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10
210화
에스페란사는 공략 게시판을 참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한동안 접속 시간이 겹쳤던 어떤 유저는 게시판에 올라오는 공략법을 줄줄 외고 다녔었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에스페란사님은 다 그렇게 몸으로 부딪쳐 보는 게 좋아요? 다치면 아프잖아요.’
‘엄청 아프지도 않으니까요. 할 만하니까 하는 거죠.’
‘그런가? 그래도 전 최대한 안 아프게 깨고 싶어요. 어차피 황발 던전은 공략 알아도 공략대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던전 종류가 같다고 같은 몬스터가 같은 위치에서 순서대로 나와 주는 게 아니다. 다만 각각의 몬스터를 어떻게 공략하는지와 어떤 던전에 어떤 장비를 들고 가야 하는지, 그런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됐다.
‘윽, 타임 어택이다. 한 시간! 이거 공략 없으면 죽겠는데요? 이제 궁금하죠?’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막상 위기가 닥쳤을 때 정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컸다.
에스페란사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도 연구소였다. 최소한의 도덕도 없는 자들이 흥분에 겨워 사람 몸에 몬스터 팔다리를 기워 붙이던 곳.
다행히 실험체는 전부 경관들이 압수해 버린 후라 직접 볼 일은 없었다. 하지만 딱 키메라 만드는 놈의 머릿속에서 나올 법한 징그러운 오토마톤들은 지겹게 보았다.
‘쟤도 꽤 비슷하게 생겼었지. 그럼 설마 여기에도……’
아니지. 그럼 아까 발견했을 것이다. 침착하자.
복도 뒤쪽으로 밀려난 에스페란사가 순식간에 균형을 잡고 총탄을 발사했다. 괴물의 팔이 날아갔다. 그대로 머리에도 명중했으나 머리는 뭘로 만들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칼날이 날아왔다. 원거리 대 원거리. 에스페란사는 이를 갈며 뛰어올라 칼날을 피했다.
전부 죽이고 보스전을 치르면 늦는다. 지름길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2년 전에 치른, 수많은 전투 중 하나에 불과했던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때 그 애가 뭐라고 했더라.
‘왜, 가끔 먹이 주면 공격 안 하는 애들 있잖아요.’
‘그랬어요?’
‘아, 그냥 다 죽이셨구나.’
이게 아니고.
원거리 무기 대 원거리 무기의 대결에 질린 에스페란사가 총 대신 검을 들고 칼날을 쳐내기 시작했다. 괴물이 칼날을 뱉는 데는 쿨타임이 거의 없었지만, 에스페란사의 속도는 그 짧은 쿨타임보다도 빨랐다.
복도를 가로질러 순식간에 괴물의 눈앞으로 다가간 에스페란사가 순간 탄성을 터뜨렸다.
“배터리!”
그래, 그거다!
‘쟤네 전원 끄면 꺼진대요.’
괴물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본질은 기계였다. 깨부수면 당연히 공격을 못 한다. 하지만 부수지 않아도 마력만 제거하면, 즉 마정석이 없으면 작동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칼을 인벤토리 안에 던져 넣은 에스페란사의 손에는 어느덧 장총이 들려 있었다. 거대한 기계의 마력 중추. 마정석 삽입구.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위치를 셈하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노려야 할 곳은 하나. 통로만큼이나 거대한 기계에 비해 아주 작은 점. 하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못 맞추면 저격수라 할 수 없지.
철컥. 철컥. 부품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온 몬스터가 입을 벌렸다. 다른 때라면 그냥 때려 부쉈겠지만, 방금 봤듯이 단순히 마력탄을 퍼붓는 것만으로는 부서질 것 같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에스페란사는 칼날을 내뿜으려는 괴물의 입을 망설임 없이 발로 걷어찼다. 마력을 실은 발길질에 몬스터가 비틀거렸다. 바닥에 뛰어내렸던 에스페란사는 그 반동으로 괴물의 어깨를 타고 넘었다.
몬스터가 균형을 잃은 짧은 순간.
어깨를 넘어가 등 뒤에서 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새파란 마력이 괴물의 목 뒤에 붙은 작은 뚜껑을 꿰뚫었다. 전기가 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두꺼운 기계의 목 한가운데에 손가락 두께의 구멍이 생겼다.
공격 대상을 향해 재빠르게 몸을 돌리던 기계가 몸을 반쯤 돌린 상태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삐걱, 삐걱. 쿵. 바닥에 쓰러진 기계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에스페란사의 워커가 황동 손가락의 관절 부분을 밟아 부수었다.
목에 난 구멍에 손을 집어넣은 에스페란사는 마정석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확인했다.
‘끝났네.’
상태창 한구석의 ‘사망’ 옆, 선명한 숫자 1을 확인하고 나서야 장갑에 붙은 금속 조각을 털어냈다.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린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끝난 게 아니다. 이제 시작이었다. 계단을 가득 채운 기계들이 시퍼런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그 중 몇몇은 에스페란사도 아는 모양이었다.
‘곤란한데.’
설리번의 관심 분야는 타임머신이었지만, 그의 특기 분야는 무기였다. 시더가 만들어 준 것 이전의 총을 만들어준 것도 설리번이었다.
설리번의 기계는 대부분 살상용이었다. 칼날 뿜는 골렘같이 원시적인 것이라도 평범한 접시닦이 오토마톤 따위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최대한 빨리 해치운다. 다소간 부상을 입는 한이 있더라도.
‘사이러스가 최대한 오래 버텨 줘야 할 텐데.’
뱃속이 꼬여 드는 것 같은 조바심을 애써 억누른 에스페란사가 총을 고쳐 잡았다.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한 시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에스페란사가 없는 서재는 고요했다. 사이러스는 펼쳐놓은 책에서 눈을 뗐다. 글자가 튀어나와 춤추는 것 같았다. 흥미도 없는데 시간 때우려 붙잡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에스페란사가 돌아오면 냉큼 돌아갈 것이다.
시선이 책장 옆의 괘종시계에 닿았다. 1시 30분. 초침이 1에서 2까지 가는 데 1분은 걸리는 것 같다.
‘고장 난 것 아닌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기어가는 초침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더 역시 그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 백작은 사이러스가 소파에 자리 잡는 것을 확인하고는 연구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도중에 물 한 모금 찾지 않았다.
목이 마르지도 않은가? 나오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사이러스는 초점이 풀린 눈을 다시 책 귀퉁이에 고정한 채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설리번 박사의 연구소엔 그가 가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만에 하나 다리아와 마주칠 경우까지 고려하면 안 가는 게 맞지만, 심정적으로는 그랬다.
한낮의 볕을 한 몸에 받고 있자니 정신이 차츰 멍해졌다. 어퍼 레인 입구에서부터 드물게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을 빼면 너무나도 조용한 오후였다. 목이 타는 것 같아, 구색만 맞춘 찻잔을 들어 홍차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는 지금쯤 병원에 있을 에스페란사의 진짜 몸을 생각했다.
에스페란사에겐 단순히 병원에 있다고만 말했지만, 실제로는 기계에서 꺼내지 않은 채 통째로 병원으로 옮긴 상태였다.
황금 발톱 전용으로 제작된 기계는 기존 가상현실 게임기를 개량해 가상현실 플랫폼 대신 실제 세계로 이동할 수 있도록 연결한 것이다.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기술자들은 원래 세계의 가상현실 기술과 이쪽 세계의 시공간 기계를 접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동한 것이 의식일지 영혼일지는, 그들로서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신체와 기계의 연결을 깨뜨리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였으니 아무리 돈을 들인다 한들 할 수 있는 처치에는 제한이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에스페란사의 몸은 적잖이 약해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에스페란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적절한 시기에 맞추어 돌아간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이곳으로 오기 전에 에스페란사에게 보상금 조로 증여한 금액이 충분할지를 셈해 보던 사이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한 몸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에 대한 보상은, 그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쓴웃음을 지은 사이러스는 곧 책을 완전히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발코니로 나왔다.
찬 바람이 뺨을 때리자 혼탁하던 머릿속이 조금 차분해졌다. 어차피 할 것이라곤 가만히 앉아서 고민하는 것밖에 없지만…….
“뭐지?”
다음 순간, 발코니 난간을 쥔 사이러스가 길 너머의 마차를 노려보았다.
고리타분하게 생긴 마차. 화려하지는 않지만 검은 몸체에 새겨진 문장은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황금 물레바퀴와 낫. 새턴 왕가의 문장.
에이번데일 저택은 어퍼 레인에서도 조금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까지 온 마차의 목적지가 다른 곳일 리 없었다.
“에이번데일!”
사이러스는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언짢은 얼굴을 한 시더가 문을 열었다.
“대체가, 조용히 부를 수는 없는…….”
“밖에 왕실 마차가 와 있습니다.”
“여기에?”
질문을 던지기는 했지만 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사이러스를 지나친 시더는 열린 창문턱을 넘어 발코니로 향했다.
정말이었다.
커다란 정원 너머 아직 정문에 들어서지도 않은 마차에 찍힌 문장을 식별할 재주는 없었지만, 이 시대에 저렇게 고풍스러운, 마치 상류층 거리에서 백 년 전에나 끌고 다녔을 것 같은 마차의 존재가 다른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다리아가 왕실을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을까요?”
“한 몸이라고 봐도 좋을 겁니다.”
“그럼 좋은 용건은 아니겠군요.”
시더는 베스트와 자켓을 갖춰 입으며 말했다. 당장 몸을 피해야 하는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뭐 하는 겁니까?”
“왕실 마차를 타고 왔으면 폐하나 대공 전하께서 직접 보내신 측근이겠죠. 나 말고 누가 대접하겠어요. 신분도 없는 당신이?”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가능하다면 그렇겠지. 시더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스페란사는 권모술수에 약해도 이해는 빨랐는데, 이쪽은 영 아니다.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하루가 다 갈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친절해지고 싶지도 않고.
그는 설명 대신 냉랭한 미소로 답했다.
“무슨 수로요?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왕실 마차를 보낸 겁니다.”
왕실 마차가 에이번데일 저택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지금쯤 어퍼 레인 전체에 퍼졌을 것이다. 그리고 사교계에선 저택의 주인이 외부와 거의 단절된 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완전히 걸려들었군요. 에스페란사가 없다는 걸 알고 이러는 게 틀림없어요.”
불길한 기분이 들더라니. 시더는 그가 지금껏 비웃던 멍청이들처럼 과거의 직감을 회상했다. 그때는 그 직감이 그저 감정의 발로일 뿐일까 두려워했지만, 반대로 직감을 억지로 파묻으려던 강박이 그의 두려움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함정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