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08
208화
“애니,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아가씨. 멀쩡해요. 그냥 좀 놀라서…….”
“그래? 그럼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오늘은 오토마톤한테 시키지 뭐.”
시더가 연구를 시작한 이후로 저택에서는 오토마톤 사용률이 높아졌다. 대외비인 연구 자료나 기계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이유로 이 사격장 역시 사람 손이 닿지 않아도 되는 일들은 청소부 오토마톤을 이용하고 있었다. 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러스는 목 옆에 생긴 따끔한 실선을 손수건으로 눌렀다. 에스페란사는 그에게 다쳤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로 사이러스에 대한 동정 때문에 한 질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주 약간의 동정심이 그러한 생각을 촉발했는지는 몰라도. 입 안이 썼다.
한번 마음이 식으면 냉정하게 돌아서는 만큼, 애정을 줄 때도 양손에 넘치도록 쏟아 주는 사람이다. 자기가 평생 살아가야 할 세계를 고르는 문제에서조차 그 애정을 저울에 올릴 만큼.
비록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한번 흔들린 이상 어떻게 될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아는 일이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돌아가야 한다.
“야.”
화를 낼 때조차 지금처럼 말씨가 험해진 적은 없었다. 사이러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에스페란사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있었다. 머리칼이 곧게 선 등을 감쌌다.
“네.”
“역시 내 몸은…….”
“병원에 있습니다. 아직 가족분들은 모르십니다.”
계획이 틀어진 것을 알게 된 후 사이러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기계째로 에스페란사를 옮기고 직장에 조치를 취해 두는 것까지.
합법적인 일도 아닌 데다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사흘 굶은 공복에 누더기 같은 빵을 채워 넣을 때처럼 허겁지겁 모든 일을 끝내고 나서야 이 세계로 넘어올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이러스는 에스페란사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잠깐 기울였을 뿐이다.
“그럴 것 같았어.”
그냥, 사이러스를 봤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때도 지금도 화가 나거나 괴로워지지는 않았다.
돌아간 이후의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안개로 가려진 듯 아득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 그냥 몸이 회복하려면 한동안 고생을 좀 하겠구나, 그 정도. 어차피 여기서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주저앉은 에스페란사가 세검을 닦았다. 송곳처럼 뾰족한 검 한 쌍을 닦는 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사이러스는 묵묵히 청소부 오토마톤을 작동시켰다.
쓰레받기를 들고 돌아다니는 오토마톤이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쯤, 에스페란사도 검을 전부 닦고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언니는 괜찮았어?”
“……네.”
“그럼 됐어.”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페란사가 사격장 문을 열었다. 흰 햇빛이 쏟아지며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나갔던 애니가 황급히 다시 돌아왔다. 사격장에 있던 두 사람 중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아까 매들린이 우유 배달부한테서 받았대요.”
기차표였다. 싸구려 3등석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쓰려고 끊은 티켓이 아니니까. 우유 배달부가 운반하더라도 의심받지 않을 만한 것. 똑똑하게 잘 골랐다.
에스페란사는 기차표 아래의 시간을 확인했다. 이틀 후 오전 11시 기차. 도착역은 핀리 중앙역.
설리번 박사가 핀리로 가는군.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려면 이틀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 정도면 연구소에 잠입해 기계를 파괴할 시간은 차고 넘쳤다.
“런더포드 양은 굉장히 철저하네. 이런 것까지 요청한 적은 없었는데,”
“그 템프턴이 쓰는 사람이니까요.”
뒤에서 나타난 사이러스가 대답했다. 에스페란사는 기차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게 시더가 말한 ‘목숨값’일까? 아니면 수상의 호의일까? 어느 쪽이든 제대로 도움이 된 것만은 확실했다.
“시더를 잘 부탁해. 절대로 다치게 하지 마.”
“……걱정 마십시오. 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사이러스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안락의자에 몸을 완전히 기대앉은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다리를 감싼 가죽바지와 채도가 낮은 하늘색 블라우스, 허리에 맨 가죽 벨트와 거기에 달린 주머니들. 짧은 가죽 재킷과 비껴 쓴 모자. 처음 왔을 때와 비슷한 차림이었다. 마치 이대로 떠날 것처럼.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더는 완성되지 않은 기계를 떠올렸다. 파문이 일었던 수면이 거울처럼 잔잔해진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소 지었다. 어떤 불안감도 느끼지 않은 것처럼. 이틀 전 밤, 이 소파 위에서 두 사람이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던 것처럼.
“주머니는 쓰지도 않으면서.”
“벨트랑 통째로 세트라서 별수 없어요. 이게 옵션이 제일 좋으니까.”
“흐음.”
장총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고 겉옷 소매 안쪽에 권총을 지참한 에스페란사는 긴 머리칼을 성기게 땋은 모습이었다. 시더는 팔짱을 낀 채 몸을 등받이에 더 깊게 묻었다. 마음에 안 드나?
“별로예요?”
“아뇨, 예뻐요. 그건 그거고.”
그는 에스페란사의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연구실로 들어갔다. 에스페란사는 까치발을 들고 시더의 어깨 너머를 훔쳐보았다. 까치발로 충분하지 않자 신발을 벗고 소파에 올라갔다.
하지만 소파에 올라간다고 해서 뭐가 보이진 않았고, 벽 너머를 투시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더는 벽 반대쪽에서 한참 무언가를 찾다가 이윽고 밖으로 나왔다.
“뭐예요?”
“……소파에 올라갔어요?”
“신발 벗었어요.”
바닥으로 내려온 에스페란사가 신발을 다시 신었다. 시더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는 최대한 관용의 정신을 발휘한 결과였다. 에스페란사는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 눈을 굴렸다.
“이거, 쓸 줄 알아요?”
잠시 후 그가 내민 것은 마정석과 유사하게 생긴 작은 구슬이었다.
“폭탄이에요?”
“그렇게까지 위험한 물건은 아니에요. 본래는 폭죽 정도의 용도지만, 더 강한 마력과 부딪히면 폭탄 비슷한 효과는 낼 수 있겠죠.”
그런데 이걸 왜? 에스페란사는 구슬을 가죽 벨트에 달린 주머니에 넣으면서 생각했다. 빈집에 들어가 딱 기계만 부수고 오면 되는 일이다.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시더가 어릴 때 만든 부분은 떼 가지고 올 생각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폭탄 같은 게 필요할 일은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까요. 스털링 때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준비할 겨를이 없었고.”
지금까지 전투는 늘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러니 이 정도는 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큰 문제가 없다면 이것도 쓸 일이 없을 테지.
“경관들도 다른 쪽으로 보내 놨고, 다리아가 없는 것도 확인했고. 아까 런더포드 양이 설리번 박사가 기차에 타는 걸 확인했다는 연락도 보내 줬고요.”
설리번의 계획이 갑자기 변경될 수도 있고, 기차표를 끊은 것 자체가 위장일 수도 있으니 기차에 타는 모습까지 확인한 것이다. 런더포드 양은 철저했다.
“아, 목숨값.”
“그런가 봐요.”
에스페란사는 씩 웃었다.
“어쨌든, 준비도 다 끝냈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아요. 저녁 식사 전에는 돌아오겠죠? 혹시 모르니까 연구실 앞에 사이러스 앉혀 둬요.”
“거긴 당신 자린데.”
“특별히 빌려 줄게요.”
시더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러스 쪽도 그리 달가워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불편한 것이 위험한 것보단 나았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덩어리째 들어왔다. 봄이 오지 않은 정원으로 나가려던 순간, 시더의 손이 급히 에스페란사의 팔을 붙들었다.
몸을 돌리자 어깨를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시더가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여느 때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인사를 할까요.”
에스페란사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덮듯이 드리웠다. 늘 눈높이를 맞춰 주었던 탓에 시더가 에스페란사보다 한 뼘 넘게 큰 장신이란 사실을 의식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조금 숙여 고개를 든 에스페란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마치 적의 동태를 살피는 듯한 탐색이 이어졌다. 허리께의 셔츠 자락을 쥔 에스페란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더는 옷자락이 구겨지는 것은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조금 더 비틀었다. 여전히 눈은 감지 않은 채였다.
“시간이…….”
에스페란사의 눈이 잠깐 시계 쪽으로 향하려는 순간, 두 입술 사이에 남아 있던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공간이 완전히 사라졌다.
몸이 천천히 뒤로 밀렸다. 어깨에 차가운 유리가 닿았다. 등을 받치던 커다란 손은 뼈마디를 따라 쓸고 내려가다가 허리 아래를 감쌌다. 잠깐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얽혀들었다. 틈 없이 깊게.
내리 뜬 눈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시선은 입술이 떨어졌다 다시 붙기를 반복하는 내내 매듭진 듯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나치게 흥분을 고조시키지는 않는, 다만 인사로서도 적합하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시더의 어깨를 천천히 밀어낸 에스페란사가 상기된 뺨을 손바닥 아래로 감추었다. 어깨가 빠르게 오르내렸다.
시더는 젖은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만하면 됐다는 듯이 선뜻 말했다.
“다녀와요.”
에스페란사는 눈을 찡그렸다.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달싹였지만,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난간을 뛰어넘었다.
시더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더 붙잡았어야 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불길했다. 무엇 하나 그럴 이유가 없는데.
그러나 그것보다 더 힘겨운 것은 그 불길함에 무게를 실어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 감각은 그저 에스페란사를 보내기 싫은 감정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다른 때라면 의심하는 대신 이 불길함을 파헤쳐 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가 얼마나 온전하지 못한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그는 그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할 수 없었다. 파헤치고 파헤쳐서 나온 바닥에 진실 대신 감정만 고여 있을까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