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229
230화
“그럼 신분을 제대로 만들어야겠군. 누군가 호기심으로 들춰보더라도 들키지 않도록.”
“누가 공작 전하만큼이나 집요하게 남의 뒷조사를 하겠어요?”
“이 세상엔 그런 사람이 꽤 많네. 그대도 익숙해지게 될 걸세.”
공작은 희미한 미소로 대답했다.
“신분은 만들어 주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그것 말고도 해 주실 일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시더가 덧붙여 말했다. 아예 작정하고 뜯어가려고 왔는데, 고작 신분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공작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뭐가 더 필요한가?”
“먼저 앞으로 적어도 십 년간 나타날 던전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추적기 설치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내후년까지 전국의 기차역에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약’ 십 년은 ‘적어도’ 십 년으로 탈바꿈했다. 에스페란사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기차역에 납품하는 시계 회사와 연결해 주지.”
“그리고 앞으로 채굴되는 희귀 마정석에 대한 우선권을 주셔야겠습니다.”
날강도가 따로 없다. 에스페란사는 슬슬 턱을 괴었다. 과연 황금 발톱에 들어간 마정석과 같은 것이 존재할까? 적어도 다리아는 13년 동안 찾지 못했다.
“자네는 내가 황제라도 되는 것 같나?”
“그럴 리가요.”
비꼬려고 한 말인데 본전도 찾지 못했다. 갈리스턴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오룬 마정석 우선 매입권 정도는 힘 써보겠네. 하지만 에이번데일, 그런 것을 요구하려면 자네도 양보를 해야 할 걸세.”
어차피 마정석을 원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공장주, 발명가, 제련공, 수집가. 공장주는 희귀 마정석을 큰돈 주고 사들일 이유가 없다. 수집가에게는 매입권 자체가 없다. 그러니 두 부류의 경쟁자만 제거하면 된다. 그에 따라 그가 해야 하는 양보의 성격도 명확해진다.
교류. 협동. 지금껏 그가 귀찮다는 이유로 피해왔던 모든 것들.
앞으로는 지금까지처럼 제멋대로 살면서 제멋대로 연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시공간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분야에서 혁신이 필요했다. 완전히 새로운 해석의 마력학, 마력 효율을 획기적으로 제고하는 방법, 그에 따른 새로운 마정석 제련법. 어쩌면 물리학과 철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협력자가 필요했다. 아주 많이.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프로젝트. 살아온 방식을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감수할 수 있습니다.”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손등에 바쁘게 가로줄을 긋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시더는 그 손을 손가락이 교차되도록 쥐고 뒤집었다. 미소에 여유가 배어 나왔다.
“자네 같은 사람도 변하는군.”
갈리스턴은 무뚝뚝한 눈으로 시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나 하지.”
파인먼트 하우스의 오찬은 맛이 없었다. 좋은 재료를 쓴 고급스러운 요리였지만, 간이 매우 약했다. 에스페란사는 아주 느리게 접시의 반을 비웠다. 술잔은 벌써 세 번째 채우고 있었다.
“이거 우리 기분 나쁘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슬쩍 묻는 말에 역시 접시의 반 정도를 남긴 시더가 대꾸했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를걸요.”
셔버리 공작부인조차 식사를 거의 입에 대지 못하고 있었다.
“몸엔 좋은 거란다…….”
몸에 좋은 걸 먹고 싶었으면 약을 먹었겠지. 이게 진짜 누굴 위한 오찬이람. 에스페란사는 불만스런 기분으로 갈리스턴 공작을 흘끔 바라보았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나?”
“맞는 사람이 없어 보이는데요.”
공작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이어 매끄럽게 잔을 내려놓았다.
“유감이군.”
그는 요리사를 불러 몇 가지를 지시했다. 그 이후 나온 디저트는 지금껏 나온 요리의 맛을 전부 지워버릴 정도로 훌륭했다. 이것만으로 바닥까지 떨어졌던 점수를 0점으로 올려줄 수 있었다.
“아니야. 50점은 줄 수 있어.”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상향된 거죠?”
“술이 엄청나게 좋은 술이잖아요.”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마실 때는 마셔요.”
포도주의 영롱한 빛깔을 바라보며 대꾸한 에스페란사가 천천히 잔을 비웠다.
이 시기로 넘어와서 마신 술 중에 나쁜 술은 없었다. 시더의 찬장에 있던 것도 대단한 수집품들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경매에서 수억에 낙찰되는 술이다. 공작의 와인 셀러에도 몇 병 없을 대단히 귀하신 몸.
‘여기 안 남았으면 이런 것도 못 마셔 봤겠지.’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겠다. 에스페란사는 잔을 입에 문 채 웃었다. 디저트가 마음에 든다고 하니 심지어 몇 개를 더 챙겨 주었다.
“이렇게 극진하게 굴 수도 있었단 말이지.”
공작은 국내 마정석 우선 매입권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정치적 영향력은 없으니 템프턴 수상과 이야기하라고 말하면서도, 편지 몇 장을 써 주었다. 원래 이런 분야에서는 일신의 협상력보다 인맥 넓은 사람의 편지 한 장이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었으므로 이만하면 할 만큼 한 셈이다.
“아. 그리고.”
“또 필요한 게 있나?”
아주 질린 얼굴이었다. 사실상 에스페란사가 뜯어낸 건 공작이 자발적으로 바친 술밖에 없는데. 나머지는 시더가 뜯어냈고, 에스페란사는 옆에서 웃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위협이 된 모양이지만.
“별건 아니고, 헤이븐리는 찾았나요?”
“스털링에 있더군. 광산을 알아보던 중이었던 모양인데, 그도 다리아의 시대가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겠지.”
배신자는 순식간에 끌려왔다. 공작은 원한을 잊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다. 괘씸하지. 괘씸하긴 하지만.
“넘겨줬으면 좋겠어요.”
“그를 어쩔 생각이오?”
“써먹어야죠.”
이런 부분에서 유능한 사람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정보는 때론 잘 훈련된 군사 부대 이상의 값어치를 한다.
“그는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니네.”
“그건 전하가 알 바 아니고요.”
“……조만간, 인계하지.”
그 몇 시간 사이 뺨이 해쓱해진 공작이 잠시 시가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파오란 궐련에 불을 붙인 그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한 몫 뜯어낼 생각밖에 없다.
그래도 이쪽의 요구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의도가 위험하지 않았다. 다리아가 세를 잡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예 손해를 보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정말이지, 한마디도 못 하시더군요.”
시가룸 문을 열고 들어온 시더가 말했다. 그는 파오란 연기가 마음에 드는지 조금 누그러진 얼굴이었으나, 공작이 권하는 궐련은 거절했다.
“에스페란사 양은 어디 있고 자네 혼자인가?”
“공작 부인 전하께서 보석 경매 카탈로그를 보여 주려 하시길래 보내 줬습니다. 전하의 씀씀이는 몰라도 안목만은 존경할 만하니까요.”
“안 그래도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하시더군. 어느 망한 왕실 보물이겠지.”
“그런 것도 나쁘지 않죠. 남의 애인에게 보석을 선물하시는 것은 나쁩니다만.”
얕은 수작이기는 했으나, 이런 식으로 비난을 받을 줄은 몰랐다.
“숙모님의 선물이네.”
“그걸 누가 믿습니까?”
사교계에 셔버리 공작 부인의 주머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네.”
“그러셔야 할 겁니다.”
“에스페란사 양은 이를테면.”
잠시 말을 멈춘 공작이 타들어 가는 궐련을 내려다보았다. 매캐한 연기가 복잡한 머릿속을 채웠다.
“이를테면 이웃집에 사는 드래곤이지.”
딱딱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깜찍한 비유였다. 시더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턱을 괴었다. 계속해 보라는 듯이.
“대체로 온순하지만 존재 자체로 위협적이고, 잘못 건드리면 불을 뿜겠지. 그때는 내 집도 안전하진 못할 걸세. 그러니 나로서는 드래곤이 오래오래 온순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얼마 남지 않은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 끈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에이번데일. 에스페란사 양이 자네를 오래 좋아하도록 노력하게. 우리 모두의 평안을 위해서.”
에스페란사 양의 평안에만 관심 있는 에이번데일 백작은 빙그레 웃었다.
“최선을 다해 보죠.”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가룸을 나왔다. 연기가 몸에 달라붙은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돌아가는 걸음이 빨라졌다.
‘파오란은 끊는 게 좋겠어.’
시더가 응접실 앞에 도착했을 때, 에스페란사는 복도에 있었다.
“왜 나와 있죠?”
“앨리스가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요.”
시더는 그제야 에스페란사의 주변에 하녀와 하인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글바글한 무리 끝에는 공작의 시종인 헨리 베이먼이 서 있었다. 그는 시더와 눈을 마주치자 머쓱한 얼굴을 했다.
“저도 생명의 은인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에스페란사는 그 많은 사람들의 인사를 전부 받아 주었다. 갈리스턴 공작은 고용인들이 생명의 은인에게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모른 척 시가룸에서 나오지 않았고, 셔버리 공작부인은 경매 자금을 받고는 신이 나서 돌아갔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 의외로 내 적성에 맞나봐요.”
돌아가는 마차 안, 에스페란사가 문득 말을 꺼냈다. 갈리스턴 공작의 초대를 받았을 때 보였던 전투적인 기색은 간데없이 말간 얼굴이었다.
“인사를 받으니 좋았어요?”
“보람은 있죠. 아무래도. 물론 보람이 없었어도 그 사람들을 구했겠지만.”
그건 단순히 할 수 있으니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사를 받고 나니, 조금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소방관 같은 게 천직이었나…….”
에스페란사는 눈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당신 말대로라면 던전은 십 년 동안 계속 나올 거고, 싫든 좋든 난 사람들을 구할 거니까. 좋아서 하는 일인 쪽이 낫잖아요.”
“그런가요? 당신이 위험해지지만 않는다면 나도 상관없어요.”
“난 안 위험해요. 내가 던전에서 다치는 것 봤어요?”
자신만만한 대답에 시더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한 번도 없었다. 약간 긁힌 상처 정도를 제외하면. 엉망진창으로 다쳐온 건 이쪽이었지.
“할 말이 없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네요.”
곧 마차 안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에스페란사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눈만 들어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본래대로라면 시더 역시 올해를 넘기지 못할 운명이었다. 어떤 죽음이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결코 편안한 최후는 아니었을 테니까.
‘내가 구했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한다면, 시더 클라이번은 에스페란사가 구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를 원해서 이곳에 남을 생각을 할 만큼.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속으로 덧붙인 에스페란사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증기 마차가 나인 호더 거리를 가로질렀다. 하나둘 가로등에 빛이 들어오는 시간. 노을이 뺨에 고였다. 시계탑의 커다란 종이 여섯 번 울렸다.
“있잖아요. 던전이 또 생기면 나랑 같이 가 줄래요?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시더가 눈을 크게 떴다.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에스페란사가 뭐라 덧붙이려던 찰나였다.
“좋아요. 어디든 같이 가요.”
“어디든이라곤 안 했어요.”
재빠른 대꾸에도 시더는 개의치 않았다. 마차 바깥으로 숨죽인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덜컹거리는 마차가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완결
231화. 에필로그 2.
대학가 인근의 신축 상가 건물 3층. 밝은색의 타일로 꾸민 안과에 막 들어선 남자에게 시선이 쏠렸다. 커다란 체격과 까마귀처럼 새까만 옷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조금 긴장한 듯한 간호사에게 접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외국인인가?”
“엄청 크다.”
교복 입은 여학생 둘이 소리 죽여 속닥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남자는 못 들은 것처럼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눈에 띄나?’
사이러스는 검은 머리칼을 손끝으로 만지며 생각했다. 주류 인종이 아니라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덜 됐다. 이 도시는 주민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화되어 있었으므로. 문제가 되는 건 남들보다 머리 하나 이상 큰 그의 체격이었다.
하지만 별수 없다. 그저 빨리 모든 걸 해치우는 수밖에는.
이름이 불리자, 그는 간호사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과장님’이라고 불린 의사가 컴퓨터에서 눈을 들었다.
“안구 건조증 때문에 오셨다고요?”
사이러스는 통역 기능이 있는 마이크를 매만졌다. 그리고 의사의 말에 대답했다.
“아뇨. 동생분의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연락을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네?”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눈을 깜박거리던 의사가 안경을 벗었다.
“그러니까, 환자가 아니란 말씀이시죠?”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쓴 적이 거의 없는 명함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이러스는 혹시 몰라 여권까지 내밀었다.
숫제 사기꾼 보듯 쳐다보던 의사의 시선은 검색창에 이름을 넣어보고, 뉴스에 뜬 얼굴과 눈앞의 얼굴을 몇 번 대조해 보고서야 조금 누그러졌다.
“아, 이 게임. 꽤 오래 붙잡고 있는 것 같긴 하던데. 그런데 그쪽은 제 동생과 무슨 관계이시죠?”
“지금부터 제가 드릴 이야기는 거짓말도 장난이 아닙니다.”
긴 이야기를 짧게 간추리는 재능은 없었다. 사이러스의 이야기는 투박했고, 때로는 번역기의 성능 때문에 직역투가 남아 있었다. 지극히 현실주의자로 보이는 의사는 눈을 찡그리거나,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도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 모든 허황된 이야기를 참고 들어주던 의사라도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나라에 찾아와서 헛소리를 할 만큼 한가하신 분은 아닌 걸로 보이는데.”
“헛소리가 아니니까요. 동생분은 돌아오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애가 죽었단 얘기예요? 갑자기 왜……? 혹시 지금 이거, 배상금 안 주려고 수작 부리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당장……!”
“편지가 있습니다.”
“무슨 편지요? 당신들이 조작하지 않았단 보장이 어디 있어요?”
“읽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저는 할 수 있는 최대한 책임을 질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편지를 읽어 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사이러스가 편지가 곧 사라질 게임 속에 있다는 말을 덧붙이자, 의사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웬 미친놈이 대낮부터 남의 직장에 와서 깽판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왜.’
하고 많은 곳 중에 이 나라, 이 도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내 동생.
멀리서 온 게 분명한 외모와 한 귀에 꽂은 번역 기계. 신문 기사에 첨부된 사진 속 게임회사 임원과 똑같은 얼굴.
정말 딱 일주일 동안 동생에게선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달리 그 애의 일을 신경 써 줄 사람도 없다.
헛소리. 헛소리야. 사기꾼이라고.
하지만 하나뿐인 동생의 일이다. 이 세상에 고작 둘 남은 피붙이 중 하나. 사기라도 속아줄 수밖에 없다. 그래,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편지를 읽어 달라는데.
그리고 이상하게도, 거짓말일 것 같지가 않았다.
“과장님, 어디 가세요?”
“잠깐 어디 좀 갔다 올게! 급한 일이야!”
오늘 휴무인 동료에게 사정해서 잠깐만 일을 맡기고, 남편에게 두 시간 후에도 연락이 없으면 경찰에 신고해 달라는 연락을 남겼다.
급히 병원을 나온 여자가 사이러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멀지 않은 상가 건물이었다.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경계하던 여자도 단골 베이커리 건물에 도착하자 안도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런 와중에도 가게 주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잊지 않았다.
방 안에는 커다란 누에고치 형태의 기계가 있었다. 이 기계도 동생의 집에서 본 적이 있었다. 요즘 이걸 사 달라고 어린애들이 부모를 그렇게 조른다던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안내에 따라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몇 가지 설정을 빠르게 지나치고 나니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서 있었다.
머리 위로 낮게 지나가는 비행선. 차도 위로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말 없는 마차. 몇 년 전 다녀온 해외여행에서 봤던 것 같은 이국적인 건물들.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다. 백 년 전에나 입었을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숙녀. 그 뒤를 졸졸 따르는 소년 형태의 조잡한 로봇. 코스프레 의상마냥 허벅지를 드러낸 치마에 화려한 모자, 손에는 커다란 총을 든 여자. 아예 웃통을 벗어제끼고 머리엔 토끼 머리띠를 쓴 채 도끼를 짊어진 남자.
사이러스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는 여자를 근처의 집으로 안내했다. 생활감 없이 한기가 드는 집이었으나, 가구는 다 갖춰져 있었다. 허름한 서재에 도착하자 그는 허공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겁니다.”
봉투는 작고 조금 구겨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호기심에 물들었던 여자의 시선에서 ‘내가 굳이 왜 여길 따라왔지.’ 하는 착잡함이 엿보였다. 그것까지 에스페란사와 똑 닮았다.
한숨을 크게 쉬며 편지 봉투를 연 여자가 첫머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을 크게 뜨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글씨체가, 맞네요. 정말로…….”
정말로.
그 낯익은 필체로, 편지 속 동생은 마치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는 듯이 두 사람밖에 모를 어릴 적의 추억을 잔뜩 늘어놓았다. 가득 쌓인 베개 속에 파묻힌 것처럼 푹신하고 부드러운 기억들.
돌아가지 않기로 한 결심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손을 떨었는지 글씨가 엉망이었다. 마지막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티가 났다. 마치 그 글을 쓰던 동생의 표정을 본 듯이 여자의 입술도 울상을 지었다.
사이러스는 에스페란사와 체격도 외모도 다르지만 눈빛만은 자매와 꼭 닮은 여자가 편지를 외울 듯 읽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참 후 고개를 든 여자의 뺨은 말라 있었다.
“영영 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나중에라도 만나러 오겠다고.”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질 나쁜 사기에 걸려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차라리 그러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이게 현실이겠지.
이대로 그 애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한 달, 두 달, 비에 젖듯이 실감하게 될까?
“이게 끝인가요?”
“제가 가진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그렇군요.”
여자는 한참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낯선 도시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사이러스도 알 수 없었다.
“돌아가야겠어요. 두 시간만 봐 달라고 했으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다시는 이곳으로 오실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나는 내 할 일을 해야죠.”
죽지 않았다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니 그걸로 됐다. 아마도.
잘 모르겠다. 편지의 내용을 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아요…….”
돌아가도 그냥 멍하기만 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동생을 잃는 경우의 수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그 애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 그 애가 언젠간 돌아오겠다고 한 것처럼.
여자는 결국 떠나갔다. 아쉬운 듯 편지를 몇 번이고 돌아보다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사이러스는 홀로 남아 두 세계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모습을 조금 더 바라보았다. 이제 곧 사라질 풍경이다.
그는 에이번데일 저택으로 향했다. 서늘한 공기, 한때 정원이었던 곳에 종아리 높이까지 자란 풀. 그간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듯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살해당한 젊은 백작. 주인 잃은 저택. 태양마저 빛을 잃을 것 같은 고요함.
그 위로 한순간 다른 모습이 겹쳐졌다.
차오르는 잔디, 흐드러지는 꽃나무. 먼 시계탑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흑단으로 만든 세련된 마차가 증기를 뿜으며 저택으로 들어간다. 마차 문이 열리고 흰 모자를 쓴 여자가 현관 앞에 섰다.
늘씬하고 꼿꼿한 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흰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모자를 약간 위로 치켜올리고는 발코니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모자 그림자 아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다음 순간, 여자는 단숨에 뛰어올라 마차를 밟고 발코니 난간을 타 넘었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창문 안쪽에서 길고 우아한 손이 불쑥 나타나 여자의 손목을 쥐고 끌어당겼다. 창문이 닫히고 커튼이 내려왔다.
커튼 색으로 짙게 물든 창문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 사이러스는 몸을 돌렸다.
그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헌터와 매드 사이언티스트
@JV 공금