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아.”
날카로운 공구에 손이 찔렸다. 좀처럼 없던 실수였다. 멍하니 핏물이 솟는 모습을 바라보던 시더는 한숨을 쉬며 손에 든 것들을 전부 내려놓았다.
핏방울이 파이프를 타고 안으로 떨어졌다. 닦아내기엔 이미 늦었고,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혈액에서 마력을 추출하는 기계에 다른 혈액이 섞이는 건 곤란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길지는 않았다. 피가 배어 나오는 손으로 망치를 집어 들어, 기계와 기계의 연결점을 내리쳤다. 황동 파이프가 비명을 지르며 찌그러졌다. 몇 번 더 내리치자 기계는 시공간 기계 본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기계를 바라보던 시더는 공구를 내던지고 스툴에 주저앉았다. 피가 배어나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혀를 찼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폭력으로 화풀이를 해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순전히 야만적인 충동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으레 그렇듯, 끔찍하게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망가진 기계 부품과 손바닥이 얼얼한 충격의 여파, 시뻘건 피. 무엇 하나 좋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팔다리가 전부 덩굴에 친친 감겨 버린 듯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팔다리를 휘두르는 것. 단순하게 납득 가능한 일이다.
한 사람만 돌아갈 수 있다. 그 새로운 가정은 ‘에스페란사는 떠날 것이다.’라는 결론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동요를 숨길 수가 없었다.
“방금 무슨 소리…….”
문을 열고 들어온 에스페란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금속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싶었는데, 방 안이 엉망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져서는 부품이 떨어져 나간 기계. 우그러진 파이프. 핏자국이 남은 망치. 곧게 앉은 시더의 등과 보이지 않는 손.
시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가 그의 옆얼굴을 삼켰다. 눈을 찡그린 그는 빙그레 웃었다.
“놀랐겠군요.”
“괜찮아요?”
그건 다른 의미였다.
“알잖아요.”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에서 구급상자를 꺼냈다.
“손이라서, 온 김에 도와줘요.”
포션이 많으니까, 그걸 써도 되는데. 머릿속에 좀 더 합리적인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에스페란사는 눈을 깜박이다 대답했다.
“그래요.”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는 동안, 시더는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이 찢긴 상처를 노려보는 에스페란사의 눈이 매서워졌다.
“다 됐어요.”
붕대를 감은 손에 힘줄이 섰다. 에스페란사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다친 손바닥 반대편의 손등을 꾹 눌렀다. 무언의 추궁이었다. 시더가 짧게 웃었다.
“방금 건 정말로 별거 아니었어요. 작동 중인 기계에 피가 들어가서, 본체에 들어가기 전에 분리한 것뿐이에요.”
그 과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한 건 쏙 숨겼다. 그러나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었다.
“내가 바보예요?”
시더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변명이었지. 아주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에스페란사는 피가 배어 나오는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한 방 안에 괘종시계의 초침이 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심장 소리도 초침 소리를 따라 평소보다 조금 빨라졌다.
시더와 사이러스의 대화를 전부 듣지는 못했지만, 요지는 거의 알고 있었다. 시더가 이렇게 동요하는 이유도 짐작했다.
입 안에 맴도는 말들을 전부 삼킨 에스페란사는 딱 한 가지만 물어보기로 했다.
“일부러 다친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요.”
정말로 생각도 못 했다는 웃음이라, 굳었던 에스페란사의 어깨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오늘 사이러스랑 한 얘기…….”
“당신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요!”
“그래요? 날 굉장히 신뢰하나 보네요. 신뢰에 보답해야 할 텐데.”
시더는 또 실없는 소리나 해 댔다. 은근히 허리를 감싸는 손을 툭 쳐내려던 에스페란사는 친친 감아놓은 붕대를 보고 팔에 힘을 뺐다.
“다치니까 이런 것도 잘 받아 주고.”
“난 원래 잘 받아 줬어요.”
“음. 글쎄.”
겹쳐 쥔 손가락을 얽었다 밀어내는 손장난을 치다가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어깨에 완전히 기대앉았다.
요즘 시더가 예전보다 불안정해진 걸 느낀다. 그는 평소처럼 에스페란사를 대하려고 하지만, 가끔 헤매는 눈동자나 음미하듯 느리게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에서 그가 이 시간의 끝을 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끝이 다가올수록 더 깊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이 세계가 아쉬운 만큼 돌아갈 세계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귀환은 슬프지만 희망적인 일이었다. 나쁜 일이면서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시더에게는 그저 닥쳐올 날을 손꼽아 세는 재난일 뿐이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허리를 안은 커다란 손을 입가로 끌어와 손마디에 입을 맞추던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피로감이 조금 씻겨 내려간 듯한 얼굴로 그는 눈꼬리가 휘는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남는 게 좋을까요?”
충동적이었다. 그런 말을 한 건.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웃음기 서린 어투로 대꾸한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손끝에 감았다. 에스페란사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다지 반기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런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손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꿋꿋이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남으면, 나한테는 당신이 있잖아요. 코델리아도 있고, 애니도 있고. 사이러스는 아무도 없고.”
“언제는 나밖에 없다더니.”
“그거 좋은 거 아니에요.”
에스페란사는 뺨을 쥐는 손을 슬쩍 밀어내며 눈을 흘겼다. 시더가 눈꼬리에 입을 맞췄다.
“난 좋았어요, 그거.”
“……어쨌든.”
한 박자 늦게 대답을 마친 에스페란사가 숨을 내쉬었다.
“뭐.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할 문제잖아요.”
그건 그렇지.
사이러스는 대단한 희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형제의 잘못을 책임지고 있는 것뿐이다. 피해자인 에스페란사가 그를 가엾게 여겨줄 필요는 없었다. 집으로 가는 하나뿐인 티켓을 양보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사이러스가 이곳에 남는다면, 한동안 고독하겠지. 괴로울 테고. 이 세상엔 한때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이 가득하고, 그는 그 사실을 외면할 성정은 되지 못한다.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다리아와 사이러스가 이 세계에 벌인 짓들은 평생 동안 갚아도 부족하다.
“잘한 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나 봐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건 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흐렸다. 역시 괜한 얘길 한 걸까?
사실 사이러스의 미래에는 그다지 관심 없었다. 이건 그냥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말을 꺼낼 수 있는 계기에 불과했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말.
에스페란사는 곁눈으로 시더의 반응을 살폈다. 침묵이 길어졌다.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안으로 굽는데 왜 그쪽이죠? 이쪽이어야지.”
시더가 눈을 찡그리더니 에스페란사의 손목을 쥐었다. 손목 안쪽을 쓸어내리는 손길에서 불만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쳤다. 내리뜬 눈동자에는 온기가 없었다. 얼어붙은 회색 눈동자가 에스페란사의 눈에서부터 뺨을 천천히 지나 턱 끝까지 내려왔다.
몸이 비스듬히 기울더니, 등에 차가운 소파 천이 닿았다. 흰 치맛자락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얘긴 하지 말아요. 남아 주기라도 할 것처럼.”
늘 속으로만 하던 말이 기어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에스페란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노란 등불을 따라 일렁이던 눈빛은 차마 시더를 마주 보지 못했다. 자유로운 한쪽 손이 소파를 쥐었다.
“희망 고문. 이런 건 반칙이죠.”
시더는 구태여 눈을 맞추려 애쓰지 않았다. 에스페란사의 눈동자가 천장 한구석에 멈추자, 그는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비뚠 미소를 지었다.
잔인하기는.
“에스페란사. 모든 게 끝나면…… 지체하지 말고 돌아가요.”
굳은 입술을 애써 움직인 에스페란사가 물었다.
“당신을 위해서?”
“날 위해서.”
에스페란사의 뺨에 입을 맞춘 시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이 닫힐 때까지, 에스페란사는 멍하니 천장을 향해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희망 고문.
손끝이 천을 파고들었다. 열린 창문 새로 차가운 바람이 휭 불었다. 등잔불이 일렁였다. 그에 따라 방을 가로지르는 에스페란사의 긴 그림자도 튀어 오르듯 흔들거렸다.
시더는 처음부터 늘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흔들리고 있는 건 에스페란사 쪽이었다.
* * *
“사이러스. 여기에 남는 거, 내가 할까?”
냉병기가 부딪혔다. 사격장으로 쓰던 건물은 어느덧 에스페란사의 훈련장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였다. 사이러스가 머물기 시작한 후에는 두 사람의 대련장으로도 쓰였다. 이곳의 관리는 입 무거운 하워드 집사와, 놀랍게도 애니가 종종 맡아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벌이는 어마어마한 대련의 비밀을 짐작이나마 하는 것은 이 저택에서 애니와 밀런뿐이었다. 밀런의 일은 대체로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종류였기 때문에 자연히 사격장 관리는 애니에게 돌아갔다.
대걸레를 가지고 온 애니는 문을 닫고 두 사람이 난간을 비스듬히 밟으며 허공에서 부딪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화 소리는 금속이 서로 맞부딪치며 긁히는 소리에 묻혔다.
두 합이 더 지나간 후, 약간의 여유를 찾은 사이러스가 대답했다.
“그러실 이유가 없잖습니까. 이건 제 일입니다.”
이번엔 에스페란사의 움직임이 조금 무너졌다. 발끝이 예정된 곳에서 약간 빗나간 위치를 밟은 것만으로도 승기가 크게 기울었다. 몸을 뒤로 물린 에스페란사가 따라붙는 사이러스를 피하며 자세를 재정비했다.
“널 위해서는 아니고. 난 여기도 괜찮으니까. 그냥 한 번 생각해 본 거야.”
“에스페란사 님은…. 기다리는 가족이 있으시잖습니까.”
그 말과 동시에 챙그랑,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평범한 하녀는 두 손을 쓰더라도 들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검이 벽에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애니가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