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알현실 문이 열린 순간, 시더는 분명 여왕을 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뒤돌아 달려 나가는 것도.
‘비겁하기는.’
기대도 안 했다. 쇼드니 공작 부인이 그의 저택에 찾아왔을 때부터, 그를 위한 함정에 여왕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으니까. 자의든 아니든.
하지만 중요한 건 누가 이 함정을 짰느냐가 아니다.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에이번데일.”
시더를 향해 검 끝을 겨눈 다리아가 눈 깜짝할 사이 거리를 좁혔다. 검이 쇄도했다. 챙, 쇠가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검로를 막았다. 다리아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잔상만 남을 정도로 빠르게 들이닥친 검을 막아낸 사이러스가 눈을 내리떴다. 붉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했지만, 평생 보아 온 얼굴을 다리아가 몰라볼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직 사이러스는 이곳의 다리아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눈을 감고 고민했지만, 어젯밤까지도 답을 얻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 만남은 그가 생각했던 그 어떤 만남과도 같지 않았다.
“배신한 주제에 잘도 그 낯짝을 들고 나타나?”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다리아가 검에 힘을 주어 밀었다. 슬금슬금 검에 마력이 실렸다. 사이러스도 자기 마력으로 그를 막았다.
13년 전임에도 다리아는 사이러스보다 강했다. 하지만 그는 13년 동안 변해 온 사이러스의 실력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반면 사이러스는 다리아를 잘 알았다. 그게 문제였다. 약한 것 같은데 검이 뻗어질 때마다 가로막히다니. 다리아는 이를 갈며 외쳤다.
“뭐 해? 에이번데일은 네가 맡아!”
어린 사이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깊게 뱉은 한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날렵하게 움직여 시더의 목을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피하십시오!”
사이러스가 다급히 외쳤다. 다리아는 그가 시더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았다.
“비…!”
비키라고 외치기도 전이었다. 쾅! 복도를 꽉 메운 굉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뭐지?’
다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사이러스의 마력이 아니다. 이건…… 새파랗고 날카로운 마력. 어디서 본 듯한.
그래, 그 여자 마력이다!
“연막탄이야! 사이러스, 쫓아!”
고작 시야를 가리는 잔재주 따위가 통할 줄 알고?
그러나 연기가 걷혔을 때, 다리아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검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 끝이 박힌 곳은 사이러스의 어깻죽지였다.
* * *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방법이에요.’
두 사람 중 하나가 시더를 공격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들은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해 두었다. 급하게 생각한 것이라 허점이 많았지만, 그런대로 통할 것이다.
이건 그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방법이다.
연막탄을 터뜨려 감각을 가리고, 동시에 에스페란사가 가득 채워 준 마력을 전부 써서 움직임을 차단한 다음 한 번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 만일을 대비해 사이러스의 인벤토리에 있던 단검을 넘겨받았다. 총을 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상황이 언제나 그리 단순하게 흘러가진 않았으므로.
어린 사이러스가 헐떡이며 오른쪽 어깨에 꽂힌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고통을 씹어 삼키는 듯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그러나 시더는 동정하는 대신 깊이 박힌 단검을 비틀어 뽑았다.
“악!”
날것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리아가 다급히 외쳤다.
“사이러스!”
그러나 거대한 그림자가 동생을 향해 달려가려는 다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동생과 같은, 그러나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 질린 낯을 치켜든 다리아가 그를 노려보았다.
“꺼져.”
공기를 가른 검이 사이러스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러나 다리아가 기억하는 것보다 13년이나 더 경험을 쌓은 사이러스는 녹록하지 않았다. 공격을 그대로 흘리며 다리아를 능숙히 뒤로 몰았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 몸을 알듯이 다리아의 움직임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꿰고 있었다. 다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고작 몇 발짝만 가면 되는데, 여기서 막히다니!
“사이러스, 포션은?”
“잠, 깐……”
시더 클라이번은 사이러스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었다. 원한다면 심장을 찌를 수도 있었을 텐데, 칼날은 급소를 비껴나갔다.
어깨를 가르는 듯한 통증에 멈칫했을 뿐, 사이러스는 왼손으로 고쳐 쥔 검을 휘둘러 그를 밀쳐냈다. 포션을 뜯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허공에서 진갈색 병을 꺼낸 순간, 그는 상대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한평생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던 주제에,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도망쳤어!”
신음 섞인 외침에 미래에서 온 형제를 상대하던 다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쥐몰이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이러스가 에이번데일에게 당하지만 않았어도 진작 끝났을 것이다!
“쫓아!”
그 때, 사이러스가 어린 자신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펑!
‘또 연막탄이다!’
이번 건 아까와 달랐다. 프로펠러 같은 것이 달려 있어 연기를 한쪽으로 몰기까지 했다. 어린 사이러스는 기침을 하며 연기를 뚫고 힘겹게 달려 나갔다.
그러는 사이, 알현실 앞 복도에선 다리아가 승기를 잡았다. 다급히 손을 빼느라 다리아를 상대하던 검이 꺾였다. 몸이 휘청이는 순간, 빈틈이 생겼다. 사이러스는 목을 향해 쇄도하는 칼날을 애써 쳐냈다.
“윽!”
팔을 깊게 스쳐 간 칼날을 거둔 다리아가 쉴 틈 없이 몰아쳤다. 사이러스의 셔츠 소매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한 때 서로가 서로의 분신이었던 몸이었다. 13년의 공백이 무색했다. 너무 잘 알기에, 깊이 찌르는 공격은 막고 속임수는 흘려냈다. 두 사람이 합을 맞춰 검무를 추는 것 같았다.
몇 번의 힘겨루기가 파도를 넘듯 지나갔다. 사이러스는 이를 악물었다.
‘승부를 보려는 게 아니야. 시간을 끄는 게 중요해.’
적어도 시더 클라이번을 노리는 사람이 둘로 늘어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리고…….
“그만둬.”
엉킨 검을 뿌리친 사이러스가 말했다. 다리아는 방긋 웃었다. 앞뒤를 다 자르고 나온 말인데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싫은데?”
“실패할 거야. 보고 와서 알아. 이건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어.”
근본적 같은 소리를 잘도 하는군.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동생은 그새 먹물을 좀 먹었는지 그럴듯한 소리를 해댔다. 다리아가 비죽 웃었다. 그것만 봐도 그들이 꽤 넉넉하게 살아왔으리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잠깐의 성공이라도 상관없다면?”
“뭐라고?”
두 자루의 검이 빠르게 부딪쳤다. 탐색이 끝났다. 다리아의 검은 13년 동안 쌓인 사이러스의 검법을 전부 꿰뚫어 보는 듯이 막힘 없이 약점을 찔렀다. 사이러스는 밀려드는 공격을 막는 데 급급했다. 뒷걸음질 치는 그를 밀어붙인 다리아가 입을 열었다.
“잠깐 성공하고 망해도 상관없어. 그렇게 하면 병원비는 댈 수 있겠지. 망하면? 죽지, 뭐.”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우리 때문에……”
다리아의 검이 이번에는 사이러스의 어깨를 노렸다. 시더가 어린 사이러스를 찌른 바로 그 부위였다. 황급히 피했지만 뒷목이 서늘했다. 시더가 쓴 단검과 달리 다리아의 대검이라면 팔을 잘라내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런 무시무시한 공격을 시도한 다리아는 방금 당할 뻔한 사이러스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무릎이 꺾였다.
“쉽게 말한다고? 네가 진짜 내 동생이라면 내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야지!”
검이 뺨을 스치고 귓불을 찢었다. 사이러스의 등이 벽에 거칠게 처박혔다.
안다.
사이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다리아가 하려는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사람들을 기만하는 일이다.
하지만 일그러진 다리아의 얼굴 앞에선 옳고 그른 것이 전부 무색해졌다. 어린 나이, 보호 없는 날것의 삶. 가난, 병든 가족, 빚, 출구 없는 어둠. 자기 몫으로도 괴로웠을 다리아는 어린 동생의 몫을 더 나누어 짊어졌다.
그런 삶에 드리운 바늘구멍 같은 빛을 붙잡는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그 자신만은 그럴 수 없었다. 축축해진 손으로 검을 꽉 붙잡은 사이러스가 속으로 되뇌었다.
비난할 순 없다. 하지만 그 길로 계속 가게 둘 수도 없다.
“황금 발톱은 고장 났어. 이 땅 전체가 던전투성이가 될지도 몰라. 이미 수만 명을 죽였는데, 앞으로 수백만 명이 더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짓을 저질러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십 년도 못 갈 영광이야.”
“그거라도 원해. 나를 수십 번 팔아도 못 벌 돈, 영광, 존중. 십 년? 1년이라도 원해.”
다리아는 군홧발로 사이러스의 어깨를 짓밟았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동자가 서로를 꿰뚫을 듯 노려보았다.
“황금 발톱이 고장 나면 우린 전부 끝이야! 회사는 망하고, 투자금은 전부 빠져나가고, 줄줄이 걸린 소송을 처리하러 없는 돈 털어 세계 여행이나 하게 될 거야. 장기를 떼도 못 갚을 빚이 산처럼 쌓일 거라고!”
그렇게 되면 추락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올라갈 기회는 영영 없다. 발목에 묶인 빚이 닻처럼 그들을 밑바닥에 묶어 놓을 테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해.”
“닥쳐.”
매서운 발길질이 배를 가격했다. 사이러스는 마른기침을 토해 냈다. 다리아의 발이 얻어맞은 부위를 쥐어짜듯 짓눌렀다. 사이러스가 빈손으로 발목을 쥐었다.
부러뜨릴 듯이 쥐는 손을 쳐낸 다리아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붉게 염색한 머리칼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고통에 물든 눈동자와 마주 본 다리아가 말했다.
“네 옆에 있던 형제도 설득하지 못한 주제에, 날 설득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사이러스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말이 옳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도 설득하지 못했다. 애초에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 어리석게도 그런 시도를 포기할 수가 없다.
“좀 아플 거야.”
흔들리는 눈동자를 내려다보던 다리아는 망설임 없이 검을 고쳐 쥐었다. 날카로운 검 끝이 향한 곳은 어깻죽지였다. 아까 전 시더가 어린 사이러스를 찌른 바로 그 부위. 마치 복수하듯 같은 자리였다.
‘난 네 형제가 아니지. 적일 뿐이겠지.’
다리아는 먼 미래에서 온 배신자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설득은 의미 없었다. 사이러스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검 끝이 새파란 빛을 내며 어깨를 향해 쇄도하는 것을 신호로, 사이러스는 몸을 뒤로 깊게 휘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다리아가 당황한 순간, 그는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일으키며 다리아의 검을 쳐 냈다.
넘어질 뻔한 다리아가 이를 갈았다. 사이러스의 손엔 어느덧 멀쩡한 검이 들려 있었다. 생채기가 잔뜩 남은 팔뚝과 달리 다리아가 노리던 어깻죽지는 셔츠가 조금 찢어진 것을 빼면 멀쩡했다.
복도 가운데에 서서 다리아를 막아선 사이러스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못 가.”
말로 막을 수 없다면, 몸으로라도 막아야겠지. 적어도 에스페란사가 돌아올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검이 다시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