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14
214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해리엇 2세는 맞잡은 손을 덜덜 떨었다.
“그냥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다리아가 엷은 조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예의를 갖추긴 했지만, 어딘가 투박한 느낌이 있었다. 그걸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불편한 기색을 감춰야 하는 것은 여왕 쪽이었다. 힘의 저울은 한 번도 수평을 이룬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사소한 굴욕을 감내하는 것과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에이번데일은 올 겁니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계십시오. 걱정 마세요,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잖습니까?”
그 말이 옳다. 애석하게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이번데일 백작의 암살이라니.
백작은 젊은 나이에 남들이 인생을 바쳐도 이뤄내지 못할 성취를 이뤄낸 젊은이답게 오만했고, 몸은 굽혀도 성미는 굽히는 법이 없었다. 여왕은 그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오스던에 필요한 인물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공화주의자들의 죽음, 정적들의 죽음, 식민지 사람들의 죽음을 여왕은 능숙하게 모른 척할 수 있었다. 그것을 대의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 두고 당당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암살 계획에는 대의의 끄트머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리아는 포장조차 하지 않았다. 죽이는 게 이득이라 죽이는 것이다.
다리아에겐 이득이겠지. 오스던에는 손해였다. 도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명실상부 그른 선택.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반대하는 말을 꺼내놓은 순간 다리아는 한 마디도 더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여왕의 옆에 앉아 있던 대공을 끌어냈다.
‘폐하께는 이런 게 더 잘 먹히는 것 같네요. 저도 이게 편하긴 합니다만.’
한 번 뒷공작을 벌이다 들켰으니 두 번은 봐주지 않을 것이다. 여왕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죄책감이 머리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죄를 외면할 수도 없게 눈앞에 들이밀어 놓은 채로 알맹이 없는 위로를 던져 준 다리아가 칼을 짐짓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좋아.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다리아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 창문을 통해 쇼드니 공작부인이 시더 클라이번과 이름 모를 붉은 머리 남자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하하…… 정말 같이 왔잖아.”
섬뜩했다. 여왕이 흠칫 떨자 사이러스가 여왕의 어깨를 두 손으로 고정했다. 아직 앳된 기색이 가시지 않은, 소년이라 불러도 될 법한 얼굴인데도 여왕을 의자에 내리누르는 힘은 우악스러웠다.
“놓, 놓으시오.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사이러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손을 떼지도 않았다.
“됐어, 놔 줘. 사실 도망가든 말든 별로 상관없잖아. 쇼드니 공작 부인이 자기 할 일을 다하기만 하면.”
그렇다. 여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늘 판 위에서 관조하는 역할이었는데, 장기말 하나로 전락한 것이다. 그것도 이제 효용을 다한 장기말. 다리아가 씩 웃었다.
“폐하. 그래도 일단은 얌전히 계십시오. 놈이 알현실 앞에 올 때까지는 나가시면 안 됩니다. 그 후엔 알아서 하시고요. 폐하까지 지켜드릴 여유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대공은 언제 풀어줄 거요?”
“아, 뭐. 지금쯤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겁니다.”
완전히 몸을 돌린 다리아가 알현실 문고리를 돌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빈 복도가 얼핏 보였다. 다리아는 그대로 문에 귀를 대고 숨을 죽였다. 부릅뜬 눈이 귀기가 서린 것처럼 섬뜩했다.
“뭐 하는 거요?”
“그놈까지 달고 온 걸 보면 분명 낌새를 눈치챘을 테니까요. 선공을 양보할 순 없지요.”
여왕이 사이러스를 돌아보았다. 사이러스는 앳된 얼굴을 굳힌 채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번데일 백작을 정말로……”
“죽일 겁니다.”
사이러스는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 역시 언제라도 뛰쳐나가기 위해 몸을 낮추고 문 앞으로 향했다.
여왕은 축축한 손을 맞잡았다. 사이러스까지 나가면, 일단 몸을 피하자. 어디로든, 전투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그리고…….
“왔다.”
사이러스가 중얼거렸다. 여왕이 귀를 세웠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아주 작게 들리다가, 멈췄다. 사이러스는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 때, 알현실 문이 소리 없이 활짝 열렸다.
“여기까지 와 놓고 돌아가려고?”
다리아가 경쾌하게 외쳤다. 고요하던 복도가 순식간에 전투의 장으로 변했다. 사이러스가 문밖으로 나가는 것과 동시에 여왕은 뒤쪽 문으로 달렸다.
‘눈이 마주쳤어.’
시더 클라이번의 회색 눈동자. 여왕 앞에서도 오만한 눈동자가 분명히 이쪽을 보았다. 소름이 돋았다.
그 총명하고 전도유망한 청년을 죽이는 데 손을 보탰다. 협박당했다고 해도, 인질이 잡혔다고 해도, 해리엇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가 죽는다면 그 죄를 피할 수 없으리란 것을.
도망치는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한 시더 클라이번의 눈동자가 따라붙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드높던 자부심이 깎여나갔다.
가혹한 날들을 오스던을 위해서, 왕실을 위해서 행동하고 있다는 다짐으로 버텼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알았다. 해리엇은 그저 두려웠던 것뿐이다.
악마의 손을 잡아놓고 구원받길 기대하다니.
아무도 없는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내려다보는 듯하다. 해리엇은 스스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다. 평생을 살아온 궁전임에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이곳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일까.
“폐하.”
우뚝 멈춰선 해리엇이 고개를 들었다. 여왕의 낯이 굳었다. 남자가 허리를 굽혔다.
“마침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온 참입니다.”
“연락도 없이 말이지.”
“그만큼 급한 일입니다.”
여왕은 미소조차 짓지 못했다. 이런 순간에 레이먼드 템프턴이라니, 최악이다. 표정을 숨길 수나 있을까?
“무슨 일인가?”
“어떤 무도한 자들이 이 궁전에서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참입니다, 폐하. 안전을 위해 피해 계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템프턴!”
다 알고 왔어. 해리엇은 이를 갈았다. 알면서 조롱하는 것이다.
초라한 내 모습을 보니 만족스러운가?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의 초라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레이먼드 템프턴 앞에서는.
“폐하.”
몸을 조금 굽혀 눈을 맞춘 남자에게서는 오래전 청혼을 거절당했을 때의 원망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너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해리엇.”
“너라도, 어쩔 수 없어.”
“제가 암살자를 제압하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폐하와 달리 제겐 약점이 없습니다.”
다리아가 승리하든 패배하든 지금은 레이먼드 템프턴의 손을 잡는 것이 맞다. 그가 베풀고자 하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시더 클라이번을 사지로 몰아넣은 잘못을 안다면, 지금 이것이 어쩌면 다리아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자존심 따위는 내려놓아야 한다.
여왕은 수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날도 이 복도였던가? 공교롭게도. 모든 걸 잃을 용기가 없던 어린 공주는 그날 연인의 청혼을 거절했다. 지금까지도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넌 날 위해 뭘 희생할 수 있는데?’
‘내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
그날의 해리엇 공주는 그 말뜻을 몰랐다. 끝끝내 거절당한 소년이 떠나고, 청년이 된 그가 공주의 발치에 파오룬 황제의 관을 바치고, 그 공로로 이 나라 제일의 권력자가 될 때까지도.
해리엇은 그가 두려웠다. 자존심 강한 레이먼드가 거절당한 복수를 위해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해리엇이 그를 경계하고 불신하더라도 수상은 자기 소임을 다했다. 때로는 소임 이상의 호의를 보여 주었다. 차라리 대놓고 적대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해리엇은 그가 무엇을 요구할지 두려웠다. 8년이라는 시간을 공포에 떨며 보냈다.
적어도 그에게 아내가 있었다면, 하다못해 추저분한 스캔들이라도 있었다면 이토록 두렵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40대의 나이에 드물게도 미혼, 정부조차 없는 결벽한 사생활은 해리엇을 더욱 공포스럽게 했다.
그래서 해리엇은 스스로를 위해 그를 적대했다.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를 끌어내려야 한다. 그가 언제 돌변해 해리엇을 끌어내릴지 모르니까.
하지만 아직까지도 레이먼드 템프턴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오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저 손을 잡아야 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백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저울이 흔들렸다. 이 한 마디로 다리아에게 원한을 사진 않겠지? 템프턴에게 빌미를 주고 있는 건 아니겠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고작 한 마디다. 그것조차 못한다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알현실에. ‘들키지 않게’ 움직이게.”
목이 졸린 듯 내뱉자, 수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여느 때와 같은 얼굴로 돌아온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관 뒷문으로 마차 한 대가 들어왔습니다. 멜리사 공주의 방으로 올라갈 거라고 합니다.”
다리아는 대공을 풀어 줬다고 했다. 돌아오는 중이라고. 서관 뒷문으로 들어온 마차. 멜리사의 방. 절차가 그리 단순하지 않았을 텐데 벌써 마차가 들어온 것은 분명 템프턴의 손이 닿은 것이다.
“빚을 졌군. 템프턴 ……행운을 비네.”
“염려 마십시오.”
템프턴이 뚜벅뚜벅 걸어 멀어졌다. 여왕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체면 따위는 잊은 채 서관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