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1
21화
응접실에 앉은 후에도 켄드릭의 실수는 끝나지 않았다. 시더가 무슨 말을 하든지 말든지 에스페란사를 멍하니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다 지팡이로 자기 발등을 찍고,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저 사람, 도움 되는 거 맞아요?’
‘……글쎄요.’
나름대로 켄드릭을, 정확히는 켄드릭을 집까지 데리고 온 자신의 선택을 변호해 보던 시더도 결국은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젓고 있었으니 말은 다 했다.
“펄즈베리 자작님.”
“예, 예!”
“자작님을 여기까지 청한 것은, 로드 에이번데일의 연구 때문이에요. 물론 저도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고요.”
“관심이, 제게……?”
“‘로드 에이번데일의 연구’에요, 자작님. 안 들으실 거면 전 좀 올라가 봐도 될까요?”
에스페란사가 짜증을 담아 말하자, 그제야 켄드릭은 조금 진정했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장난감 같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흠. 흠. 마, 말씀하십시오.”
“내가 말할 테니까, 추태는 적당히 부려, 펄즈베리.”
“추태…… 내가 추태를 부렸나?”
“초면의 숙녀 앞에서 엄청나게. 에스페란사, 럭스 부인에게 내가 저번에 부탁한 걸 좀 전해 주지 않겠어요?”
그런 건 당연히 없었다. 있다고 해도 에스페란사를 통해서 전할 이유도 없고. ‘저 자식 적당히 진정시킬 테니 잠깐 나가 있어요’ 정도의 뜻이었다. 곧 에스페란사가 나가자, 펄즈베리 자작이 시더의 손을 꽉 붙잡았다.
“놓지그래? 잠깐 물어볼 것 있다고 했을 땐 그렇게 콧대를 세우더니?”
별로 친하지 않은 켄드릭을 이 자리까지 부르기 위해 저 콧대 높은 동문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설득해야 했던 시더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자 켄드릭은 아예 무릎을 꿇었다.
“에이번데일, 우린 좋은 친구 아닌가.”
“친구는 무슨.”
“자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말하겠네. 필요한 건 다 도와줄 테니까, 내가 미스 에, 에스페란사 헌터에게 구애할 수 있게 허락해 주게.”
허락?
시더는 문득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되는군.
‘스물세 살의’ 숙녀 에스페란사 헌터의 후견인인 시더 클라이번은 마땅히 그가 보호하는 숙녀가 무사히 결혼할 수 있도록 도울 의무가 있다. 그 의무에는 건실하지 못한 청년의 구애를 금지하고 청혼을 불허할 수 있는 권리가 따라온다.
그와 에스페란사의 관계에서야 그런 것들은 무의미하지만, 켄드릭 그림스턴-행어만 그걸 모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글쎄, 그건 에스페란사의 마음에 달렸지.”
점잖게 물러나는 체했지만, 그게 앞으로 두고 보겠다는 뜻임은 서로서로 알아들었다. 켄드릭은 ‘이럴 줄 알았으면 냉큼 온다고 할걸!’ 하고 좌절하며 슬금슬금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자넨 좋겠네, 미스 헌터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이 집에선 마부나 정원사도 부르는 이름인데, 뭐.”
“자네 집의 마부나 정원사가 되고 싶어…….”
그는 아직도 벌건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더니 에스페란사가 떠난 응접실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 나는 첫눈에 반했네. 나와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는 운명인 게 틀림없어.”
이 작자가 에스페란사의 이름을 입에 담아 보려고 어떻게든 풀네임을 부른다. 시더는 그 하찮은 시도를 비웃으며 말했다.
“착각이야.”
“그럴 리 없네. 난 분명 운명을 느꼈어!”
“자네가 그렇게 느낀 건 에스페란사가 미인이기 때문이지. 자네와 운명이라서가 아니라.”
문고리가 조용히 돌아가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켄드릭이 별 되지도 않는 추태를 부리며 몸을 비비 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켄드릭을 부른 장본인이자 호스트로서의 도리로 그 꼴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야, 자네 같은 돌덩어리가 뭘 알겠나? 내 감정은 특별해!”
“무도회에 던져 놓으면 지나가던 남자 열댓 명은 똑같이 말할걸. 그럼 에스페란사는 그 열댓 명과 다 운명인가?”
“별로 그러고 싶진 않은데요?”
뚱하니 대답한 에스페란사가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시더는 황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난 분명 운명을 느꼈어!’부터요. 아직 본론은 들어가지도 못했나 봐요.”
에스페란사는 짧게 웃으며 식은 홍차 잔을 돌렸다. 두 남자가 제각각의 이유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한참 후, 켄드릭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라고?”
켄드릭 그림스턴-행어는 펄즈베리 후작, 엘리자베스 그림스턴의 아들로, 형법학자이자 법관이었다. 시더 클라이번이라는 어마어마한 천재에 가려서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동문 중에는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성취를 보인 인물이었다. 법관 일을 하며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그를 시더가 골라 온 것은 이러한 그의 이력 탓이었다.
법관이니 이런저런 사건에 접근도 빠를 테고, 그 자신이 논문을 준비 중인 형법학자인 만큼 뜬금없이 이상한 사건에 관심을 가져도 의심받지 않을 테고.
물론 마도 공학자인 시더 클라이번이 그러는 것은 충분히 의심받을 만하지만, 켄드릭은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없었다. 지금은 에스페란사에게 홀려 있으니 없는 눈치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한 구역의 사람이 통째로 죽은 사건 말이지.”
“생각나는 것 있으세요?”
“그게, 사고라면 법원까지 올라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수사관들에게 물어보시는 편이 낫겠지만 수사관들도 자기 구역이 아니면 잘 모르고…… 아니면 기자들이 더 잘 알지도요.”
“자네는 아는 게 없다?”
당장 쫓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켄드릭은 에스페란사를 흘끔거렸다. 그러나 그가 일방적으로 운명을 느낀 숙녀의 반응은 시더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 쫓겨나면 정말 이도 저도 안 된다!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도 영지 경비대 차원에서 묻어 버리는 경우도 많고! 알잖나, 누가 고소라도 하지 않는 이상 법원에 시골에서 일어난 사건 같은 건 안 올라와. 그렇게 한꺼번에 죽었으면 돌림병이라고 마무리했겠지.”
“아주 단기간에 죽었다면요? 예를 들면, 반나절 정도.”
켄드릭이 입을 헤 벌리고 에스페란사를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런 경우라면 아무래도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든 쫓겨나지 않고 이 응접실에 10분이라도 더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기 위한 켄드릭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아, 아! 맞아요! 마벨우드의 실종 사건!”
실종 사건?
에스페란사는 시더와 눈빛을 교환했다. 수상한데.
“마벨우드 남작가?”
“바로 거길세.”
대강 대답한 켄드릭은 에스페란사를 향해 열렬한 눈빛으로 설명했다.
“마벨우드 남작께서 손녀따님이신 레이디 코델리아의 혼사 문제로 나인 호더에 계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자세한 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성사될 뻔했던 혼담이 지지부진 끌다가 결국 파기됐다고 하더군요.”
“그 사건이 생각나신 이유라도 있나요?”
“아까 말씀하신 것 때문입니다. 정말 총명하십니다,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
“미스 헌터라고 부르셔도 돼요.”
꼼수를 발각당한 켄드릭의 웃음이 어색해졌다. 시더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켄드릭이 그를 노려보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에스페란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아, 아무튼. 마벨우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곳이 원래 넓고 사람은 띄엄띄엄 사는 지역인데, 몇 집이 모일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이는 아니고 스무 명 정도요. 회의를 했는지 파티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음 날에 그 날 모였던 사람들이 싹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실종된 건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 사람들의 가족 중 하나가 그 날 일이 있어서 참석을 못 한 모양입니다.”
자세한 것은 모른다는 것 치고 꽤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켄드릭은 그 사건이 사교계에서 알음알음 소문으로 돌았다고 했다. 으스스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마벨우드 남작이 사람을 풀어 인근 숲을 샅샅이 뒤졌지만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던전인 것 같아요?”
켄드릭이 돌아간 후, 시더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할 것 같네요. 가능성이 높다는 확신이 들면,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켄드릭은 사건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었지만 던전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마벨우드 남작께 물어보는 건 어때요? 본인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니 가장 잘 알겠죠. 어쨌든 사교계 시즌이니 그들도 나인 호더에 올라왔겠죠.”
어차피 사교계에다 스스로를 소개할 예정이라면 그 기회를 이용하라는 뜻이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리고 정보상에게도 마벨우드 사건을 자세히 알아보라고 해야겠어요.”
“좋은 생각……이라고 하고 싶진 않지만 좋은 생각이에요.”
시더는 여전히 정보상을 꺼렸다. 불결하고 위험하다는 것인데 전자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후자는 본인이 할 말이 아니지 않나?
“적어도 정보상은 내 피를 노리지는 않는다고요.”
에스페란사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시더는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정말 놀라운 양심이다.
잠시 후 불려온 집사가 마벨우드 남작이 참석할 만한 자리의 초대장을 몇 개 추려냈다.
“이 중에 당신이 참석할 만한 건 이거 두 개 정도네요.”
하나는 가이먼 저택에서 열리는 무도회였고, 다른 하나는 험프리 경의 가든파티였다.
“험프리 경……!”
“알아요?”
“한 8년쯤 후에는 험프리 경도 절 알게 되겠죠.”
그 전까지는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하긴, 당신 기사 작위도 있다고 했으니.”
“그거랑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요.”
“어쨌든 익숙하다면 험프리 쪽으로?”
에스페란사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험프리 경과 에스페란사는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 댁 따님의 혼사를 파투낸 일이 있어서.
그치만 그건 순전히 그놈 잘못이다. 그놈이 사람들을 납치해서 몬스터 시체와 결합하는 연구를 지원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여기도 있지. 매드 사이언티스트.’
부드러운 얼굴선을 따라 음영이 곱게 진다. 미남이라고 유명했던 NPC들 중에서도 이만한 외모는 없었는데. 눈을 내리뜨고 있던 시더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응? 왜 그래요?”
산뜻한 얼굴로 묻는 시더를 의심스레 바라보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 대단히 편견 섞인 눈을 본 것 같은데.”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더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끝까지 답을 듣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