시키는 데 필요한 마력량이었다.
다행히 계산에 몇 가지 가정을 포함하지 않은 상태였는지라 1억 토트를 조금 넘는 정도까지 줄일 수 있었다.
예전에 에이번데일에서 망가진 기계를 가동했을 때도 5백만 토트에 달하는 마력이 들었으니, 제대로 이동까지 시키려면 1억 토트가 필요한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에스페란사와 사이러스, 두 사람의 마력을 전부 쏟아부어도 1억은 맞출 수 없다. 증폭기를 최대치인 세 대까지 쓰고 전처럼 피를 미리 뽑아놓거나, 마정석이나 기계에 마력을 담아두어야 겨우 그 부족분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단 한 사람을 이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시더 클라이번이 사이러스를 이 저택에 머물게 한 두 번째 이유가 드러난다.
그는 종이 더미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엔 일찌감치 불려온 사이러스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응접실이 불편한 듯 찻잔만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아니지. 그가 불편해하는 것은 이 저택의 주인이다. 에이번데일 백작. 먼 과거에 그가 직접 죽였던 남자. 그리고 그가 염치도 없이 도움을 구걸하고 있는 상대.
그런 상대와의 대화를 앞둔 사이러스의 입술은 조금 창백했다. 화술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일찍 왔군요.”
“할 일도 없으니까요.”
사이러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더는 당연스레 상석에 자리 잡았다. 하녀들이 차를 내왔다. 아무런 말이 없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사이러스는 그 일련의 행동에서 압박감을 느꼈다.
에이번데일이 특별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백 번은 봐 온 행동이고, 어느 상류층 저택에 가도 비슷했다. 그럼 이 압박감은 그저 그의 죄책감인가?
“에스페란사 님이 안 계신 시간에 날 만나자고 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이번데일.”
“저번 시험작동을 통해 이동에 필요한 마력을 계산해 봤습니다. 정확한 좌표가 없으니 추정치에 불과하지만 이 수치에서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던지듯 탁자 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사이러스가 외계어 같은 글자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만년필 끝으로 마지막 줄을 두드려 보여주는 친절까지 발휘했다.
“알고 있었습니까?”
둘의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도 이동할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다.
당초 사이러스가 세웠던 계획에 따르면, 그 혼자만 이 세계로 넘어왔을 때 그가 되돌아가는데 부족한 마력량은 기껏해야 3천만 토트. 딱 에스페란사가 가진 마력량 정도로, 무리하면 혼자서도 어떻게든 채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1억 토트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무슨 생각으로 숨긴 거지?’
불길한 생각들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듯했다.
사이러스는 고개를 들어 시더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이내 그는 고개를 약간 젖히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찌를 듯한 시선을 외면하며, 오랫동안 생각했던 답을 말했다.
“남는 건 접니다.”
시더의 손끝이 짧게 떨렸다. 만년필을 그러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그게 옳은 것 아닙니까.”
“그렇죠.”
마지 못한 대답을 내뱉은 시더가 흔들리는 숨을 다잡았다. 사이러스는 그의 눈을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남아서…… 해야 할 일을 할 겁니다.”
시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에스페란사가 떠난 후의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
“다리아도 에스페란사 님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낸다고 한들, 불규칙적으로 생기는 던전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사이러스는 분명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시더는 글라일리 하우스의 서재에서 사이러스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기억했다.
‘저희는 황금 발톱을 아주 많이 사용했고, 그건 곧 이 세상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저희가 통제할 수 없는 구멍이 말입니다. 마도 물리학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가 치유된다고 말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전까지는 예상할 수 없는 때에 던전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때 그건 분명히 이 세계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기제라면, 이 세계라고 예외가 될 리는 없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란 건가요?”
“그곳만큼 빈번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이 황금 발톱을 가져와 버리는 바람에……”
대체로 평화롭게 지냈던 에스페란사와 달리 그간 사이러스는 이틀에 한 번꼴로 사람이 없는 곳에서 황금 발톱을 풀어놓고 던전을 공략했다. 인벤토리 안에만 두었다가 그 안에서 황금 발톱이 멋대로 작동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하지만 그게 결국 이 세계에는 해가 되었다. 다리아와 사이러스, 각자가 가진 두 개의 황금 발톱은 이 세계에 원래 이 시기에 비해 열 배가 넘는 상처를 냈다.
“제가 벌인 일이니, 제가 끝낼 겁니다.”
사이러스는 결연히 말을 마쳤다. 어쩌면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곳으로 올 때 이미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돌아갈 수 있었다면 그런 생각은 안 했겠죠.”
시더가 냉랭하게 말했다. 계산식이 적힌 종이를 거둬들인 그가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긴 손가락이 헤아리듯 팔걸이를 두드렸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기가 막히다. 얄팍하기 짝이 없는 결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봐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우습네요. 궁지에 몰리고 나서야 대의를 생각한다는 게.”
약한 부분을 찔린 사이러스가 입을 꽉 다물었다. 저 남자는 사이러스에게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이러스는 그를 죽인 과거의 죄를 이유로 그것을 전부 감내하고 있지만, 백작은 사이러스의 죄책감을 휘두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본인이 겪지도 않은 일엔 관심 없다. 그냥 비꼬고 싶어서 비꼬고, 비웃고 싶어서 비웃는 것뿐이다.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이라고는 해도, 그 결정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 짐작하지 못할 것도 아니면서.
에이번데일 백작의 냉랭하고 귀족적인 얼굴을 노려보던 사이러스가 한층 격앙된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러는 당신은 떳떳합니까? 이걸 에스페란사 님이 아니라 내게 먼저 보여준 이유가 뭡니까?”
대답이 없자, 사이러스는 거 보란 듯이 쏘아붙였다.
“당신도 원했던 것 아닙니까? 에스페란사 님께는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으면서. 당신이 내 위선을 지적할 자격이 있습니까?”
시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미소를 유지하는 것도 힘겨웠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고작해야 온 세상에 끼쳐놓은 민폐를 수습하는 것뿐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