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28
229화
코델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처음 만났던 날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걸 기억해요?”
그랬었던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본 에스페란사가 한발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쁜 놈을 해치우고 나서……”
“그때 당신은 알고도 방관하진 않을 거라고 했어요. 오늘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요. 당신이 변해서 기뻐요.”
눈을 동그랗게 뜬 에스페란사가 그 말을 곱씹었다. 잠시 흐릿해졌던 희귀한 보랏빛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코델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짐짓 입술을 끌어올리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여전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에 장난기가 반짝였다.
“내 드레스는 무슨 색이면 좋을지, 되도록 빨리 전달해 주길 바라요.”
흥, 하고 고개를 픽 돌린 코델리아는 곧 이만 가 보겠다며 성큼성큼 문 쪽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쥔 채, 확인하듯 다시 한번 덧붙였다.
“내 말 명심해요!”
배웅해줄 틈도 없이 문이 쾅 닫혔다. 에스페란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만 이해를 못 한 건가.”
“그런 것 같네요.”
진짜로? 에스페란사는 동그란 눈으로 시더를 돌아보았다.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시더는 웃기만 했다. 가늘어진 눈동자에 매달린 웃음기가 얄밉기 짝이 없다.
“설명해 줄 생각 없어요?”
“아직은요. 자연히 알게 될 거라고 해 둘게요.”
“나만 바보 만드니까 좋아요?”
“지금 바보는 내 쪽이에요. 걱정 말아요.”
그러니까 대체 이게 무슨 말인데?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넘겨주며 빙그레 웃었다.
“알았어요. 금방 가르쳐 줄게요.”
“아, 그게 지금은 아니고요?”
“당연히 지금은 아니죠. 나도 준비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코델리아의 드레스를요?”
“우리 이 얘기 그만 해요.”
시더는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더니 아예 도망쳐 버렸다. 가 봤자 서재겠지, 뭐. 홀로 남은 에스페란사가 혀를 찼다.
“뭐길래?”
응접실에서 혼자 발을 구른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뭘 저렇게 숨긴 적이 없었는데.
‘뭔데 나만 못 알아들었지?’
자부하건대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니었다. 대체 뭐지?
“무슨 일 있으세요?”
문 사이로 고개를 내민 애니가 환한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옷 수선이 다 돼서 말씀드리러 왔는데.”
“아, 잘 왔어. 있잖아.”
바로 애니를 붙잡고 물어보려던 에스페란사가 멈칫했다.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 오빠네 가족들은 좀 어때?”
“이젠 괜찮아요. 당분간 머물 새집도 구했고요. 자기 사정이 괜찮아지니까 저보고 결혼하란 소리를 하는 게 문제지만요.”
“고생이 많겠네.”
“여기 있으면서 오빠 편지는 전부 태우고 있어요.”
애니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도와줄 것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해.”
“집 구할 돈도 아가씨가 보태 주셨으면서! 요즘은 정말로 괜찮아요. 일도 여유롭고, 급료도 많이 주고. 전 여기서 평생도 일할 수 있어요.”
“그래. 평생 여기서 일하자.”
“아가씨, 혹시 애니 여기 있나요? 잼 만드는 거 도와달라고 했는데.”
엄격한 얼굴을 한 매들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애니가 흠칫하며 눈을 굴렸다.
“내가 잠깐 불렀어. 얼른 가 봐.”
매들린을 따라 허둥지둥 떠나는 애니의 뒷모습을 보며 웃던 에스페란사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뭔가, 정답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는데.
그러나 다시 고민해 봐도 어느 부분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천천히 서재로 돌아갔다.
시더는 책상 대신 소파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었다. 에스페란사가 돌아오자 한 손을 뻗어 손목을 끌어당겼다.
“이쪽으로 와요.”
시더의 무릎 위에 앉은 채 몸을 팔걸이에 기댄 꼴이 된 에스페란사는 익숙하게 몸이 편한 위치를 찾았다.
“뭐 봐요?”
“이 얘기는 조금 있다가…….”
“아, 이것도 준비가 필요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웃음기 어린 어투로 대답한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콧방울을 손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먼저 던전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아. 그렇지. 그 얘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당분간 던전이 생길 거라고 했었죠? 그 당분간이 얼마 정도예요?”
중요한 질문이다. 시더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십 년?”
“십 년?”
생각보다 길다. 하지만 상처 입은 세계가 회복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보면 길다고만 할 것도 아니었다.
십 년이라.
적어도 십 년간, 이 세계는 에스페란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가만히 입 안으로 되뇌었다. 이곳에도 내가 할 일이 있다.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세계에 있다.
‘다행이다.’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닌데도, 마음 한편에서 안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춘 시더가 물었다.
“남을 만했다는 생각이요.”
“이런 얘기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나만큼은 아니지만 이 세계도 당신이 필요한 모양이죠.”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상기된 뺨을 손등으로 살살 건드리며 말했다. 에스페란사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럼 던전 탐지기를 전국에 뿌려야겠네요. 거의 인터넷 수준으로 설치를 해야겠는데. 기반시설이 없어서…….”
다행히 시더는 더 놀리지 않았다. 에스페란사의 손끝을 쥔 그가 선선히 대꾸했다.
“탐지기 범위를 늘려 볼게요. 시청에 하나씩만 있어도 충분할 정도로. 사람이 안 사는 지역은,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시청이라. 시청. 에스페란사가 눈을 찡그렸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도심이고, 소외되는 지역도 많다.
“시청 말고 기차역은 어때요?”
“그것도 괜찮겠네요. 일단 어느 쪽이든 배포할 방법이 필요할 테고, 탐지가 되는 곳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기동력도 필요한데…….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이걸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드디어 편지가 나오는군. 에스페란사가 냉큼 편지를 낚아챘다.
“갈리스턴 공작?”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그도 슬슬 뒷수습을 해야겠죠.”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람을 만나러 가 주기라도 해야 돼요? 굳이?”
“물론 내 마법사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지만.”
시더가 나직이 운을 뗐다. 이번엔 놀리는 기색 없이 담백한 진심이었다.
“들어 봐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요. 예전 같은 태도로 나오진 못할 거예요.”
“난 그냥 그 사람이 우리를 오라 가라 하는 게 싫어요. 자기가 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있을 것 같군요. 눈에 띄겠지만.”
“알게 뭐람.”
잠깐 머물렀다 떠날 이방인일 때는 이 사회의 법칙에 따라 어울려 줬지만,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말했다.
“……그냥 우리가 찾아가는 걸로 해요. 대신 시간은 바꿔서.”
“왜 마음이 바뀌었죠?”
“거기서 맘에 안 들면 박차고 나오면 되는데, 여기서 마음에 안 들면 그 사람을 끌어내야 되잖아요.”
마음에 드는 이유였다.
시더는 공작이 제시한 날짜에서 이틀 후를 제시했다. 전통적으로 왕실 가족이 오찬을 위해 모이는 날이었지만, 공작은 선택권이 없었다.
* * *
어차피 양쪽 다 괴물이다. 그럴 바엔 잔인하고 앞뒤 가리지 않는 괴물보다는 온정적이고 약점도 있는 괴물 쪽이 낫다.
갈리스턴 공작 에드먼드가 사흘을 꼬박 새우고 얻은 결론이었다. 셔버리 공작부인은 부채를 살랑이며 말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니?”
정해진 답에 이유를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한 소리였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입니다. 과연 온정적인 괴물로 남아 줄 것인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변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변수를 없앨 수 없다면 통제해야 하고, 통제도 할 수 없다면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말은 통하는 사람이고, 이제 적도 없어졌으니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만 한다. 아니라면 정말로 답이 없으니까.
“내가 할 일은 없니?”
셔버리 공작 부인이 이런 일에 자진해서 나설 사람은 아니었다. 의도가 있다면 모를까. 공작의 목소리가 책망하듯 낮아졌다.
“갖고 싶은 보석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알잖아. 이번 경매에 나온 거! 데보라 그 밉살맞은 계집애가 눈독 들이고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그걸 내버려 두겠어?”
“숙모님이 그 보석을 가지진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낙찰은 받게 해 드리겠습니다.”
말뜻을 알아들은 공작부인이 손뼉을 쳤다.
“그거면 됐어! 에드먼드, 내가 뭘 하면 좋겠니? 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에스페란사 헌터는 셔버리 공작부인을 제법 좋게 보는 것 같았다. 첫인상이 최악이었을 텐데도. 능력이라면 그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일단, 따라오십시오. 손님을 맞으러 갈 시간입니다.”
파인먼트 하우스의 로비로 내려오던 공작이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검은 실크 모자. 몸에 딱 붙는 블라우스와 날렵한 대각선으로 떨어지는 치맛자락. 검은 가죽 군화. 전체적으로 특이하긴 하지만 바깥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복장이었다. 문제는 이곳이 궁전이라는 것이다.
“미스 헌터. 그리고, 에이번데일. 환영하오.”
그 복장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네 사정 봐줄 생각 없다.’
쉽지 않겠군.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럭저럭 우호적인 태도로 인사한 네 사람은 궁전 복도를 가로질렀다.
등을 꼿꼿이 펴고 지나가는 고용인들 중 반절 정도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몇몇은 낯이 익었다. 그들은 에스페란사와 시더를 보고는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단순히 손님에 대한 인사는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뺨을 말아 올려 웃었다.
“아, 여기. 도둑으로 몰려서 소지품 검사를 당했던 방이네요.”
공작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셔버리 공작부인이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분위기가 뻣뻣하게 경직되자 시더가 숨죽여 웃었다. 다들 자기 잘못을 알긴 하나 보지?
잠시 과거의 업보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때의 일은 유감이오.”
“물론 그러시겠죠.”
비꼬는 어투는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듯이 선언하는 듯한 태도였다. 적당히 이 사회의 규범에 맞추어 행동해 줄 생각은 없는 게 분명했다.
“에스페란사 양. 남기로 한 건가?”
“네.”
“영원히?”
“그건…… 아마도요.”
셔버리 공작 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건가? 눈을 슬쩍 돌려 보았지만 공작 부인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결국 그렇게 됐군.”
공작은 일전에 돌아가 달라고 하지 않았냐는 말을 꺼내 에스페란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던전을 겪고 나서 그런가, 확실히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대화가 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