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마지막에서야 이런 말을 꺼낸다.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수도 없이 있었다. 그 기회들을 전부 참아 왔으면서. 모든 일이 끝났고, 시공간 기계는 완성되었고, 설령 에스페란사가 매몰차게 거절하더라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지금에 와서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진 한 번도, 한 번도 말 안 했으면서.”
“알잖아요.”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그것을 바란다는 것을. 그러나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건 에스페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면서도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이 이야기에 도달했다.
“제발…….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잖아요. 지금까지, 당신에게도 여기가 괜찮았잖아요.”
물기 어린 침묵이 이어졌다.
고요한 공기를 거절로 이해한 시더가 손을 말아쥐었다. 주먹 쥔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은 묻지 않았다. 설득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가만히 기다리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에스페란사의 뺨을 엄지로 쓸었다.
“그래도.”
나직이 운을 뗐다.
“내가 언제나 당신의 평안을 바란다는 걸 잊지 말아요.”
에스페란사는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기어이 눈가를 따라 눈물이 쏟아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이 사람을 두고 어떻게 떠나지? 어떻게? 이 순간 이것 이상으로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이 감정이 괜찮아질 수 있을까? 눈앞에 없다고 죽은 셈 치는 일 따위, 에스페란사는 절대 할 수 없었다.
사랑만으로 살아갈 세계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사랑이 모든 것이었다.
주머니 안의 편지가 바스락거렸다. 하룻밤을 꼬박 써서 적은 편지. 목이 꽉 막힌 것처럼 공기 소리만 났다. 그러나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것을 끝이라고 한다면,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다.
* * *
어떤 정신으로 아침 해를 맞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에스페란사는 치마 주머니 안에 여전히 편지 봉투가 있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어떤 것이 옳은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엉망진창이 된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강제로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일어났군요.”
연구실과 이어지는 문에서 시더가 나왔다. 밤새 처참했던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의 얼굴에선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평소 같은 미소를 지었다가 몸을 굽혀 여전히 잠이 덜 깬 것 같은 에스페란사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나들이 다녀오는 사람을 배웅하듯 산뜻했다.
“괜찮아요?”
“글쎄요.”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괜찮아지겠죠.”
말문이 막힌 사이, 시더는 서재로 넘어왔던 용건을 해결했다. 연장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뚝 끊겼다. 시공간 기계와 관련된 건 아닌 것 같은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눈치챈 듯 시더가 고개를 돌렸다.
“이건 다른 거예요. 당신이 가고 나면 나도 몰두할 게 필요할 테니까.”
“뭔데요?”
“말 안 해 줄래요.”
에스페란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더 캐묻지는 않았다. 어쩌면 물어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마음은 아직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못한 상태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사이러스가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네요.”
“그사이에 피나 미리 뽑아두고 있죠, 뭐.”
붉은 피가 주사기를 가득 채웠다. 이 작은 방에 담기에는 과할 정도의 마력이 일렁였다.
아직 사이러스가 뽑아둔 피도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도 시공간 기계를 작동시키려면 저 피에 더해서 두 사람분의 마력을 통째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 이 기계로는 딱 한 명만 돌아갈 수 있다. 한 사람이 떠나면 다음 사람을 위해 기계를 작동시킬 마력이 없으니까. 다리아가 자기 마력만으로도 자기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던 때와는 달랐다.
그들의 세계는 그토록 먼 곳에 있었다. 이 기적이 끝나면 영영 닿지 못할지도 모르는 곳에.
“먼저 기계를 보고 싶어요.”
전투 다음 날 부서진 기계를 보러 온 적은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시공간 기계가 있는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모양은 똑같아요.”
과연 그랬다. 에스페란사가 기억하는 모양과 정확히 같았다. 시더가 스스로 부순 해석기관은 다시 멀쩡한 모습을 되찾았다. 미리 작동시켜 둔 탓에 활발하게 좌표 계산을 하는 중인 것 같았다. 사이러스가 준 귀환증도 아마 저 안에 있을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차르르륵,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색 화면이 깜박거렸다. 방 안을 꽉 채운 기계의 움직임이 발밑에서 느껴졌다.
가운데에는 황금 발톱. 그리고 그 아래에는 두 사람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캡슐.
에스페란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캡슐 반대편에 제어반이 있었다. 원래의 시공간 기계는 이렇지 않았다. 그게 당연했다. 이건 극도로 비효율적인 설계다. 원칙적으로는 기계를 제어하는 사람이 기계 중앙부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옳았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바로 대처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 기계에서는 다르다. 시더가 레버를 당기는 순간, 그는 캡슐 안쪽의 에스페란사가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걸 위해서 이런 설계를 한 거야.’
물어보지 않아도 그것만은 확실했다. 에스페란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 누구에게도.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오직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똑, 똑. 느린 노크 소리와 함께 사이러스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마찬가지였으나 에스페란사에겐 순간이동처럼 느껴졌다. 사이러스는 순식간에 시공간 기계가 있는 방까지 넘어왔다.
“왔군요.”
“벌써 준비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이러스의 시선이 에스페란사를 향했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다 왔으니, 시작하죠.”
인사를 할 시간도 없었다. 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시더는 몸을 돌려 제어반 앞에 섰다. 패널을 확인하고, 기기 상태를 점검했다. 마력 측정기, 좌표 추적기, 해석기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중앙부의 ‘황금 발톱’. 그 모든 것을 확인하고, 다이얼을 돌렸다.
발밑의 진동이 거세졌다. 사방을 막은 기계 내부에서 부품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바로 옆 사람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부족하단 거지.’
집을 뒤흔드는 진동에도 불구하고 마력 게이지는 아직 충분히 차오르지 않고 있었다. 에스페란사와 사이러스는 몸 안의 마력을 전부 쏟아부었다. 시공간 기계는 배곯은 포식자처럼 마력을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가까이 둔 포션을 비우고 다시 한번 더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을 전부 소진하고 나서야 시공간 기계가 요구하는 마력량을 채울 수 있었다. 제어반 위의 계기판에서 흔들리던 붉은 침이 젖혀지더니 뚝 멎었다.
마치 축하하듯 파이프라인 끝의 작은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났다.
시더는 화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게 다문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제어반 안쪽의 작은 레버를 당기자, 기계에서 아까와는 다른 소리가 났다. 드르르르. 쿵.
캡슐이 열렸다.
이 순간이 끝나면, 지금의 고통만 외면하면 에스페란사는 눈 깜짝할 사이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스물일곱 해 평생 살아왔던 곳으로. 거기엔 안온한 삶, 잘 아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돌아보지 않는 등. 흰 셔츠에 감싸인 등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인사도 애원도 전날의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처럼.
레버를 당긴 손이 떨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도.
“정말이지…….”
그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남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돌아가서 맘 편히 행복할 수 있을까?
“에스페란사 님?”
아프도록 말아쥔 손을 내려다본 사이러스가 놀라 에스페란사를 불렀다.
“돌아가면, 너는 계획이 있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만.”
말이 뚝 끊겼다. 설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에스페란사를 돌아보았다. 에스페란사는 문이 열린 캡슐을 터뜨릴 듯이 강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안에 들어가면, 끝이다. 들어가지 않아도 끝이다.
저울추가 기울었다.
“네가 가.”
에스페란사는 힘주어 말했다. 번복은 없었다. 다만 한 마디를 덧붙였을 뿐이었다.
“여전히 돌아가고 싶다면 말이야.”
“물론 기회가 있다면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에스페란사 님. 이런 방식은 아닙니다!”
기계의 진동이 점점 더 강해졌다. 마력이 폭주하듯 부품 사이를 달렸다.
모든 것이 다 좋은 선택이란 없다. 에스페란사는 살아온 삶의 대부분을, 적어도 스무 해를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쌓아온 것들, 내 삶의 족적들. 그것은 더 이상 누구도 알지 못한 채 그 세계 어딘가, 먼지 구덩이 속에 썩어갈 것이다.
이럴 만한 가치가 있어? 저 남자가, 이 감정이, 이 세계가 내 뿌리를 전부 버릴 가치가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물었다. 그 대답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것은 없었다.
지극히 충동적인 결정이다.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 하는 말이다.
“난 양보하는 게 아니야. 가서 네가 하겠다고 한 일을 해. 네가 벌여놓은 일을 책임져.”
“그럴 겁니다. 하지만……!”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았다. 가족이 있지 않냐고. 그립지 않냐고. 이대로 떠나도 괜찮겠냐고.
‘당연히 괜찮지 않지.’
하지만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상처입힐 수밖에 없는 결정이다. 에스페란사는 주머니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써두고 계속 지니고만 다녔던 편지.
“언니한테 전해 줘. 무슨 말인지 알지? 네가 하겠다고 한 일들을 하기 전에. 이게 제일 먼저야. 언니가 읽게 해.”
그걸로 네가 벌인 일들, 나는 전부 용서할게.
사이러스는 흔들리는 눈으로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편지 봉투 위에 닿았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하여, 캡슐 안으로 들어간 것은 사이러스였다.
문이 닫혔다. 화면에 뜬 알림을 확인한 시더가 제어반 가운데의 가장 큰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기계 전체를 달구던 마력이 황금 발톱으로 흘러 들어갔다.
서재의 책장이 흔들리고, 책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구실 책상 위의 유리병이 쏟아졌다. 흔들거리던 작은 샹들리에가 산산조각 났다.
쾅! 집 한 채를 전부 무너뜨릴 것 같은 굉음.
넘치는 마력이 캡슐을 감싸고, 새하얀 빛이 세상을 물들였다.
시더는 동상처럼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감은 눈이 부시도록 찌르는 빛. 이 눈을 뜨면 얼마나 더 상처받을 것인가? 영영 눈을 감은 채로 시간이 멈추어 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억지로 뜬 눈앞에 보이는 것은 눈을 감기 전과 같은 제어반이었다. 화면에 뜬 몇 개의 글자로부터 기계가 성공적으로 작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천히, 가슴을 꽉 막은 듯한 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도저히 몸을 돌릴 용기가 나지 않는다.
느린 발걸음 소리가 났다. 등 뒤로부터 남은 자의 그림자가 제어반 위를 드리웠다. 왠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꼿꼿한…….
부드러운 팔이 몸을 감쌌다. 등에 닿은 체온은 현실감이 없었다.
시더는 멍하니 허리에 둘러진 손 위에 손을 올렸다. 어제 잡아 본 것과 정확히 같은 모양. 손 안에 들어차는 감각마저 같았다. 이런 것을 헷갈리지 않는 몸으로 태어났기에, 오히려 더 거짓말 같기도 했다.
“왜…… 떠나지 않았죠?”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요?”
에스페란사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빈말로도 오직 시더를 위해 남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기뻐해 줄 줄 알았는데.
“떠나고 싶어 했잖아요.”
“많은 이유가 있는데, 그냥 여기서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해 둘게요.”
완전하지는 않아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시더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빈 캡슐. 텅텅 빈 마력. 멈춘 기계. 품 안을 딱 맞게 채운 체온. 그는 팔을 들어 에스페란사의 등을 힘주어 안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라도 할 듯이 꽉 움켜쥔 채로 속삭였다.
“……당신 세계에 돌아가 볼 수 있게 해 줄게요. 언젠가는 반드시. 약속할게요.”
그 말에 고개를 든 에스페란사가 시공간 기계를 바라보았다. 이것과 같은 발명을 다시 해내기 위해 필요한 기적의 크기를 알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약속의 무게를 가늠하며, 웃음기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같이 갈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겠네요.”
미색 화면 위의 좌표가 사라졌다. 계기판의 붉은 침도 기준점으로 돌아왔다.
기준점.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어깨 위에 뺨을 괴고 눈을 감았다. 이 결정을 후회할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28화. 에필로그.
나인 호더 상공. 비행선 한 대가 푸른 하늘을 가로질렀다.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공기에 어느덧 봄빛이 섞였다. 시공간 기계가 사이러스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낸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웠다.
에스페란사는 소파에 늘어진 채로 보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붕을 바라보았다. 가슴 위에는 어제 발간된 잡지를 엎어놓은 채였다.
“그러고 보니, 저거 터질 때 엄청 큰 소리가 났을 텐데. 뭐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요.”
당시 자리에 없었던 고용인들은 그렇다 치고, 집 주변의 귀하신 이웃들은 왜 아무도 말이 없을까? 아니면 말이 있었는데 에스페란사만 몰랐던 걸까?
“내가 내 지붕 날린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기껏해야 소리 좀 난 것 가지고.”
‘기껏해야 소리 좀 났다’ 할 정도의 소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후로도 며칠에 한 번씩 집이 무너질 듯 흔들리는데 이웃집이 피해를 안 봤을 리도 없고.
“조사차 방문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 봐요.”
“차 한 잔 마시고 돌아갔죠. 어쩌겠어요?”
시더는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친 사람도 없거니와, 자기 집 지붕을 날려 먹었다고 백작을 감옥에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일은 에이번데일 백작이 놀란 이웃들에게 소소한 사과의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선물은 물론 하워드 집사가 골라서 보냈고, 시더는 선물 내용도 몰랐다.
“괴짜 마도 공학자에 대한 세간의 편견은 제법 유용하죠.”
“편견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맘대로 생각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인 시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페란사는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시더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 방심했다가는 당한다. 숨이 넘어갈 때까지 간지럼을 태우는 통에 결국 패배했던 것이 고작 어제의 일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뻔뻔한 마도 공학자가 양손을 어깨선까지 들고 다가와 발치에 앉았다. 그리고 에스페란사가 조금 방심하는 사이, 손으로 발목을 쥐고 끌어당겼다.
“앗!”
팔걸이에 기댔던 머리가 소파 위로 툭 떨어졌다. 비겁하게 남의 발목을 잡다니! 에스페란사는 끙끙대며 발목을 비틀었으나 별 소용 없었다. 물론 상대가 적이었다면 떨쳐낼 다른 방법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상대는 애인이었다.
뭐, 애인에게는 그에 맞는 방법이 있지. 누워 있던 상체를 휙 일으킨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부드럽게 눌렸다. 회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고개를 조금 더 기울이자 발목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그 틈을 타 발목을 쏙 빼내고 몸을 일으켜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잡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순식간에 구도가 뒤집히자 시더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혀를 찼다.
“못 당하겠군요.”
“두 번은 안 당하죠.”
커다란 손이 다시 발목을 붙들었다. 이번에는 힘을 주지 않고 복사뼈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손등이 움직일 때마다 치맛자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조금 있으면 코델리아가…….”
“고작 티 타임 약속이잖아요?”
“고작 티 타임 약속을 사흘이나 미뤘으니까 말이에요.”
직접 항의한 사람은 없었다고 해도, 지붕을 날려 먹는 큰 사고에 더해 두 번이나 집이 뿌리까지 흔들렸으니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자연히 상황을 짐작할 만한 사람들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이를테면 코델리아 마벨우드 같은 사람들.
걱정이 가득한 편지를 받은 에스페란사는 ‘다친 데 없이 모두 건강하고, 사흘 후 티 타임에 만나러 와 주면 좋겠다’는 요지의 답장을 보냈다. 코델리아는 선뜻 승낙했다.
그러나 코델리아의 방문이 개인적인 걱정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털링의 그 사고 이후 평화롭던 사교계에 오랜만에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코델리아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사교계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이야기를 가져다줘야 할 무거운 의무를 안고 있었다.
“지붕 폭발에 대한 변명은 생각해 뒀어요?”
에스페란사는 변명 부분 일체를 시더에게 일임했다. 시더는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냥 연구 중에 터뜨렸다고 해요. 무슨 연구인지까지 묻진 않을걸요.”
“좀 더 재밌는…… 코델리아가 사교계 사람들에게 힘 좀 줄 만한 얘기는 없을까요?”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필요 없겠지. 마도 공학자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 코델리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 별 기대를 하고 있진 않을 테고.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어깨에 뺨을 묻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적당히 얼버무리는 게 가장 쉬웠다. 폭발은 연구하다가. 전투는 잘 끝났고, 코델리아와 알라스테어를 구해 줬던 빨간 머리 남자가 놈들을 끌고 떠났고.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숙녀분, 쓸데없는 생각 말고 사격장에 새로 넣을 기계나 고민해 봐요.”
“어? 뭐 넣어 줄 건데요?”
“뭐든지?”
“그럼 카메라랑, 음, 잠시만.”
뭐가 있을까. 사격장에서 훈련할 때마다 막연히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장치들이 몇 개 됐던 것 같은데, 막상 말하려니 또 생각이 나지 않는다.
“좀 더 고민해 봐요.”
“근데 당신이 모르는 장치가 많을 텐데.”
“걱정 말아요. 잘 만들 테니까. 우리한텐 시간이 아주 많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시더의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그 말대로다. 그들에겐 시간이 아주 많았다. 잘못 만든 기계를 고치고 개량할 시간은 차고 넘쳤다.
에스페란사는 서랍에서 공책과 펜을 꺼내왔다. 오래 쓸 곳이다. 애정을 갖고 가꿀 ‘내 공간’.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참 이것저것 떠오르는 대로 적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1층 현관에서 코델리아가 도착하는 소리가 났다. 에스페란사는 대강 그려놓은 사격장 구조도 위에 펜을 내려놓았다.
“손님맞이에 좋은 꼴은 아닌데.”
“아팠다고 해요.”
맞은편에서 책을 읽던 시더가 책 너머로 눈만 들며 말했다.
“당신도 같이 가야겠어요.”
“레이디 코델리아를 만나는 데 사람이 둘씩이나 필요하다고요?”
“당신이 집주인이잖아요.”
시더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아직은.
“좋아요.”
시더가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찻잔을 쥐고 앉아 있던 코델리아는 문소리가 들리자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미색 드레스와 금빛 머리칼, 흰 얼굴이 천사처럼 환했다.
“윽.”
눈앞에 나타난 인물이 에스페란사가 아니란 걸 확인한 코델리아가 반사적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 부딪칠 뻔한 시더의 얼굴도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는 한걸음 옆으로 물러나며 뒤에 있던 에스페란사를 향해 물었다.
“아직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요?”
“그런 편이죠.”
코델리아가 팔을 넓게 벌려 에스페란사를 끌어안았다. 포옹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에스페란사는 그대로 몸을 세워 소파로 향했다. 자기도 모르는 새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코델리아가 꺅,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팔을 놓고 자리로 돌아갔다.
“실례했어요.”
시더가 혀를 차며 다가와 에스페란사의 옆자리에 앉았다. 상석의 안락의자가 아니라. 코델리아의 눈이 두 사람 사이를 바쁘게 훑었다.
“오랜만이에요. 사실 오랜만은 아니지만……”
“다친 덴 없죠?”
에스페란사가 불쑥 물었다. 코델리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아닌가?’
그러나 그 질문에는 맥락이 있었다. 다리아가 어거스텀 궁전으로 시더를 불러들였던 날, 코델리아는 에스페란사를 안내하기 위해 함께 궁전으로 갔었다.
그 이후 이어진 전투, 그리고 시공간 기계의 문제 때문에 코델리아의 안위를 챙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얼굴을 보고 나서야 코델리아가 그날 궁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궁전에서 있었던 일 얘기라면 레이디 코델리아는 그 두 사람 그림자도 못 봤을 테니 걱정할 것 없어요.”
설명을 꺼내기도 전에 시더가 대답했다. 코델리아도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도 할머니도 전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어요. 그날 폐하의 시녀분들께 붙잡혀서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요. 파혼 얘기라든지, 음.”
말하는 순간마다 해쓱해지는 듯한 얼굴이 고생을 대변했다. 코델리아는 그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다음부터는 예상했던 대화였다. 에스페란사는 이전에 생각했던 대로 무난한 대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지붕은 전투 중에 무너진 거지만요. 그 사람들이 또 던전 같은 걸 만들려 하다가 오히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 셈이죠.”
전투 이야기는 가감 없이 설명했다. 시더가 중간중간 첨언했고, 코델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평생에 이런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들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 나도 겪었지.’
하지만 그 일을 일으킨 사람들은 전부 에스페란사가 처리했다고 하지 않나. 고개를 주억인 코델리아는 다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에스페란사. 정말 다친 데 없는 것 맞아요?”
얘기만 들어봐도 절대 부상 없이 끝날 전투가 아니던데. 뾰족한 눈길이 에스페란사의 몸을 훑었다. 이어 코델리아는 시더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뻔뻔한 얼굴에서는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에스페란사에게로 눈을 돌렸다. 강렬한 시선을 이기지 못한 에스페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음, 있었는데. 치료했어요.”
“다친 거 맞잖아요!”
“별거 아니었어요.”
보란 듯이 팔을 걷어 보였다.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한 팔을 확인한 코델리아가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그렇다니까요.”
“흐음. 좋아요. 어쨌든, 그럼 이제 더 이상 스털링에서의 일 같은 게 벌어지진 않겠네요!”
손뼉을 딱 치며 말한 코델리아가 눈썹을 찡그렸다. 스털링에서의 기억을 되짚는 듯 명랑하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언제나 당신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모든 걸 막을 수도 없고요. 정말 다행이에요.”
“엄연히 말하면, 없는 건 아니에요.”
대답한 쪽은 시더였다. 에스페란사마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또 생긴다고요?”
“저번에 에이번데일에 있을 때 말했잖아요. 균열이니 상처니.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으니 이 세계에도 있겠죠. 게다가 저번 전투로 다리아가 상처를 아예 헤집은 꼴이라. 아마 당분간은 종종 던전이 나타날 것 같네요.”
최대한 돌려 말했지만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무려 두 개의 황금 발톱이 한 시점에 존재했던 곳이다. 에스페란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두 개 모두 시더의 손에 분해되어 본체는 시더의 연구실에, 마정석은 에스페란사의 인벤토리에 넣어두었지만…….
“마벨우드는 운이 좋았어요. 그렇죠? 다른 곳도 마벨우드만큼 운이 좋기는 힘들 거예요. 어쩌면 스털링보다 운이 나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