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여기까진 에스페란사가 기억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달라진 건 파괴된 해석 기관밖에 없었다. 시더는 파편만 치운 채 복구작업이 시작도 되지 않은 해석 기관 앞에 멈춰 섰다.
“아직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형태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중앙부 단독으로도 그 정도 성능을 낼 수 있는 걸 보면, 어쩌면 저 많은 기계들은 다 필요 없는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린 다리아가 아니잖아요. 결국은 다 필요할 걸요.”
에스페란사는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황금 발톱 위에 손을 얹었다. 찌릿찌릿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대로 손에 닿은 매끈한 금빛 날을 매만졌다. 도무지 기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섣불리 마력을 불어넣는 대신, 부품 안에 남은 잔여 마력을 손끝으로 느꼈다.
황금 발톱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다리아다. 제작자인 시더보다도 수년간 이 날붙이를 품에 안고 한계까지 실험해 본 다리아가 더 잘 알 것이다. 열네 살의 시더 클라이번이 만든 것이 무엇인지.
잠시 신이 들렀다 간 것처럼 압도적인 피조물.
에스페란사는 손을 떼지 않고 그대로 아래쪽의 기계까지 쓸어내렸다.
그러나 스물다섯 살의 시더가 만든 것은 인간의 작품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 알고 있었고, 간혹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날에도 이성을 놓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원래의 시공간 기계보다도 더 위대한 발명이다.
이 기계는 분명 에스페란사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줄 수 있을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어제까지는 없었던 귀환증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손을 넣어 꺼내 보니 일반적인 귀환증과는 형태가 달랐다. 계기판 같은 것이 달려 있는 판 형태였는데, 한참 뜯어 보았지만 정체를 알 수가 없어서 그대로 시더에게 건넸다.
“좌표는 이걸로 맞추면 될 거예요.”
“이건 어떻게 쓰는 거죠?”
“모르겠어요.”
시더가 이마를 찡그렸다.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아냐는 듯이. 하지만 에스페란사 입장에선 반대였다.
‘전문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진짜로 몰라요.”
“그럼 어떡하죠?”
“……아는 사람한테 물어봐야죠.”
마침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아직 이 저택 안에 있었다. 시더는 밀런을 호출했다. 밀런은 손님이 응접실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지붕 뚫린 연구실을 지나 응접실로 내려갔다.
여느 때와 같이 햇볕에 감싸인 응접실.
사이러스는 체스판 앞에 앉아 있었다. 체스를 제대로 둘 줄도 모르면서, 그냥 검은 퀸을 한 손으로 감싸 쥐고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그 역시 퀘스트가 끝났다는 것을 좀처럼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아, 에스페란사 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난 멀쩡해.”
멀쩡해 보이지 않는 건 사이러스 쪽이었다. 그는 하루 만에 부쩍 수척해졌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괜찮아 보여요, 쟤?”
“전혀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대꾸한 시더가 자연스레 상석에 자리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오른편 소파에 앉아 무릎에 쿠션을 가슴 높이까지 쌓았다.
사이러스가 비척비척 걸어 다가왔다. 손에는 여전히 검은 퀸이 들려 있었다. 자리에 앉은 그가 퀸을 내려놓았다. 탁. 체스말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로 섰다가 툭 쓰러졌다.
“아.”
“왜 그래?”
아무 생각 없이 묻자마자 깨달았다. 에스페란사와 시더에게는 다리아가 적이었지만 사이러스에겐 형제였다.
“아닙니다. ……그보다, 어쩐 일로?”
용건이 없이는 찾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해서 조금 머쓱해졌다. 사이러스 본인조차 그래도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지만, 사람을 모질게 대하는 것은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귀환증을 받아든 사이러스가 탄성을 터뜨렸다.
“기계에 연결해야 쓸 수 있는 겁니다.”
사이러스가 가르쳐 준 대로 조작을 해 본 시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하네요.”
시더가 빽빽하게 붙은 버튼 중 몇 개를 누르자 녹색 불이 들어오더니 중앙 계기판의 빨간 침이 양쪽으로 움직였다. 한 10초 정도 그렇게 방황하던 바늘이 천천히 자리를 찾았다. 아래에 붙은 작은 계기판들도 마찬가지였다.
“됐어요?”
“됐어요. 연결은 해 봐야겠지만…… 마침 잘됐네요. 해석기관을 고치면서 연결부도 바꿔야겠어요.”
시더는 뭔가 생각이 난 듯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바삐 쓰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 때도 저랬지. 에스페란사는 펜이 쉴새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짓궂은 흥미로 빛나는 눈동자. 에스페란사의 1년을 지탱해 준 눈이었다.
집중을 깨고 싶지 않아 조심히 소파 반대편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이러스 역시 눈치껏 자리를 옮겼다.
“돈을 벌고 싶어서였다고 했지.”
“……네.”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던 거지?”
그들의 방식이 틀렸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여전히 말문이 막힐 만큼 잔혹했고,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다리아는 목을 옥죄는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 길을 택했다고 했다. 그건 단순히 한번 부자가 되어보고 싶어서 이런 일을 벌인 것과는 다르다. 설령 결과가 같다고 해도, 비난 가능성의 면에서 두 가지를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러스는 일부러 오해를 방치했다. 차라리 경멸당하는 쪽을 택했다.
“다리아가 말했습니까?”
“대충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정당화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니까요. 동정을 살 바에는 경멸당하는 것이 낫습니다.”
“동정은 안 해.”
사실 진심으로 공감할 수는 없었다.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기만이다.
에스페란사의 인생에 그림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나이에 부상을 당했고, 갓 스물에 부모님을 잃었다. 그러나 괴로울 정도로 배가 고파본 적이나 먹을 것이 없어 굶어본 적은 없었다. 갚을 길 없는 빚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도 겪어본 적 없었다.
“동정이 아니라면, 나머지는 감당하겠습니다.”
그 이후로는 침묵이 이어졌다. 하녀가 뒤늦게 차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김이 나는 찻잔을 입가에 대고 얼마 남지 않은 오후의 응접실을 만끽했다.
찻잔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시더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건 이만하면 됐고. 천장 수리에 이틀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이틀간은 연구실 출입이 어렵겠네요. 외출이나 할까요?”
에스페란사는 반색했다.
“어디 갈 건데요?”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죠.”
비록 여름용 나들이 모자를 쓰지는 못하겠지만, 남은 시간을 낭비 없이 보낼 수는 있겠지. 에스페란사는 쿠션을 꽉 끌어안았다.
‘남은 시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떠난다는 것은 여전히 실감이 되지 않았다. 좀 더 미뤄져도 좋을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한 몇 년쯤. 하지만 그건 오직 에스페란사만의 이기적인 마음이다.
떠날 거라면, 빨리 떠나주는 편이 좋겠지.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쿠션 술을 만지작거리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들었다.
“사이러스. 넌 어쩔 거야?”
“가 볼 곳이 있습니다. 기계 보수가 끝나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연락은 이전에 머물렀던 호텔 주소로 주시면 됩니다.”
그는 별 망설임 없이 바로 일어났다.
사이러스가 떠나고, 주인 없이 남은 찻잔을 멍하니 바라보던 에스페란사가 문득 말했다.
“인사를……. 인사를 해야겠어요.”
“누구에게?”
몸을 일으킨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애니랑, 코델리아랑, 잭이랑, 로드 스털링에게도?”
세세하게 따지자면 더 많겠지. 시간이 남는다면 코델리아의 친구들이나 셔버리 공작 부인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지만, 그런 여유는 없을 것이다. 시더와 보낼 시간을 깎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많기도 하네요.”
“그러게요.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온전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 이곳에 친구도, 적도, 그 무엇도 아닌 사람도 있었다.
그건 다행스런 일이었다. 사람은 혼자서 한 사람분의 무게를 견딜 수 없으므로.
하지만.
‘당신에게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이름을 부르고 안아 줄 사람이 그에게는 없다.
빚은 듯한 뺨과 수려한 턱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에스페란사는 이 아름다운 남자가 얼마나 황량한 삶을 살았는지 깨달았다. 정작 그 자신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이 필요해질 때가 반드시 올 텐데.
에스페란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내리누르듯 숨을 내쉬며 시더의 등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어깨에 뺨을 누르고 한참 가만히 있다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좀 추워도 소풍을 가야겠어요.”
시더는 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페란사가 그 이야기를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요.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보죠.”
* * *
소풍 철은 아니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해가 빨리 졌다. 그러나 에스페란사의 몸은 온도 변화에 둔감하고 시더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 아니었다. 한 철 빠른 소풍도 나쁘지 않았다.
한적한 교외의 언덕 위에서 시더는 그림을 그렸고, 에스페란사는 그의 무릎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시답잖은 잡담을 했다. 손장난을 치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짧게 입을 맞췄다.
그들은 마지막 여유를 소중히 여긴 만큼 남김없이 소비했다.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그날 밤엔 승패가 뻔한 체스를 두다가 브랜디를 마셨다. 그로부터 이틀간은 아침이 밝아올 때야 잠에 드는 방탕한 생활에 젖었다.
아침 햇빛 아래 빛나는 속눈썹, 그 아래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눈동자. 잠에 조금 취한 미소를 볼 때마다 에스페란사는 돌아간다면 이걸 잃게 되리란 사실을 생각했다.
이틀은 꿈처럼 순식간에 흘러갔다. 천장 보수가 끝나고, 시더는 시공간 기계의 해석기관을 다시 만들었다. 황금 발톱과 시공간 기계가 연결된다는 건 다리아가 직접 확인해 주었지만, 안정성 면에서는 몇 가지 더 고려해야 할 면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의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보내는 셈이었다. 시공간 기계를 전부 고칠 때까지의 짧은 유예기간. 그는 그것을 미루려 애쓰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대체로 서재에서 머물렀다. 며칠을 두고 보아도 외출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시더가 물었다.
“인사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갈까요?”
못내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묻는 말에 시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행여나 정말 가 버릴까 봐 소파 옆자리에 붙어 앉은 그가 에스페란사의 무릎을 당겨 자기 다리 위에 올려두었다.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에스페란사가 간지럽다며 키득거렸다.
“난 당신이 여기서 생산성 없는 장난이나 치다가 날 방해하러 오는 게 가장 좋죠.”
“진짜 방해가 뭔지 모르나 봐…….”
“그러는 당신은. 진심도 아니잖아요?”
“지금까지 말 안 했는데,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
시더는 자학적인 농담에 익숙해진 듯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에스페란사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입술을 매만지던 손이 뺨을 감싸 쥐었다. 맞닿은 코끝이 뭉그러지고, 물 흐르듯 자연스레 입술을 머금었다. 치열을 훑은 혀가 뿌리까지 단단히 얽혔다. 커다란 손이 허리 아래를 감싸 쥐었다. 숨 가쁘게 탐닉하다가, 잠에서 깨듯 입술을 떼어냈다.
“그래서, 인사는 안 한다고요?”
질문을 해놓고는 대답하지도 못하게 다시 입을 맞추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셔츠 자락에 손톱을 파묻은 채 머릿속에서 흩어지는 대답을 애써 그러모았다.
“편지로, 편지로 하려고요.”
“음. 좋은 이별 방법은 아니군요.”
에스페란사는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애니나 코델리아, 알라스테어는 대강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만나서 이별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확실하지 않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편지지도 사 뒀어요.”
“그래요,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내 취향의 이별은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라 믿어요.”
시더는 다시 에스페란사의 양 뺨과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휴식이 연구 일정을 잠식하게 두지 않았다. 강박적일 정도로 철저했다. 그것이 그 나름대로 이 상황에 적응하는 방법인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남은 시간은 더더욱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시간이 줄어들수록 떠나는 것은 더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