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13
213화
‘저런 걸 잘 남기지 않는 사람인데.’
어디선가 의뢰받아 만든 물건인 모양이다. 그런 경우에는 으레 확실한 보증서를 원하기 마련이니까. 편집증에 시달리는 재력가나 군수업체, 군부일 수도 있다. 그게 설리번 박사에게 흘러들어온 것은 다리아 덕일 테고.
내부 회로가 드러나 있었던 것도 이해가 됐다. 설리번이 연구용으로 입수해서 뜯어보던 중이었겠지. 정리도 하지 않고 다급히 떠난 탓인지 이 방에도 먼지가 수북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더가 손수 만든 발명품과 싸워야 한다니. 착잡한 기분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때, 다른 색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눈 부분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배 속의 작은 톱니바퀴들이 바쁘게 돌기 시작했다. 왼쪽 팔이 열리더니 에스페란사의 머리만 한 총구가 나타났다.
“어?”
저게 뭐야, 대포?
당황한 사이, 총구에 새까만 마력이 맺혔다. 펑! 에스페란사는 재빨리 옆으로 굴러 몸을 피했다.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 뒤에 시커먼 구멍이 생겼다.
이것 봐라? 속도가 상당하다.
기본적으로 오토마톤의 움직임은 느리고 뻣뻣하다. 연산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수백 개의 진공관과 마력 회로를 겹쳐놓은 해석기관 대신 약식 연산 회로만 들어갔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저렇게 매끄럽고 빠른 움직임이라니.
처음 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시대, 고작 설리번 박사의 연구실에서 볼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던 것이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시더 클라이번의 발명품이라면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다른 곳, 다른 시점에 만났다면 공략의 즐거움을 만끽했을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몸을 낮추고 총구에 마력을 모았다. 일단 왼쪽 팔부터 부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탕, 탕, 짧은 총격이 이어졌다.
오토마톤의 왼팔이 짧게 움직였다. 관절을 노린 마력탄이 총구 안으로 들어갈 만큼의 움직임이었다.
‘흡수했어.’
온몸의 근육이 빠듯하게 긴장했다. 저 기계는 만만찮은 적수가 될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기계의 총구에 아까와 달리 푸른 마력이 맺혔다. 정확히 같은 출력으로 마력탄이 터져 나왔다.
대비하고 있었던 만큼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괴물의 목 위로 올라탔다.
‘이런 건 근접전으로 해결해야지.’
손에 들려 있던 장총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고 검을 꺼냈다. 늘 쓰던 세검이 아니라 폭이 넓은 투핸드소드였다. 한 손으로 휘두르고 있기는 했지만.
그대로 괴물의 왼팔이 닿지 않을 어깨 뒤쪽으로 타고 넘었다. 척추 대신 세운 금속 뼈대를 밟고 날갯죽지 근처, 부품과 부품 사이를 노려 깊게 찔렀다. 괴물은 미동도 없었다.
아프지도 않단 거지.
찝찝한 기분이다. 기계를 공격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다. 기계와의 전투가 길어질수록 지금껏 상대해 왔던 괴물들이 모두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졌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 살육을 즐겼던 몸으로서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불편함 따위를 음미할 여유는 없었다. 한 시라도 빨리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수밖에.
깊게 찌른 검을 비틀었다. 공간이 벌어지며 내부 부품이 어긋나는 것이 느껴졌다. 기계가 버벅거렸다.
다시 한번 마력을 실어 깊게 찌르려던 순간이었다. 기계 팔의 관절이 반대로 꺾였다. 목이 마치 레일을 타듯이 180도 회전했다. 순식간에 앞뒤가 바뀌었다.
에스페란사는 헛숨을 들이키며 재빨리 기계에서 떨어져 나왔다. 방금은 위험했다. 생명체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상대는 기계다. 그것도 시더가 손수 만든 기계.
‘사각이 없어.’
아니, 시간이라는 변수를 제외하면. 연산에 필요한 시간이 있으니 그 전에 해결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기계 팔 끝의 총구가 다시 새까맣게 빛났다. 에스페란사는 숨을 다잡고, 검을 세게 쥐었다. 펑, 마력이 터져 나온 순간 높게 뛰어 거리를 좁혔다. 차례로 기계의 건장한 팔, 어깨를 밟고 머리를 타고넘어 순식간에 뒷목을 찔렀다.
콰득. 파랗게 빛나는 칼끝이 철판을 꿰뚫었다. 머리와 기계 팔이 다시 한번 매끄럽게 돌았다.
에스페란사는 기계가 공격을 재개하기 전에 검에 마력을 더 불어넣어 한층 깊게 찔러넣었다. 정교한 회로가 부스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흐름이 깨진 마력이 칼을 타고 올라왔다.
거대한 기계 팔이 에스페란사를 조준한 채 새까만 마력을 모았다. 빛을 빨아들일 듯이 검은 마력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마력탄이 터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깊이 박힌 칼끝이 응축된 마력을 터뜨린 것이 느껴졌다. 에스페란사는 깊게 꽂힌 검을 버리고 기계 팔 아래로 몸을 미끄러뜨려 피했다. 뒤늦게 터진 마력탄이 잡동사니가 가득하던 방 한구석을 날려 버렸다.
다시 봐도 엄청난 출력이다. 에스페란사는 문을 등진 채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기계가 살아 있는 사람의 존재를 추적하듯 고개를 돌렸다. 눈 부근에 빨간 불이 깜박였다. 반사적으로 새로 꺼낸 검을 쥐었던 에스페란사가 멈칫했다.
“왜 안 멈춰?”
분명 방금 전에 마정석을 깨뜨렸는데?
뭐지?
혼란을 틈타 기계가 거리를 좁혔다. 에스페란사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기계의 배 부분, 여전히 멀쩡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노려보았다. 날실과 씨실이 촘촘히 엮이듯 빈틈없이 짜인 회로는 두 군데나 부쉈는데도 전혀 타격이 없는 것 같았다.
거칠게 휘둘러진 기계 팔을 검으로 막는 동안에도 에스페란사의 시선은 회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
자세히 보니 같은 회로 두 개를 겹쳐놓았다. 하나가 끊어지더라도 다른 회로를 돌릴 수 있도록.
매끄럽게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일반적인 기계들에 비해 두 배 이상 빠른 연산 속도. 다른 마도 공학자가 보았다면 감격에 겨웠을지도 모른다.
이를 데 없이 견고하고 치밀한 구조. 기계일 뿐이면서 에스페란사를 한순간이나마 밀어붙일 정도로 강력한 화력, 빠른 연산 속도와 매끄러운 움직임. 부수는 것이 서글플 정도였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이 기계의 발명가를 찾으러 가야 한다. 그가 무사한지 확인해야 한다.
도움닫기와 동시에 몸을 높이 띄워 기계의 머리 위에 선 에스페란사는 총구를 황동빛 정수리에 겨누었다. 기계 팔이 에스페란사를 향해 마력을 조준했다. 질세라 에스페란사도 마력을 끌어올렸다. 발밑에서부터 새파랗게 피어오르는 마력이 금빛 총신을 타고 흘러 총구에 고였다.
시더 클라이번의 발명품으로 시더 클라이번의 발명품을 해치우는 기분이 기묘했다.
작은 총구에 모이기에는 지나치게 큰 마력이 총신을 터뜨릴 것처럼 부풀렸다. 에스페란사는 아랑곳 않고 마력을 더 모았다. 위험 수치에 이르자 총이 경고하듯 덜그럭거렸다.
그리고.
탕!
간발의 차였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마력이 정수리부터 발등까지, 회로 전부를 관통했다. 손바닥이 찌르르했다. 마력이 몸에서 쑥 빠져나가는 감각은 마치 영혼이 뽑히는 듯했다.
불쾌한 감각이었다. 시더가 하나하나 부품을 끼워 세심하게 탄생시켰을 작품을 부수는 것. 마치 시더 본인을 부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 건 어쩔 수 없었어.’
에스페란사는 거친 숨을 다잡으며 무너지는 기계 위에서 뛰어내렸다.
한발 늦게 방아쇠를 당긴 기계의 마력이 새듯이 분출됐다. 에스페란사는 검으로 마력이 고인 기계 팔을 찍어눌러 새어 나오는 마력을 틀어막았다.
“하…….”
땀으로 흠뻑 젖은 목덜미를 손등으로 훔쳐낸 에스페란사가 등을 벽에 기댔다.
[던전 보스, ‘???’를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이 적립됩니다.]3시 10분.
우뚝 멈춰선 에스페란사는 몸을 굽혀 바닥에 흩어진 기계 부품 하나를 주웠다. 손에 자국이 남을 만큼 강하게 틀어쥐었다. 이렇게 한들 돌아갈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지만……. 그리고 다음 순간, 에스페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남의 눈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시간이 없다. 새까만 후드로 얼굴만 가린 채 건물 위를 날아 저택으로 향했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대체 그게 무슨 꼴인가요!”
등 뒤에는 철제 날개. 숙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시커먼 후드, 군화. 현관문을 두 손으로 열어젖히고 벌컥 뛰어든 에스페란사를 발견한 럭스 부인이 기겁했다. 에스페란사는 무시했다.
“시더는? 어디 있어?”
“백작님께선 아까 전에……”
“에스페란사!”
응접실에서 코델리아가 뛰쳐나왔다.
“도와주러 왔어요. 지금 당장 어거스텀 궁전으로 가야 해요.”
어거스텀 궁전.
머릿속 톱니바퀴가 느리게 돌았다. 조금씩 맞물리다가, 가속이 붙었다.
시더와 에스페란사가 다리아를 이쪽에게 익숙한 곳으로 끌어들이려 했듯이, 그들도 같은 전략을 쓴 것이다.
“언제 갔어요?”
“한 시간 좀 더 됐대요.”
그 정도 시간이면 결판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니지, 여기서 궁전까지 가는 시간이 있으니까……. 왕성에 침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왕성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여유가 있을 때라면 몰라도 이렇게 급할 때 잠입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저번에는 셔버리 공작 부인을 통해 들어갔었는데,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쓸 수 있을까? 된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건 아닐까?
코델리아는 그런 걱정을 일축했다.
“걱정 말아요. 우리 마차로 가면 돼요. 지금 할머님께서 왕성에 가 계세요. 할머님 이름을 대면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자, 어서. 그거 벗어요. 테이트 양!”
애니가 준비해둔 옷을 가져왔다. 제대로 준비를 할 시간은 없었다. 옷만 겨우 갈아입는 데 10분. 에스페란사가 마차에 올라타자, 코델리아는 바로 뒤따라 타고 문을 닫았다.
“같이 가게요? 위험해요.”
“들어갈 때까지만요. 데려다주고 나선 할머님 옆에 붙어 있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 아, 로드 에이번데일이 이걸 보여주랬는데. 난 안 봤어요.”
한 번 접은 종이를 펼쳤다. 급하게 적은 듯한 전언이다.
마지막 문장은 왜 쓴 거야? 불안해지게. 그러나 투덜거리는 입술과 달리 눈은 끈질기게 그 문장을 훑었다.
운이 좋다면.
그에게 아직 행운이 머무르고 있을까?
마차가 도시를 가로질렀다. 커다란 시계탑을 지나, 의회 건물을 넘어 어거스텀 궁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