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17
217화
“조금 이동하는 게 좋겠어요. 여기 있다간 들킬지도 몰라요.”
아니지. 에스페란사는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 하나 처리하고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세 사람이 모두 비밀 통로 안에 있으면 이 문 하나만 지키면 된다. 그리고 다리아가 합류하기 전에 어린 사이러스를 해치울 수 있다면, 최악의 상황이라도 다리아와 1대 1. 운이 좋아서 이쪽 사이러스가 전투가 가능한 상태라면 2대 1로도 싸울 수 있다.
그 정도라면 다리아가 스털링 항구에서처럼 황금 발톱을 꺼내 든다 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내가 나가 볼게요.”
“위험한 생각이에요.”
“하지만 해 볼 만하죠.”
방음벽이 설치된 음악실. 전투의 소음을 숨기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다리아가 아직 알현실에 있다면 음악실에서 나는 소리까지 듣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한들 안 할 것도 아니잖아요?”
시더는 귀를 가볍게 손끝으로 두드렸다.
“연결해 둬요.”
고개를 크게 끄덕인 에스페란사가 미소를 지었다.
액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시 닫혔다. 새어들어 오던 빛이 사라지자, 시더는 작은 불빛을 켜 두고 사이러스에게 연결된 통신기를 작동시키는 데 집중했다.
“걱정은 안 하나?”
“둘이라면 걱정했겠죠.”
상대가 하나라면 문제없다. 에스페란사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조금 지친 것 같긴 했지만, 그건 시더가 어깨 한쪽을 찢어놓은 사이러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이 가진 포션은 에스페란사가 가진 것보다 성능이 떨어질 테고.
“다쳐 오진 않을 겁니다.”
돌발 상황만 없다면.
“만약 다리아까지 합류하면, 각하께선 전하를 데리고 먼저 피하십시오.”
“자네는?”
“여기까지 찾아와 준 숙녀분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죠.”
말은 잘하는군. 수상이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이 반짝거리는 금발을 가진 소년에게로 내려갔다. 에스페란사가 사라지자 급격히 기가 죽은 루이 왕자는 템프턴이 내민 손을 마지 못해 잡았다.
여왕을 닮은 구석이라곤 여기저기 쏘다니길 좋아하는 것밖에 없는 소년을 끌어당긴 템프턴이 시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일단 멀지 않은, 조금 더 깊숙한 위치에서 대기할 것이다.
‘그리고.’
진동으로 ‘2층 음악실. 탈출 예정.’이라는 짧은 네 어절을 보내는 데 성공한 시더는 주머니에 통신기를 대충 쑤셔 넣고 액자 쪽으로 향했다.
* * *
탕! 짧고 간결한 소리와 함께 사이러스의 머리칼이 잘려 나갔다. 마력탄이 값비싼 피아노 위를 꿰뚫었다. 깨진 도자기와 부서진 의자 조각이 바닥에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바닥의 장애물에 잠깐 시선을 주었던 에스페란사는 원거리 무기를 들고도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근거리가 안 되는 건 아니거든.”
새파란 마력이 서린 금빛 총신이 무자비하게 사이러스의 검을 걷어냈다. 포션으로 급히 치료한 어깨 탓에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던 사이러스는 순식간에 에스페란사의 발밑에 깔렸다.
“윽!”
“악감정은 없어.”
이제는 정을 뗀 옛 동료의 과거 모습.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 얼굴. 적이라는 의식은 있지만 특별히 원한이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그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에스페란사는 뜨끈뜨끈한 총구를 사이러스의 허벅지에 갖다 댔다. 그는 한쪽 어깨는 부상, 다른 쪽 손목은 에스페란사의 발에 밟혀 꺾인 상태였다. 그대로 목을 긁는 신음소리만 낼 뿐, 움직이지 못했다.
“미안, 좀 아플 거야.”
죽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그것도 일방적으로 다치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열이 올라 한 대 때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지극히 냉정하게, 고문 기술자가 찌르면 아픈 곳을 찾듯이 다리를 따라 총구를 내리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채 여물지 않은 턱과 공포가 서린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에스페란사는 평생 배우고 지켜왔던 도덕심의 한 귀퉁이가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다.
“잠깐.”
비밀통로 입구에서부터 성큼 걸어 나온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총구를 지팡이 끝으로 밀어냈다.
“내가 하죠.”
아악! 날카로운 비명에 총소리가 묻혔다. 마력에 꿰뚫린 허벅지를 붙잡은 사이러스가 숨을 헐떡였다. 딱 적당히, ‘이 시기 포션이 단숨에 완치할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이다. 에스페란사는 멍하니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왜 당신이?”
“쫓기는 게 그리 즐겁진 않았어서.”
복수도 복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더가 미련 없이 총구를 떼어내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닦을 것 있어요?”
인벤토리에서 수건을 꺼내 준 에스페란사가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물었다.
“당신은, 괜찮아요?”
“어떤 것 말이죠? 날 죽이려던 자의 다리를 날려버린 것?”
시더는 총구가 닫힌 지팡이로 바닥을 두어 번 두드렸다. 에스페란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마음이 썩 좋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 ‘하나 해치웠다’ 싶은 안도감도 있었다. 이 손으로 직접 했다면 이런 마음으로 끝내진 못했겠지.
“마음 약해지지 말아요.”
그 말대로다.
준비되지 않은 채 시작된 전투가 심적으로 버거웠던 것 같다. 괴물이 아니라 인간을 상대로 한, 목숨을 건 전투. 단순히 ‘황금 발톱’을 빼앗겠다고 생각한 스털링 때와도 달랐다.
그러나 다음번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야 할 때가 온다면, 그건 스스로 할 것이다.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사람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살았는데. 그러나 이 결심을 후회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에스페란사는 이곳에 온 뒤로 1년간 스스로가 깊은 본질에서부터, 불가역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결코 한순간의 변화는 아니었다. 이 일 한 가지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아주 조금씩, 무수한 변곡점을 지나 눈에 보이는 결과로 드러난 것뿐이다.
“있잖아요.”
액자 문을 열던 시더가 고개를 돌렸다. 먼저 운을 떼어놓고도 망설이던 에스페란사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가 만약 여기 남는다면, 그건 꼭 당신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시더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윽고 이해한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매정하신 숙녀분,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요.”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춘 시더가 먼저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간 에스페란사가 액자를 닫으려다 문득 물었다.
“사이러스를 저렇게 두는 게 맞을까요?”
“치료라도 해 주고 싶어요?”
“인질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하. 내가 들고 가야 되는 거면 사양할게요.”
“내가 들 수는 없는 일이니까, 뭐.”
액자의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와 동시에 시더가 등을 돌려 앞서 걸어갔다.
“해치웠나?”
통로 안쪽에서 손으로 루이 왕자의 입을 막고 기다리던 수상이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손끝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수상이 눈을 크게 떴다.
“진짜로?”
“아뇨.”
“그래. 에스페란사 양은 사람을 쉽게 못 죽일 것 같았거든.”
짜증 나는 통찰력. 누구와 똑 닮았다. 얄미운 누구를 올려다보자, 시더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웃기만 했다.
“가죠.”
기묘하게 평온했다.
에스페란사는 두 걸음 앞에서 걷는 시더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들은 지금 쫓기고 있는데, 인질이 될 수도 있는 비전투원 둘을 데리고 비밀통로를 걷고 있는데, 아까와 달리 심장 박동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에스페란사는 공연히 바닥에 발을 굴러 심박을 높였다.
“왜 그래요?”
“내가 너무 침착해요. 이러다 전투에 들어가면 곤란해져요.”
가장 앞에서 걷던 템프턴이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군사 훈련을 받았나?”
엄밀히 말하면 전혀 다르겠지만……. 에스페란사는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얼버무렸다.
“그런 비슷한 거요.”
시더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 템프턴의 통찰력이 빗나간 것이 적잖이 즐거워 보였다.
“지금 웃을 때예요?”
자기에게서 관심이 뜬 때를 틈타 템프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루이 왕자가 에스페란사 옆에 붙었다.
“전하, 전하는 저쪽이에요.”
“싫어.”
꼬마 왕자는 아무래도 엄마가 싫어하는 커다란 정치인보다는 고작 두 번 본 에스페란사가 편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슬쩍 손을 잡으려는 꼬마를 매정하게 쳐냈다.
“싸울 때 비전투원이 흩어져 있으면 귀찮아요.”
짧은 평생 거절당해 본 적 없는 루이 왕자가 울상을 지었다. 시더는 또 웃었다.
“오랜만에 즐겁네요.”
“아, 네에.”
즐거울 땐가, 지금? 에스페란사는 자기만 전투를 대비하고 있는 건가 싶어 울상을 지었다.
“이 인간들을 데리고 다리아를 어떻게 상대하지?”
“자, 아직은 없잖아요.”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빈손을 붙들어 자기 팔 위에 올려두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엔 조금 좁은 통로였지만 에스페란사는 거절하지 않았다. 템프턴에게로 보내진 루이 왕자가 배신감 어린 얼굴로 돌아보았지만 외면당했다.
“저쪽으로 가면 출구일세. 끝이 보이는군.”
그 말대로였다.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출구가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그게 문제였다. 사이러스 하나를 해치웠으니 이 기세를 몰아 다리아까지 해결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은 돌아가고, 나는 다리아를……”
“죽일 거라면 좋은 방법이긴 한데, 우리 목적은 그게 아니잖아요.”
시더가 지적했다.
“‘황금 발톱’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그렇지. 그리고 아직 다리아는 그걸 꺼내지 않았다.
앞서 설리번 박사의 연구소에 에스페란사를 가둘 때 한 번 썼다. 그 이후에도 사이러스와 전투하며 마력을 상당히 소비했을 것이다. 스털링 때를 떠올려 보면, 지금 다리아는 제대로 된 던전을 만들 만한 마력이 없을 가능성이 컸다. 한번 밀어붙여 볼 만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토끼몰이네요.”
그건 이 궁전에서는 불가능하다. 지리가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다리아에게 너무 유리했다. 장애물이 많고 사람도 많았다. 인질이 잡히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고민에 빠진 에스페란사를 내려다보던 시더가 제안했다.
“집으로 유인하는 건 어때요?”
“그게 되겠어요?”
다리아도 생각이 있다면 이 상황에서 굳이 자기에게 불리한 곳으로 따라 들어오진 않을 것 같은데.
“안 돼도 손해 볼 것 없죠. 우린 그냥 집에 가서 쉬면 되니까. 당신도 지쳤잖아요.”
“아. 아, 네에.”
그건 또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